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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아/ 비둘기, 우울하거나 무미건조한, 암울하거나 명랑한 도시우화

고충환

조민아/ 비둘기, 우울하거나 무미건조한, 암울하거나 명랑한 도시우화 


비둘기는 도시적인 새다. 도시 어딜 가나 비둘기가 없는 데가 없다. 크고 작은 광장과 공원은 물론이거니와 지상지하철 플랫폼에도 한길에도 심지어 도로 위에도 비둘기는 어김없이 있다. 처음부터 도시에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부 산비둘기가 없지 않지만, 왠지 모든 비둘기가 도시에 살기로 작정이라도 한 모양이다. 사람과 더불어 사는 것이 좋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길들여졌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쩔 수 없어서 같이 사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렇게 어느새 비둘기는 천덕꾸러기가 돼 있었다.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지 마세요. 스스로 먹이활동을 통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줍시다. 비둘기가 좀 모인다 싶으면 어김없이 찾아볼 수 있는 팻말이나 플래카드다. 비둘기를 위한 것일까. 비둘기를 향한 사람의 이타심일까.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아무데나 똥 싸고 보푸라기 휘날리는 것이 싫고, 예고도 없이 날아오르면서 사람들을 놀래 키는 것이 싫고, 구구거리면서 연신 앞뒤로 머리를 주억거리며 걷는 것이 싫고, 도무지 감정이 있을까 싶은 무표정한 눈이 싫은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때로 전기합선을 일으킨다는 증명되거나 증명되지 않은, 또 다른 의심스런 이유가 추가된다. 그 밖에도 비둘기가 싫은 이유로는 얼마든지 들 수가 있다. 이 이유는 합당한가. 비둘기가 감정이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가 있는가. 비둘기가 타고난 몸짓이 싫은 이유가 될 수가 있는가. 그냥 싫고 무조건 싫은 거다. 흔해서 싫고, 시도 때도 없이 눈에 밟혀서 싫고, 둔해서 싫고, 제대로 날지도 못하는 것이 꼭 나는 흉내를 내는 것 같아서 싫고, 주억거리는 꼴이 꼭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싫다. 
여기에 핵심이 있고, 작가가 비둘기를 그리는 이유가 있다. 바로 비둘기와 사람을 동일시하는 것이며, 비둘기를 통해서 사람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엄밀하게는 그저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이유도 없이 싫은 비둘기처럼 흔한 사람들이고, 보통사람들이고,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고,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지만 그들 탓에 사회가 돌아가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다. 이 선남선녀들을, 필부필부들을 조르주 바타이유는 잉여인간(실제로는 잉여)이라고 부르고, 조르주 아감벤은 벌거벗은 인간(호모사케르)이라고 부른다. 주지하다시피 자본주의 사회는 경제제일주의원칙과 효율성극대화의 법칙에 의해 견인된다. 그런 만큼 경제성이며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들이 사회의 변방으로 밀려난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그렇게 변방에 처한 것들을 잉여라고 부르는데, 지극한 금기로서의 죽음이, 그리고 흥미롭게도 예술이 지목된다. 조르주 아감벤에 의하면 이런 잉여는 때로 법으로부터 조차 보호 받지 못하는 사람들 곧 희생양이 된다. 그리고 기껏해야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나 의미가 있을 이 사람들의 성생활이며 건강을 관리하는 제도의 시스템을 미셀 푸코는 생물 권력이라고 부른다(조르주 바타이유는 소비와 낭비와 증여 같은 경제개념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이론에 입문한다. 그리고 조르주 아감벤의 희생양 이론은 미셀 푸코의 권력이론의 해석에 힘입고 있다). 
이처럼 작가에게 비둘기는 빽도 없고 줄도 없는 보통사람들을 상징한다. 때로 가방끈마저 짧은 성실하고 묵묵한 건전시민을 상징한다. 그리고 여기에 이유도 없이 싫은 타자며 사회적 약자를 상징한다. 그네들에 대한 생각을 알아보기 위해 작가는 비둘기를 내세워 설문을 제안한다. 비둘기에 대한 보편적인 의견을 들을 요량으로 인터넷에 관련 글을 올린 것이다. 그리고 200건의 댓글이 달렸다. 그 내용을 보면 대략 혐오스럽다, 불쌍하다, 귀엽다, 무섭다, 정도로 요약된다. 비둘기에 대한 저마다의 생각을 물은 것이지만, 여기에 사회적 약자며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오버랩 된다. 외관상 양가감정으로 상반돼 보이지만, 사실은 타자를 향한 일관된 혐오와 배제로 모아진다는 점에서 하나같다. 이를테면 타자는 혐오스러운 대상이다(혐오스런 마츠코). 사회적 약자는 불쌍한 존재지만, 동시에 니체는 도덕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타자를 향한 동정심과 자선을 단호히 경계한다. 그건 잘해야 그들을 노예의 상태로 묶어두려는 기획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타자는 귀엽다. 욕망의 대상이다(욕망의 모호한 대상). 이외에도 사회적 약자는 때로 무서운 존재다. 거세된 욕망을 내재화한 존재며, 따라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존재다. 여차하면 상징계의 질서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귀환한 실재계의 주민들이다(프로이트의 억압된 것들의 귀환, 자크 라캉의 실재계, 슬라보예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클로드 샤브롤의 의식). 
그렇게 작가는 혐오스러운, 불쌍한, 귀여운, 무서운 비둘기들을 그렸다. 응시하고 탐색하는(사실은 응시하고 탐색하는 것처럼 보이는) 비둘기들을 그렸고, 비둘기의 부리를 가진 남자를 그렸고(현대인의 초상?), 쓰레기 더민지 알 수 없는 꾸러미로 가득한 의심스런 공간 속에 플라스틱 교통정리장치를 고깔처럼 눌러쓴 사람과 몰려드는 비둘기 떼를 그렸다(현대인의 타자감정?). 그렇게 구구거리는 비둘기들 위로 다이아몬드가 떠다니고 방울토마토가 부유한다. 당신은 방울토마토를 따서 불쌍한 비둘기에게 먹이로 줄 수도 있고, 아니면 다이아몬드의 권능으로 혐오스런 비둘기를 쫒아낼 수도 있다. 이제 비둘기의 운명은 당신의 손에 달렸다. 비둘기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손에 쥔 것이다. 하지만 권력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돈을 주고 사야한다. 무슨 말인가. 화면에 떠다니는 다이아몬드와 방울토마토는 상징이다. 그림 속 캐릭터의 활성 비활성을 결정할 수 있는, 그리고 여기에 상벌을 줄 수도 있는 상징이다(피에르 부르디외의 상징자본). 이로써 당신은 졸지에 게임 속에 들어와 있는 유저가 된다. 덩달아 당신이 비둘기를 어떻게 보는지, 당신이 타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불현듯 분명해진다. 사실을 말하자면 설문(안양 예술도가 생생 모종밭 지원 사업)도, 게임의 도입(심즈 Sims)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자신의 주제와 작업의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작업으로 하여금 생생한 삶의 축도가 되게 하기 위해 작가가 도입한 방법이다. 

그동안 주제를 보면 작가의 작업이 보인다. 숙련과 노하우(2015-2016), 삶은 서커스의 줄 타는 광대처럼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매사에 기계부품처럼 정확하고 어김없어야 한다(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와 질 들뢰즈의 제도기계). 오늘의 기약(2017), 사실은 미래가 없는 세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암울한 세대감정의 역설적 표현이다. 소란스러운 적막(2018), 여기서 작가는 정상성으로 포장된 일상성을 뒤로 하고 비정상성의 삶의 현장에로 이끈다. 생산적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불모의 현실에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미셀 푸코의 정상성과 비정상성 논의,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소격효과,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 그리고 키치의 대마왕 밀란 쿤데라가 유일하게 인정한 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 그리고 비껴진 자리에서(2019), 작가는 다른 시각으로 보기를 주문한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안중에도 없던 비둘기가 보이고, 안보이던 타자가 보인다. 
이 일련의 주제와 작업들에서 작가는 스스로를 타자로 규정하면서 타자의 시각에서 타자를 본다. 막 30대에 진입한 세대, 삼포세대, 88만원 세대의 성실하고 묵묵한, 기약이 없는, 어쩜 자신도 모른 채 비정상과 불모의 공모자가 된(피에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세대감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제 비둘기의 눈으로 우화도시를 보고, 회색처럼 우울한 우의적(알레고리적) 삶의 현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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