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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숙, 상실한 것만이 그리워할 수 있다

고충환

최원숙, 상실한 것만이 그리워할 수 있다


원래 그림은 그리움에서 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어원적 근거나 진위여부와는 무관하게 예술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전쟁터에 나가는 애인의 실루엣을 벽에 그려놓은 것에서 회화가 유래했다는 신화가 있다. 비록 애인은 없지만, 문득 애인이 그리울 때마다 보고 마음껏 그리워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회화는 그리운 타자를 그리는 기술이 되고, 타자를 그리워하는 기술이 된다. 그리고 나르시스 신화는 그리운 자기를 그리는 기술이며, 자기를 그리워하는 기술에서 회화가 유래했다는 또 다른 기원에 대해서 전해준다. 여기서 그리움의 대상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란 점에서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이 모든 회화의 근간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임을 말해준다. 그렇게 예술은 타자를 그리워하고, 자기를 그리워하는 기술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의미심장한 것은 정작 그 그리움의 대상인 타자도 그리고 자기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 부재하는 존재, 다만 부재로서만 겨우 존재하는 존재, 그러므로 어쩜 존재의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벽에 비친 실루엣이 그렇고, 물에 비친 반영상이 그렇다. 여기서 다시 예술은 암시의 기술이 된다. 부재를 통해 존재를 암시하는 기술이 된다. 부재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는 기술이 된다. 그렇게 예술은 부재하는 것에 대한 감정인 상실감과 연관되고 그리움과 연관된다. 사람은 상실한 것만을 그리워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다시 예술은 어쩜 상실한 것을 되불러오는 기술일 수 있다. 상실한 것, 잃어버린 것,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되불러오는 기술일 수 있다. 예술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기술이라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어쩜 그리운 걸 그리워하는 감정인 멜랑콜리는 예술의 특수한 경우라기보다는, 모든 예술의 이면에 면면히 흐르는 예술의 본질이며, 예술만이 되불러올 수 있는 원형적인 정서로 볼 수 있겠다. 작가 최원숙은 그렇게 상실한 것, 부재하는 것, 그러므로 원형적인 존재를 그리워하는 그리움을 그린다. 

작가의 근작은 주제나 경향 면에서 전작과 크게 다르지 않다. 큰 틀을 견지하면서 주제며 경향을 심화하고 변주하는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큰 틀이란 뭔가. 주제 면에서 그건 당연 그리움이다. 그리움의 대상을 그리는 것인데, 전작에서 그 대상이 고향이라고 한다면, 근작에서는 어머니가 된다. 고향과 어머니, 서로 다른 주제 같지만, 알고 보면 서로 통하는 주제다. 고향이 어머니를, 어머니가 고향을 서로 싸안는 형국이다. 표면적으로 고향은 어머니가 나를 낳은 곳(지정학적 고향)을 의미하며, 신화적으로 어머니는 모든 존재가 유래한 모태며 원형으로서의 고향(존재론적 고향)을 뜻한다. 
이처럼 고향은 단순한 지정학적 장소를 넘어선다. 모든 상실한 것들이 유래했을, 상실하기 이전의 충만한 상태 그대로를 고이 간직하고 있을 어떤 장소, 대상, 감정, 관념일 수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았을 작가의 유년시절일 수도, 세상과 대면하기 전 어머니의 자궁(모태)일 수도, 이보다 더 까마득한 경우로 치자면 존재의 DNA가 유전되었을 집단무의식(칼 융의 원형)일 수도 있다. 여기에 상실감은 현대인의 징후며 증상일 수 있다. 지극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상실감이 팽배한 시대이기에 상실 이전의 원형을 되불러오는 작가의 그림은 오히려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안을 주고(때로 그게 부재를 통한 거짓 위안이라 하더라도), 그리움에 빠져들게 만들고(그리움 자체가 이미 치유다), 멜랑콜리에 젖게 만든다는 점에서 공감을 얻고 설득력을 얻는다. 
그렇게 작가는 근작에서 어머니를 그린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그리운 마음(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염원)을 그린 것이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반야심경을 외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사전에 찾아보면, 반야심경의 핵심개념은 공이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며, 실체가 없는 현상이다. 실체가 없으니 원래 현상도 없다. 그래서 현상에 미혹되지 않는 참된 마음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마음이, 부정을 넘어선 대긍정의 마음이 중요하다. 
작가는 그 마음을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염원(간절한 마음)이라고 본다. 그리고 지금 다시 그 염원을 어머니에게 되돌려주고 싶다. 그럼, 어떻게 되돌려줄 것인가. 그래서 호출된 소재가 버선이고 연꽃이다. 수수하고 가지런한 버선은 어머니의 성정을 상징하고, 진흙 속에서 오히려 고귀한 연꽃이 어머니의 염원(자식을 향한 염원, 존재를 싸안는 염원)을 표상한다. 그렇게 그림은 버선과 연꽃을 중심으로 한정된다. 전작에서 고향을 불러왔던 소재들, 이를테면 진달래, 목련, 양귀비, 원앙, 백조, 제비, 나비와 같은 자연소재들, 그리고 도기와 화병 같은 생활기물들이 생략된다. 때로 제비가 그리고 원앙이 보이기도 하지만, 크게는 주제를 집중 부각하는 화면이 단출한 느낌이다. 차이가 있지만, 대개 화면 이면에 버선이 배경화면처럼 받치고 있어서 어머니의 존재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 표면에 부유하는 연꽃과 버선이 어우러진 그림이 장식적이고, 소소하고, 민화적이고, 여성적이다. 
그림에 성별이 없지만, 그럼에도 작가의 그림은 화조며 초충을 한 땀 한 땀 일일이 수놓는 방법으로 자수와 같은 생활에 필요한 기물을 직접 만들어 썼을 규방문화의 생활사를 떠올리게 하고, 전통적인 자개장인의 섬세한 솜씨를 떠올리게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손길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마도 작가의 유년시절 일상이었을, 어머니로부터 유전되었을,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아이덴티티를 형성시켜주었을 생활감정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비록 자신의 유년을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어머니를 향한 염원 그러므로 간절한 마음)를 그린 것이지만,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유년과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대동소이하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모더니즘 소설의 효시로 알려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 과자가 입안에서 내는 소리와 향을 음미하면서, 순간 자신이 유년시절로 되돌려진 추억에 대해서 적고 있다. 그래서 이후 시간여행을 매개해주는 현실 속의 계기를 프루스트효과라고 일컫는다. 여기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라는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상실한 것, 잃어버린 것, 돌이킬 수 없는 것, 그리고 그렇게 현실로부터 다만 그리움의 대상으로 전이된 것을 되불러오는 예술의 기술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경우로 치자면 버선이, 버선과 어우러진 연꽃이 상실한 어머니를 불러오고, 유년을 되불러오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상실한 것은 실질적인 의미로서보다는 상실한 감정 곧 상실감에 가깝다. 존재론적 조건으로서의 결여와 결핍의식에 가깝다(토마스 만은 예술은 결핍 위로 솟아오르는 무엇이며, 결핍의식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고 했다). 앞서 상실한 것만이 그리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상실(혹은 상실감)은 멜랑콜리를 불러일으키는 예술의 전제가 된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어쩜 상실을 그리워하는 그리움을 그리는 그림은 동시에 이상향을 그리고 유토피아를 그리는 것일 수 있다. 유토피아는 장소를 뜻하는 토피아(토포스)에 부정접두어 아가 붙어 실제로는 없는 장소(아토포스), 부재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그렇게 없는 장소만이 그리운 장소가 되고, 그리운 대상으로서 비로소 그림으로 그릴 수가 있게 된다. 작가는 그렇게 유년을 그리고, 어머니를 그린다. 고향을 그리고, 이상향을 그리고, 유토피아를 그린다. 상실을 그리고, 결핍을 그린다. 상실한 것을 되불러와 위로하고 치유하는 그림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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