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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청년미술프로젝트/ 18개의 별들, 18개의 질문들

고충환

2019 청년미술프로젝트/ 18개의 별들, 18개의 질문들 


2009년 시작된 청년미술프로젝트가 올해로 11회째를 맞았다. 처음엔 독립전시로 시작했다가 이후 대구아트페어 특별전 형식으로 열리게 되었다. 그동안 시장 중심의 미술현장에 활력을 불어넣는 한편, 기성 화단에 새 피를 수혈해 제도권미술을 건강하게 떠받쳐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젠 대구아트페어와 함께 지역화단을 넘어 국제적인 규모로 발돋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파트너로 여겨지고 있고, 그 양각구도가 대구아트페어만의 차별화된 특수성마저 담보해주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전시는 매회 주제를 정해 기획전 형식으로 열리고 있는데, 올해 주제는 <별이 빛나는 시간_star, start of point>이다. 새로운 도약을 예비하는 작가들을 격려하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밤하늘별처럼 스스로 빛나라고 주문하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여기에 스스로 빛을 내는 별들이 있다고 제안하고 초대하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별 자체는 고독하다. 너무 멀어서 고독하고, 비현실적이어서 고독하고, 세상 저편에서 발신된 알 수 없는 신호 같아서 고독하다. 여기에 별이 빛나는 현상과 함께, 혹은 별이 빛나는 현상보다는 별이 빛나는 시간에 방점을 찍고 싶다. 
별이 빛나는 시간은, 밤이다. 밤에 별은 빛나고, 어둠이 깊을수록 더 빛난다. 밤이 깊고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더 빛난다. 그 자체가 예술에 대한, 창작에 대한 알레고리 같지 않은가. 밤을 밝히고 어둠을 걷어내는데 예술의 존재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밤은 뭐고, 어둠을 밝히는 예술은 또 뭔가. 암울한 시대에 맞서는 시대정신이다. 존재론적 어둠, 타고난 밤, 태생적인 결핍에 민감한 피부다. 둔감한 의미들, 너무 쉽게 거래되는 소통들, 체제안정적인 상투어들(doxa), 안 봐도 비디오인 클리세들에게서 처음의 의미, 간과된 의미, 억압된 의미, 거세된 의미, 의미 이전의 의미, 미처 의미화 되지 못한 의미, 의미화를 거부하는 의미, 다른 의미들을 불러오고 파생시키는 의미, 항상적으로 열린 의미를 구제하고 복원하는 것이다. 더듬거리며 말하기고 어눌하게 글쓰기다.  
조르주 바타이유라면 무정형으로 정형을 타파하는 일이고, 모리스 블랑쇼 식으론 의미의 바깥에 의미를 세우는 일이다. 여기에 이런 무정형을 실천하는 작가들이 있고, 의미의 바깥에서 의미를 더듬는 작가들이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 말잔치라고 치부해도 무방하다. 적어도 이 전시를 계기로 예술의 존재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동기부여는 될 수가 있을 것이고, 그것으로 이미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피상적인, 표면적인, 표피적인, 가벼운 시대에 예술은, 그 속을 까뒤집어 보이는 무의미한 몸짓이라도 해야(그리고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 중 강력한 정의 가운데 하나가 질문이다. 예술은 질문의 기술이다. 여기에 18개의 별들이 있고, 18개의 질문들이 있다. 세상 저편에서 발신된 신호(아님 징후? 증상?) 같은, 별처럼 깜박이며 소통하기를 기다리는 질문들이다.  

디지털 이후, 포스트디지털. 현대문명에 가장 강력한 변화를 초래한 계기로 치자면 단연 디지털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현대문명을 디지털 이전과 이후로 구분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게 디지털이 초래한 변화는 생활환경을 바꾸고, 창작환경을 바꾸고, 창작주체의 의식마저 바꿔놓고 있다. 김민정, 림유, 정기웅, 서상희 같은 작가들이 이렇듯 변화된 환경을 반영하고 있다. 
그 중 김민정은 소셜미디어의 이중성과 양가성을 다룬다. 자기를 전시하고 싶은 욕망과 동시에 사생활을 보호받고 싶은 욕망이 충돌하는 이율배반적인 가상현실공간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소통을, 그러므로 불완전한 소통을 다룬다. 이모티콘과 같은 추상적인 기호 아님 감정적인 부호의 교환으로 이루어지는 소통, 그러므로 소외된 소통을 다룬다. 그리고 자동기술법을 연상시키는, 무의식의 즉각적인 기록을 보는 것 같은, 상호이질적인 형식, 방법, 재료, 주제, 매체, 영상, 사진, 낙서, 텍스트들이 유기적인(무분별한?) 덩어리를 이룬 선묘 위주의 그림을 림유는 <우주의 두통>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우연하고 무분별한 부분들의 집합으로 구조화된 파편화된 주체를 소우주라고 보고, 그 주체가 겪는 형질과 증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일 터이다. 작가는 이것들을 다 불러와 디지털이미지로 버무린다. 디지털이 없었음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재현된 주체는 아마도 디지털주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디지털주체는 정기웅의 사진조각 작업에서 보다 뚜렷한 형상화를 얻는다. 투명필름(폴리카보네이트필름)에 사진을 고착시켜 만든 입체작품을 작가는 각 이브라고, 그리고 아담이라고 명명한다. 디지털프로그램을 이용해 디지털모델링 기법으로 만든 인간형상이며, 세상에는 없는 인조인간들이다. 그런 만큼 초상권에 걸릴 일도 없다. 비록 이미지지만 엄연히 자신이 창조한 인간인 만큼 아담이라고 그리고 이브라고 명명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작가는 디지털 이후 신인류의 역사를, 그러므로 자신만의 창세기를 써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각 그림과 영상 이미지 그리고 실물을 하나의 공간에 공존시키는 서상희의 작업 <가상정원>은 실재와 이미지와의 경계를 허문다. 이로써 진정한 자연을 상실한 현대인, 디지털환경과 같은 가상현실에서 재현된 인공자연에서 오히려 자연을 실감하는 현대인의 변질된 자연관을 증언해준다. 

색면회화 이후, 오브제와 추상 사이. 박인성과 젠박의 평면작업은 한눈에도 색면회화와의 상호영향관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뿐인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얼핏 같으면서도 다르다. 박인성의 색면은 필름에서 왔고, 젠박의 색면은 레고에서 왔다. 각 필름을 그리고 레고를 클로즈업해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형식요소에서 추상미술의 당위성을 찾은 모더니즘패러다임과도 다르고, 순수 색면에서 타블로의 근거를 발견한 형식주의와도 다르다. 추상은 그렇게도 오지만, 다르게도 온다. 말하자면 일상을 다르게 보는 것에서도 추상은 유래할 수가 있다. 일상속 사물대상을 멀리서 보면 오브제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평면이 보이고 색면이 보이고 물성이 보인다. 그렇게 박인성과 젠박의 작업은 일상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만들고, 일상 속에 숨은 회화를 위한 계기를 발견하게 만든다. 

주체는 있다? 없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리어왕의 절규다. 예나 지금이나 정체성 혼란과 상실은 보편인간의 존재론적 문제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으로 문명이 발달하면서 그 절규는 더 절실해졌다. 말하자면 상실감은 현대인의 징후며 증상이다. 지극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증표가 되었다. 각 정재은, 남상헌, 박지혜, 그리고 심승욱이 이런 정체성 혼란 내지 상실의 문제를 주제화한다. 
정재은은 각 거울에 비친, 쇼윈도에 비친, 물에 비친 반영상을 그린다. 반영상은 자기를 되비쳐 돌려주는 상이다. 이를테면 거울을 보면 그 속에 내가 있다. 그건 다름 아닌 나라고 전제하고 봐서 그렇지, 사실은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그 속에 있다. 거울을 볼 때면 그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고, 그래서 흡사 나도 모르는 누군가와 대면하고 있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 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또 다른 종족이 살고 있다고도 했지만, 라캉은 그 반영상을 거울주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로부터 불완전한 주체며 분열자아라고 하는, 인간의 보편조건을 끌어낸다. 이처럼 정재은이 거울주체를 그리고 있다면, 남상헌은 기억주체를 그린다. 기억은 언제나 부분적이다. 그래서 불완전하다. 실루엣 형상으로 재현된 자기 속에서 사물대상(그러므로 특정된 기억)은 선명하지만, 꼭 그만큼 가장자리 부분은 흐릿해진다. 작가는 이처럼 실루엣에 갇혀서(자기에 사로잡혀서) 오히려 오롯한 형상을 얻는 것으로 부분적인 기억을, 부분에 특정된 기억을, 그러므로 불완전한 기억을 형상화한다. 
그리고 박지혜는 회화주체 혹은 창작주체를 그린다. 창작주체를 그린 자신의 그림을 <워크그라운드>라고 부르는데, 베틀그라운드와 같은 서바이벌게임에다 작업을 비유한 것이다. 비록 현란한 색채와 패턴 탓에 살벌한 분위기는 잘 감지되지가 않지만, 사실은 지금여기 척박한 창작환경을 살아내는 창작주체들이라면 공감할 만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심승욱은 <안정화된 불안 8개의 이야기>에서 사회적 주체, 참여적 주체, 그리고 어쩜 이보다는 존재론적 주체를 다룬다. 아마도 삶에 대한 그리고 현실에 대한 8개의 부조리한 이야기를 테마로 한 것일 터이다. 여기에 안정화된 불안이라는 주제가 눈에 밟힌다. 겉으론 안정적인데 속은 불안하다? 다만 겉으로 보기에 안정적인 것처럼 보일 뿐, 진실은 불안하다? 여기서 안정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은 이데올로기다. 불안한 진실을 감추기 위한 책략이다. 그래서 진실을 보기 위해선 이데올로기를 걷어내야 하고 계략을 꿰뚫어야만 한다. 그래서 현상학이고 낯설게 하기다. 작가의 작업은 이런 현상학적 에포케와, 그리고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와 관련이 깊다. 

욕망의 양가성과 이행하는 혹은 탈주하는 욕망. 권효민은 욕망의 양가성을 주제화한다. 억압된 욕망은 어둡지만, 정작 욕망 자체는 화려하다. 억압된 욕망과 자기실현을 꿈꾸는 욕망 사이에서 인간은 번민하고, 좌절된 욕망과 화려한 욕망 사이에서 존재는 분열된다. 그 번민, 그 분열, 그 모순, 그 부조리, 그 이율배반을 작가는 화려한 새 깃털로 장식된 먼지떨이들의 숲으로 형상화했다. 그리고 외관상 무의식의 즉각적인 기록 같은, 그리고 추상표현주의 같은 윤혜진의 그림이 이행하는 그리고 탈주하는 욕망을 테마로 하고 있다. 작가의 그림에서 욕망은 각 나무로 그리고 꽃으로 그리고 다른 오브제로 이행하는데, 억압된 욕망보다는 자기(그러므로 어쩜 파토스)를 발산하는데 성공한 욕망, 그러므로 자기를 실현한 욕망, 그래서 어쩜 건강한 욕망의 자기실현을 예시해주고 있다. 생명력의 무분별한 분출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바이털리즘(생명주의? 생태주의?)을 예시해주고 있다. 

그리고 각 이은우 작가가 정물(꽃과 도자기)의, 최민규 작가가 풍경(파도)의 전형성을 예시해주고 있다. 극사실적으로 재현된 정적이고 관조적인 그림이 감각적 쾌감을 자아내는 경우라고 생각한다. 이외에도 하나의 개념으로 범주화되지 않는 작가들이 있다. 권효정, 서웅주, 원선금, 하지원 작가가 그렇다. 
흔히 사람이 죽을 때 일생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고 한다. 권효정 작가는 바로 그 일생의 주마등, 기억의 주마등을 형상화했다(죽음? 아무튼). 그림자연극에서처럼 반투명한 막 뒤로 보이는 움직이는 사물들의 실루엣 형상으로 표현했다. 그러므로 일종의 그림자놀이로 명명할 만한 부분이 있다. 진즉에 <삶의 분수> 시리즈에서 촉발된, 각종 생활오브제를 쌓아 만든 조형물에서 어느 정도 예시된 형상이라고도 볼 수가 있겠다. 아마도 희미한 기억을, 불완전한 기억을, 손에 잡히지 않는 기억을, 그러므로 의심스런 기억을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기억도 그렇지만, 생활오브제를 서사를 위한 도구로 재구성한 것이란 점에서 표현의 확장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서웅주의 그림은 구겨진 종인지, 구겨진 사진인지, 구겨진 사진 그대로 그린 것인지, 오브젠지 아님 프린트된 이미진지 아님 그림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단순한 극사실의 경계를 넘어 재현 혹은 탈재현의 문제를 건드린다. 실재와 이미지 사이 문제에, 인식론적 차이 문제에 연동된다. 아마도 이미지와 오브제의 일치가 주효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단순한 극사실주의와의 차이를 가능하게 해주고, 그 이후를 예비하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투명 플라스틱 컵을 소재로 주렴처럼 스크린처럼 연출한 원선금의 설치작업은 인스턴트와 리사이클링을 주제화한 것이다. 리사이클링도 그렇지만, 특히 인스턴트가 갖는 의미가 예사롭지가 않다. 한번 쓰고 버리는 것이란 의미다. 한번 쓰고 버릴 버릇하다보면, 나도 언제가 그렇게 버려질 수도 있다. 꼭 잉여인간의 표상 같아서 씁쓸한 뒷맛이 남는 작업이고 오브제다. 그리고 하지원의 작업은 그 태생이 흥미롭다. 망했다 싶어 그림을 폐기했다. 그렇게 좌절해 있던 어느 순간 폐기된 그림들이 불현듯 자기만의 표정으로 다가왔고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조각그림들을 이어붙이고 짜 붙여서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그 재구성은 밑도 끝도 없었다. 정해진 포맷을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닌 만큼 그림의 완성을 가늠할 수도 없었다. 사실은 완성과는 상관없는 과정이었고, 처음부터 완성이란 개념이 무의미한 작업이었다. 그렇게 중심도 없고 가장자리도 없는, 밑도 끝도 없는, 아무데서나 시작되고 끝나면서 연이어지는,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을 임의적이고 부분적이고 이행중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눈에 띠게 현재진행형의 프로세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생생한 작업이, 마치 회생한 바로크를 보는 것 같은, 그래서 후기바로크회화로 부를 만한 작업이 가능해졌다. 미니멀리즘(최소주의) 이후 맥시멀리즘(최대주의)을 예고하는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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