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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재/ 길 위의 신, 신은 어디에나 있다

고충환

김연재/ 길 위의 신, 신은 어디에나 있다 


만다라 시리즈. 만다라는 우주를 도해한 그림이다. 우주에 대한 관념적 이해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원래 티베트 불교의 모래만다라에서 유래했다. 각종 색이 있는 모래를 이용해 정교하고 섬세한 만다라를 그린 연후에 흔적도 없이 지워버린다. 처음부터 모래로 그린 것인 만큼 애초에 그림으로 남길 생각이 없었고, 감각적 실재란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담았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이처럼 무용한 일을 왜 하는가. 이 무용한 일에는 무슨 유용한 의미라도 담겨있는 것인가. 바로 우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사실은 개별 존재 저마다 이미 우주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러므로 저마다의 내면에 잠재된 우주를 각성시켜준다. 그렇게 우주는 저마다의 내면에 관념적인 형상으로 자리한다. 그런 만큼 우주는 다만 추상적인 형상을 빌려 표상할 수 있을 뿐, 감각적 실재로 거머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작가는 만다라를 그린다. 크고 작은 원 형상 속에 이러저런 기하학적 형태를 담았다. 여기서 원 형상은 그 자체로 자족적이고 완전한 우주를 상징할 것이다. 그리고 기하학적 형태는 신성기하학이나 신성비례 같은 전통적인 미학적 개념들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는 것이지만, 원래 수학으로부터 왔고 신(정신)을 상징한다. 그 형태를 보면 중심성이 강하고 좌우대칭이 뚜렷한 편이다. 중심성이 강한 것은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우주를 강조한 것이고, 좌우대칭은 조화로 귀결되는 신의 섭리를 표상할 것이다. 이런 기하학적 형태가 있는가 하면, 꽃과 같은 유기적인 형태도 있다. 아마도 존재치고 우주 아닌 것이 없다는, 개별 존재로서의 우주를 강조한 것일 터이다. 그렇게 작가의 만다라 그림은 개별 존재 저마다의 내면에 잠재된 우주(어쩜 신)를 각성시키고, 개별 존재 자체가 이미 우주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풍경 시리즈. 풍경은 자연과 다르다. 자연은 주어진 지평 그대로이지만, 풍경은 주어진 지평에 주체가 매개된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각각 소산적 자연과 능산적 자연, 객관적 자연과 주관적 자연으로 구분해볼 수도 있겠다. 그렇게 풍경에서 주체는 자연에 매개된다. 자연에서 주체 쪽으로 건너오는 것이 있고, 주체에게서 자연으로 건너가는 것이 있다. 그렇게 건너가고 건너오는 것이 어떤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자연에 대한 관념(자연관)을 형성시켜준다. 그 상호작용을 교감이라 하고 감정이입이라고 부른다. 이를테면 우울한 풍경에서, 풍경의 대상이 되는 자연 자체는 그대로이지만, 이처럼 그대로인 자연을 우울한 풍경으로 경험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연을 대하는 주체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자연은 우울한 풍경으로, 쓸쓸한 풍경으로, 황량한 풍경으로, 아득한 풍경으로, 그리고 때로 따스한 풍경으로 주체에게 온다. 
작가는 풍경을 그린다. 이러저런 풍경이 있지만, <통영 봄 바다>와 <엘 카페 새벽길> 같은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작가는 통영이 고향이다. 통영 봄 바다를 그린 것은 이런 개인사와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고향을 떠올릴 때면 통영 봄 바다가 저절로 떠올랐을 것이다. 통영 봄 바다가 작가의 고향에 대한 관념을 형성시켜주고, 고향에 대한 정서로 응축되어졌을 것이다. 고향으로서의 통영은 봄 바다가 제격이고, 봄 바다가 아니면 안 되었을 것이다. 통영 봄 바다라는 사실적인 제목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통영 봄 바다를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통영 봄 바다로 환기되는 고향에 대한 감정을 그리고 정서를 그린 것일 터이다. 사실을 그린 것이 아니라 감정을 그리고 정서를 그린 것일 터이다. 그렇게 사실적인 제목이 무색할 정도로 반추상적인 그림이 비로소 설명될 수가 있을 것이다. 비록 고향은 아니지만, 엘 카페 새벽길을 그린 그림도 마찬가지. 
사실보다는 감정이, 정서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분위기가 강한 작가의 풍경 그림은 따스해 보이기도 하고(고향은 따스하다),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고향을 떠올리는 것에는 언제나 쓸쓸한 무언가가 있다). 그렇게 작가는 풍경 그림을 통해서 보는 그림(혹은 읽는 그림)으로서보다는, 느끼는 그림을 그려놓고 있었다. 어쩜 상실된 고향감정을 환기시키는, 아님 되불러오는 그림을 그려놓고 있었다. 

십자가의 길 시리즈. 흔히 삶은 저마다 한 권의 책을 쓰는 일과 같다고 했다. 스스로를 곰팡내 나는 책으로 가득한 서재며 도서관에 비유한 말라르메와 보르헤스에 빚진 비유일 것이다. 저마다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는 연극에다가 삶을 비유하기도 한다. 이미 주어진 역할에 방점이 찍힌다는 점에서 운명론 아님 예정설이 반영된 입장이다. 한나절 꿈에 삶을 비유한 경우도 있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장자몽이 그렇다. 심지어 인도에선 현실을 부정하는 입장도 있고, 티베트 불교에선 내세를 진정한 현실로 보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삶을 소풍에 빗댄 시적인 비유도 있다(천상병). 그렇게 삶은 책에, 연극에, 꿈에, 소풍에 비유된다. 이런 비유들이 있지만, 가장 강력한 삶의 비유로 치자면 길만한 것도 없다. 오죽하면 삶의 메타포로서의 길을 테마로 한 영화만을 묶어 로드무비(소설로 치자면 성장소설?)라고 부르는 장르영화가 따로 있을 정도다. 
여기서 작가는 십자가의 길을 간다. 자신의 삶을 십자가의 길에 비유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여기서 십자가는 예수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곧 예수의 길을 따라 걷는다는 것이고, 그런 만큼 작가의 십자가의 길 시리즈는 일종의 신앙고백에 해당한다. 그 길은 좁은 길이면서, 동시에 천국 가는 길이기도 하다. 순교자의 길이면서, 동시에 예수와 동행하는 길이기도 하다. 침묵처럼 어둔 적막 속을 저 홀로 걷는 길이면서, 동시에 은혜의 단비가 빛살처럼 나리는 길이기도 하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서 예수는 십자가로 상징되고, 또한 빛으로 표상된다. 주지하다시피 빛은 예로부터 신의 전형적인 표상으로 알려져 있다. 인간의 육신을 덧입은 신(인간예수?)이 출현하기 이전에 신은 원래 감각적 형상을 빌려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때 신을 표상하게 해준 매개가 바로 빛이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홀로그램처럼 나무를 태우지 않는 불이었고, 눈을 태우는(감각적 실재를 거세하는, 그러므로 상징적인 죽음을 통해 거듭나게 만드는) 빛이었고, 중세 이콘화에 등장하는 님부스(후광)였고, 예수의 몸인 교회를 빛으로 감싸는 스테인드글라스였다. 
그렇게 작가는 길처럼 나있는 십자가 위를 은총의 기운으로 감싸는 빛의 색감을 그렸고, 때로 단비처럼 내리는 빛살의 질감을 그렸다. 빛으로 현현한 신성을 그렸다. 신을 향한 자신의 신앙고백을 그렸고, 신으로 인한 자신의 황홀경을 그렸다. 

미술치료. 작가는 원래 미술치료를 전공했고, 현재 한국미술치료학회에 소속돼 있으면서 자신만의 연구소(김연재연구소 엘)를 두고 있기도 하다. 그런 만큼 그에게 창작행위는 곧 미술치료 요법의 한 경우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치유하면서 다른 사람(작가의 그림을 보는 사람)도 치유하는 것이다. 그런 치유의 관점에서 보면 작가의 그림들은 남다른 부분이 있다. 이를테면 만다라 그림은 명상의 계기에로 이끌고, 저마다의 내면에 잠자는 우주를 각성시켜주고, 그러므로 저마다 자신의 내면과 만나지게 한다. 그리고 풍경의 원천인 자연은 인간이 유래하고 회귀할 우주적 자궁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자연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에는 어떤 본능적인 부분이 있다. 그렇게 작가의 풍경 그림은 어쩜 상실한 자연감, 고향감을 일깨워주는 부분이 있다. 상실감이야말로 현대인의 전형적인 징후며 증상이란 점을 인정한다면, 작가의 풍경그림은 그래서 오히려 더 의미가 크다고도 할 수가 있겠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은 저마다의 내면에 잠재된 신성을 일깨워준다. 개인적으로 신을 믿든 안 믿든 신성은 이미 인성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예술 자체가 이미 치료요법의 한 경우에 해당한다.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아는 자신의 상처를 불러내고, 자신의 상처와 대면하고, 자신의 상처와 친해지고, 그러므로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조각을 한다고 했다. 예술에는 이런 자기 내면과 대면하게 만드는, 자기 상처를 보듬게 만드는, 그러므로 자기를 치유하게 만드는 위대한 힘이 있다. 존재를 위로해주는 계기가 더러 있지만, 예술만한 것도 없다. 예술 자체가 이미 위로다. 니체는 미학이 아닌 그 무엇으로도 이 삶은 설명될 수가 없다고 했다. 미학이, 예술이 곧 존재가 존재하는 이유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창작을 위한 계기에 연동시킨 미술치료는 어쩜 예술의 본질에 부합하는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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