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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전시콘퍼런스_대구미술관 <1919년 3월 1일 날씨 맑음>

고충환

독립기념관 전시콘퍼런스_대구미술관 <1919년 3월 1일 날씨 맑음> 


시간을 매개로 본 박물관과 미술관 

박물관은 시간의 집이다. 시간의 유적을 전시 보존 관리하는 집이다. 이번 전시에서 전시를 위한 키워드로 뽑은 기록, 기억, 기념은 그러므로 시간의 유적을 전시 보존 관리하게 해주는 개념적 장치들이란 점에서, 전시를 위한 기본 개념 틀을 설정하는데 일단 성공적으로 보인다. 아님, 적어도 개념 설정만 놓고 보자면 미술관적이기보다는 박물관적이다. 그렇담 시간은, 그리고 시간으로부터 파생된 기록, 기억, 기념의 개념(그 자체 시간의 물적 형상화 혹은 물화된 형식으로 볼 만한)은  박물관의 전유물인가. 그렇지는 않다. 미술관도 때로, 혹은 생각 이상으로 자주 시간을 호출하고, 기록과 기억과 기념의 개념을 소환한다. 
여기에는 단순히 박물관과 미술관의 고유기능과 영역 이상의 의미가 있다. 시간은, 기록은, 기억은, 기념은 인간 일반의 존재론적 조건이면서 배경이기도 하다. 어쩜 인간의 삶은 과거를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가 없다면 현재도 없을 것이므로. 과거가 현재를 만들어준 것일 것이므로. 그러므로 삶은 흡사 아들을 삼키는 아버지로 묘사된 시간의 신 크로노스(프란시스코 고야)처럼 과거에 또 다른 과거를 쌓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쩜 삶의 절반은 불안한 미래를 향하고, 나머지 반절은 과거를 회상하고 반추하는 일에 바쳐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존재론적 조건 혹은 배경 탓에 미술관은 생각 이상으로 자주 시간을 주제로 다룬다. 그렇게 시간은 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인간의 보편 관심사라는, 관심사(그러므로 주제의식)의 세 층위에 물려있다. 그렇게 물려있으면서 상호유기적인 관계를 내재화한다.   

시간을 매개하는 최근 아트신

최근에 아트신에서 보면 이런 시간의 교집합 혹은 상호교환현상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은 것 같다(아직 국내에는 그렇게 빈번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박물관에 미술관 콘텐츠가, 미술관에 박물관 콘텐츠가 매개 전시되는 것이다. 오래된 성당이나 궁에 현대미술이 전시되고(제프 쿤스), 폐 공장에서 비엔날레가 열리는 것(부산 비엔날레), 그리고 문 닫은 폐수처리장에 현대미술이 들어가는 것(도시재생사업)은 이제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최근 사례로는 유물과 설치미술이 결합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영월 창령사 터 오백나한> 전시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단순한 탈경계와 경계 넘나들기, 퓨전과 융합 이상의 의미가 있다. 시간의 상호교환현상이 일어나고 있고, 이로써 시간에 대한 개념이며 인식을 바꿔놓는(재설정하는) 무언가가 있다. 여기에 지붕 없는 미술관이란 공공연한 개념이 있지만, 생각해보면 박물관이라고 해서 그 경우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을 매개하고, 나아가 공간매개마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현대미술은 그리고 전시공학은 변신하고 있는데, 그 매개역할을 하는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가 시간 개념이다. 

대구미술관 전시가 시간을 매개하는, 
그러므로 역사적 현실을 해석하는 방법과 제안  

미술관에서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이번 전시 역시 그 주목할 만한 사례가 되고 있다. 주목할 만한 사례라고 했다. 박물관에서 같은 테마전시가 열렸더라면 굳이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렇담 박물관 콘텐츠가 담겼는가. 그렇지는 않다. 개념만 담았다. 사전에 주어진 전시 틀(그러므로 개념 틀)이 아니라면, 굳이 3.1운동 100주년 기념 전시로 볼 만한 여지가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전시였다. 그렇다면 실패한 전신가. 그렇지는 않다. 
전시는 의미를 해석하고, 생산하고, 제안하는 행위다. 그렇담 하나의 의미는 어떻게 생산되는가. 텍스트와 콘텍스트와의 상호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생산된다. 미술관으로 치자면 개별 작품, 박물관의 입장에선 유물이 어떤 맥락 속에 담겨지는지, 하는 여하에 따라서 의미는 비로소 생산되고 결정된다. 그러므로 어쩜 하나의 개별 작품 아니면 하나의 유물 그 자체로는 하나의 의미를 담보하고 있는 아님 실현하고 있는 의미체라기보다는 의미의 잠재태(아님 가능태)에 머문다. 미처 의미화 되기 이전의 잠재적인 어떤 상태가 어떤 맥락 속에 담겨짐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의미를 덧입은 의미체로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텍스트의 의미는 콘텍스트에 연동된다. 그러므로 콘텍스트가 달라지면 덩달아 텍스트의 의미 또한 달라진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이라는 콘텍스트가 개별 서사들을, 이를테면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경계를, 디아스포라를,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를, 선데이 페인팅을, 제주 4.3을, 조선의 낙조를, 빛바랜 사진 속 익명적 주체들을, 좌절된 청춘과 광장을 서성이는 거리의 사람들을, 환상과 그로테스크가 몸을 섞는 의심스런 비무장지대를, 그리고 서울과 평양과의 정치적 현실을 상호유기적인 관계 속에 재배치하고 있는 것이다(여기서 예술은 배열과 배치의 기술이 된다). 그렇게 재배치되면서 아마도 개별 작품인 채로는 그럴 일이 없었을, 기념비적인 의미의 옷을 덧입고 다시 태어나는(재정의 되는) 것이다. 
그렇게 전시는 그 날의 기운(전시를 만든 주체는 그 기운을 맑은 기운으로 그러므로 바이털리즘으로 해석한다)이 파생시킨 현실이면서, 동시에 오늘의 현실을, 그러므로 과거가 밀어올린 현실을 예시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해석이란 어쩜 기념비적인 의미부여를 수행하는 일이기도 한 것임을 새삼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시란 전에 없던, 하나의 의미를 생산하고 제안하는 의미론적 장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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