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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철/ 유혹적으로 가벼운, 치명적으로 가벼운

고충환

신한철/ 유혹적으로 가벼운, 치명적으로 가벼운 


장르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다른 장르와의 차별을 꾀하는 태도가 모더니즘이라고 한다면, 장르 간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장르 간 변별성이 약화되거나 보다 적극적으론 무의미해지는 경우는 탈모더니즘일 수 있다. 조각의 경우에는 소위 탈조각 혹은 비조각이 여기에 해당한다. 여기서 탈모더니즘이 모더니즘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파생된 것인 만큼, 탈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의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탈조각 혹은 비조각 개념 역시 전통적인 조각과의 긴장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것인 만큼, 그 자체 조각에 대한 부정으로서보다는 조각의 확장과 심화와 변주를 실천하는 경우로 보아야 한다. 겉보기에 조각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론 조각의 자기실현을 돕는 것이다. 마치 자기에 대한 공공연한 부정마저 자기 본성의 한 부분으로 보는 이성의 간계(헤겔)에서처럼. 

그렇게 신한철의 조각은 적어도 외관상 전통적인 조각의 장르적 특수성에 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조각의 장르적 특수성을 다르게는 조각의 본질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결정적으론 매스를 결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눗방울 혹은 거품처럼 보이는 작가의 조각에서 매스를 감지하기란 쉽지가 않다. 더욱이 조형물은 비눗방울이나 거품처럼 공중에 부유하고 있거나(실제로는 공중에 매달려 있는), 실에 매달린 풍선 마냥 가녀린 봉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녀린 봉이 매스를 지탱할까 싶은데도 전혀 위태롭거나 불안정하지가 않다. 그 자체 조형물이 실제로 매스를 결여하고 있다는, 최소한 그렇게 보이도록 조형(조작?) 했다는 증거로 봐도 되겠다. 
그리고 그렇게 실제로도 매스를 결여하고 있는 것이지만, 실제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으니(적어도 외관상 보기에 그렇다), 이때의 결여는 실제 여부보다는 느낌에 가깝다. 무슨 말인가. 작가의 작업이 실재에 천착하기보다는 감각적으로 어필된다는 말이다. 전작에서 실재에 진력했던 적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나(아마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근작에서 또 다른 형태와 경우로서 실재를 숨겨놓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나, 적어도 근작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는 실재보다는 감각(감각적 현상에 대한 반응과 어필)에 가깝다. 이로써 크게는 조형에 대한 관심 축이 실재로부터 감각 쪽으로 옮아온 것으로 봐도 무방하겠다. 그렇다고 작가의 작업이 실재에 대한 관심이며 주제의식과는 무관하다고 볼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건 다른 층위에 속하는 문제다. 여하튼. 
비눗방울이나 거품처럼 보인다? 실에 매달린 풍선처럼 보인다? 공중에 부유하는 것 같다? 매스를 결여하고 있다? 이건 다 무슨 말인가. 가볍다는 말이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는 말이다. 공중에 가볍게 떠다니는 것들은 중력을 거스른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은 매스와 함께 조각의 또 다른 본질에 해당할 중력을 배반한다. 그래서 탈중력적이다. 전통적으로 조각이 안정감 있게 보이는 것은 중력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의 조각은 중력을 거스른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그래서 역동적으로 보이고 활성적으로 보인다. 
전통적인 조각에서 활성(운동성)은 잠재적인 형태로 묶여 있었다. 작가의 조각에서 그렇듯 잠재된 활성이 중력으로부터 놓여나 마침내 자기를 실현하고 있다고 봐도 되겠다. 그럼에도 여하튼 조각인 탓에 실제로 움직이지는 않지만, 적어도 시지각적으로 그렇게 보인다. 가볍게 보이고, 부유하는 것처럼 보이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 항상적인 이행을 예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항상적인 이행을 예비하고 있다? 시간은 존재를 구속한다.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는 없다. 바로 항상적인 변화야말로 존재를 구속하는 절대조건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모든 존재는 항상적인 변화와 이행의 도중에 있다. 활성이 감지되는 작가의 조각은 아마도 그 이면에서 이런 존재의 원리를 숨겨놓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활성을 더하는 조건으로서 색채감정을 빼놓을 수 없다. 작가의 작업에서 색채감정은 결정적이다. 지금은 조각에 색칠을 하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지만, 작가가 자신의 조형에 처음으로 우레탄 도색을 적용할 당시(2000년 금호미술관 개인전)만 해도 선구적인 경우에 속한다. 색채조각 자체도 전통적인 조각의 범주와 영역을 확장시키는 탈조각의 한 경우에 해당하지만, 여기에 현대성마저 담보해준다. 적어도 감각적으로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색채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 감각적이고 현대적이다. 
그리고 작가는 색채감정과 관련해 다시금 변화를 시도한다. 이번에는 소위 캔디컬러를 적용한 것이다. 제프 쿤스를 특징하기도 하는 캔디컬러는 팝적이다. 가볍다. 표면적이다. 본질을 결여하고 있는 세대감정에, 모든 일이 표면 안에서 일어나는 세대감정에, 심지어 표면 자체가 또 다른 본질의 한 경우로서 본질을 대체하는 세대감정에 부합하는 면이 있다. 가벼운, 표면적인, 감각적인 시대감정에 부응하는 면이 있다. 그렇게 캔디컬러가 적용된 작가의 조형작업에서 가벼움은 더 강조되고, 활성은 더 두드러져 보인다. 이에 비해 보면 종전의 우레탄 도색조각은 상대적으로 더 안정감 있게 보이고, 심지어 정적으로 보이기조차 한다. 시지각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만, 각각 우레탄도색조각은 불투명성에, 캔디컬러조각은 투명성에 가깝기 때문이다. 투명성? 투명성은 표면을 강조하고, 가벼움과 활성을 돕는 또 다른 미학적 장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캔디컬러 자체가 투명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시각적으로 보기에 투명해 보인다. 그렇게 캔디컬러를 적용한 작가의 조형작업은 표면에서 영롱한 빛을 발하는(밤하늘을 수놓는 성단 같은, 아님 성좌 같은) 색유리구슬처럼 보이고,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 구슬 표면의 알루미늄호일 재질처럼 보이고, 주술사의 수정공처럼 보인다. 그렇게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 같은, 주술이라도 거는 것 같은 몽롱한 환영 속에, 감각적 유희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구조적으로 작가의 조각은 크고 작은 구들의 집적(아상블라주)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구조며 구들은 다 뭔가. 세포다. 핵이다. 배아다. 생명의, 존재의, 우주의 최소단위원소다. 존재가 유래한, 존재가 들고나는 자궁이다. 생성과 소멸을 무한 반복하는, 그리고 그렇게 항상적으로 이행하는 존재의 활성이다. 자가 분열하고 자가생성하는, 그리고 그렇게 자기 속에 차이를 잉태하면서 무한 반복되는 리좀이다(질 들뢰즈). 앞서 작가의 작업은 크게 실재로부터 감각 쪽으로 이행한다고 했고, 그럼에도 실재와 무관하지는 않다고도 했다. 작가의 작업에서 감각적 현상에 대한 반응과 어필은 색채감정으로부터 나오고, 실재에 대한 관심이며 주제의식은 이렇듯 구조에 기인한다.  
한편으로 구조와 함께 감각적 성질에도 연유하는 것으로서 반영성이 있다. 일종의 거울효과로 보면 되겠다. 다시 말하지만 작가의 작업은 크고 작은 구들의 집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구들마다 똑같은 외부환경(세계)을 자기 속에(엄밀하게는 표면에) 반영한다. 그렇게 현실은 거울 속에서(혹은 표면 위에서) 무한 반복된다. 반영하는 현실과 반영된 현실과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진정한 현실, 참현실이 무엇인지 묻게 만든다. 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 했고, 장 보들리야르는 가상현실이 현실을 대체한다고 했고, 장자는 자신이 본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다고 했고, 불교에서는 감각적 현실(현상)은 실재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렇게 우린 어쩜 가시와 비가시가 공존하는, 관념 위에 감각이 포개지는, 실재와 환영이 그 경계를 허무는 다중적이고 다층적인 세계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 세계의 층위들 중 진정한 세계, 참세계를 가려내야 하는 필생의 과제를 떠안고 사는지도 모른다. 
불교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작가의 작업은 존재와 존재가 서로 무한 반영하는 관계의 망이며 인연의 망을 뜻하는 인드라망(거울그물)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렇게 반영성이 더해지면서 작가의 조각은 감각적인, 환영적인, 그리고 존재론적인 층위에나 속할 어떤 부분을 건드린다. 여기에 작가의 조각은 비눗방울 같고 거품 같다고 했다. 이로써 작가의 조각은 소위 거품 현상에 대한, 무분별한 욕망에 대한, 그 치명적인 유혹에 대한 사회적인 그리고 존재론적인 불안의식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겠다. 욕망과 죽음과 아름다움은 운명적으로 엮인, 같은 부류들이다(할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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