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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주/ 얼룩 그러므로 어쩜 무정형, 아무 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기도 한

고충환

윤종주/ 얼룩 그러므로 어쩜 무정형, 아무 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기도 한 


윤종주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형상을 좇는다고 했다. 수사적 표현으로 보고 지나칠 수도 있겠으나, 작가의 경우에는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한 것보다는 애매한 것, 경계가 설정된 것보다는 경계 위 혹은 바깥에 있는 것에 경도돼 있고, 그로부터 작가의 회화에 고유한 아우라를 얻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작가의 감각 촉수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형상에 맞춰져 있다. 잡히는 형상과 잡히지 않는 형상 사이에 맞춰져 있다. 그렇담 여기서 잡히는 형상은 뭐고, 잡히지 않는 형상은 또 뭔가. 여기서 형상을 의미의 몸 그러므로 의미체로 본다면, 형상을 의미로 대체해도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작가의 작업은 잡히는 의미와 잡히지 않는 의미 사이에 있다. 그렇담 다시, 잡히는 형상 그리고 의미란 뭔가. 알만한 형상, 빤한 의미, 체제순응적인 상투어(doxa), 스테레오타입과 자기동일성의 논리, 그리고 안 봐도 비디오인 클리세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잡히지 않는 형상 그리고 의미란 동시에 잡을 수 없는 형상이며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게 뭔가. 공이고, 허고, 무다. 표현 혹은 재현 불가능성이며, 인식론으로 치자면 불가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잡히는 것에서 잡히지 않는 것 쪽으로 움직이고 있고, 잡히는 것의 부정을 통해 잡히지 않는 것을 긍정하는 기획, 그러므로 어쩜 불가능한 기획(잡히지 않는 것,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는 기획)을 수행하고 있다고도 할 수가 있겠다. 예술의 특수성이 여기에 있고, 예술의 돌파구가 여기에 있다. 비록 인식론으론 불가능한 기획이지만, 감각을 도구로 하는 예술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게 뭔가. 암시의 기술이다. 인식할 수 없지만, 암시할 수는 있다. 인식할 수 없는 것, 인식 바깥에 있는 것을 암시할 수는 있는 일이다. 
그렇게 폴 클레는 예술이란 가시적인 것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기술이라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가시적인 것을 유령이라고 불렀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무정형을 통해 정형을 타파하려 했고, 모리스 블랑쇼는 의미의 바깥에 의미를 세우려 했다. 바로 비가시적인 것, 유령, 무정형, 그리고 의미의 바깥에서 예술의 존재의미를 본 것이다. 빤한 의미에서 빤하지 않은 의미를 구제하고 복원하는 일에서 예술의 실천논리를 본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빤한 의미는 없다고(다만 그렇게 보일 뿐) 선언하는 것이다. 그렇게 애매한 것, 경계 위 혹은 바깥에 있는 것에 경도된 작가의 작업은 이런 예술의 존재의미며 실천논리에 맞닿아있다. 

그렇담 작가의 경우에 애매한 것, 경계 위 혹은 바깥에 있는 것은 뭔가. 흔적이고 얼룩이다. 처음엔 흔적이었고, 이후 점차 얼룩이었다. 그렇게 처음과 이후로 구분되면서, 흔적과 얼룩은 상호내포적인 관계에 놓인다. 흔적에서 얼룩으로, 산포된 흔적에서 응축된 얼룩으로 이행해 왔다고도 볼 수가 있겠다. 한편으로 이런 흔적과 얼룩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작업의 밑바탕에는 모더니즘 패러다임 즉 모더니즘적 형식논리가 깔려있다. 그림의 원인은 내용보다는 형식에 있다는 태도고 입장이다. 형식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그림인 것이며, 내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형식 자체가 이미 내용이라는 논리다. 그렇게 내용에 해당하는 성질, 이를테면 재현적이고 서사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있음에도 재현은 그리고 서사는 어김없이 되돌아온다. 인식은 한갓 흔적이며 얼룩에서조차 의미를 발견하고, 무엇보다도 무의미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걸 인식의 관성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한편으로 의미를 배제하는 형식논리에 의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여하한 경우에도 의미의 구실을 찾는 인식의 관성에 의해 견인된다. 그로부터 극적 긴장감(정중동이라고 불러도 좋을)이 파생되는 것이며, 그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 흔적이고 얼룩이다. 
그렇담 작가는 어떤 흔적을 어떻게 조성하는가. 경우에 차이가 있지만, 대개는 먼저 패널 위에 건축자재용 테라코타를 펴 바른다. 그러면 마감된 벽면처럼 터실터실한 미세요철이 생긴다. 그리고 그 위에 물감을 엷게 덧칠하면, 흘러내린 물감이 요철 사이사이로 스며들면서 비정형의 흔적을 만든다. 그렇게 작가 고유의 질감과 색감을 얻는 것이다. 처음부터 재현적인 성질을 의식한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벽면과 같은 그리고 때로 풍경과 같은 재현적인 요소를 떠올리게 만든다. 흔적(그 중엔 상흔도 있을)을 머금고 있는 모든 벽면은 잠재적인 타블로고, 축도된 풍경이며, 내면이 투사된 스크린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가상의 벽면(흔적 그리고 아마도 상흔이 만든 풍경) 앞에, 막막한 풍경(시간이 만든 풍경?) 앞에, 내면풍경(심리풍경) 앞에 서게 만든다. 화면 도처에 산포된, 드러난 그리고 암시적인 흔적들이 작가의 감각(몸에 속하는)을, 기억(의식적이라기보다는 몸 기억)을, 그리고 회화적 관성을 증언해주고 있는 것이다. 회화적 관성? 회화는 특히 관성과 관련이 깊다. 관성이야말로 회화의 장르적 특수성이라고 해도 좋다. 회화는 말하자면 관성을 깨면서 관성을 쌓는 과정인 것이며, 낯 설은 걸 길들이는 과정이다.  
그렇게 화면 도처에 산포해 있던 흔적들, 화면 자체와 일체를 이루던 흔적들이 이후 점차 응축되면서 하나의 유기적인 덩어리를 형성시킨다. 작가의 작업이 흔적에서 얼룩으로 넘어온 것이다. 얼룩이 흔적과 다른 점은 얼룩이 자족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화면은 더 이상 모티브를 자신과의 유기적인 일부로서 포함해 들이는 계기역할을 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적어도 외관상 화면은 배경과 모티브로 분리된다.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지만, 모티브를 따로 화면에다가 콜라주한 경우로 봐도 무방해 보인다. 그렇게 허공을 부유하는 얼룩과 얼룩이 하나의 화면 속에 마주하면서 전에 없던 관계의 개념이 강조된다. 여기서 작가의 그림을 형식논리와 함께 관계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 관점에서 보면 전작이 자기 자신과의 대화 곧 내면독백에 해당하고, 근작에서 비로소 타자와의 관계로 부를만한 계기가 전면화하고 있는 경우로도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마주하던 얼룩과 얼룩이 이후 점차 하나로 겹친다. 타자와의 보다 진전된(?) 관계를 예시해주고 있고, 자신의 또 다른 자아와 마침내 화해한 관계를 예시해주고 있다. 
그리고 다시, 배경화면과 모티브가 혼연일체를 이루고, 얼룩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막을 형성시키는 경향성의 회화로 이행하는데, 그 매개역할을 하는 것이 기하학적 포맷이다. 전작에서부터 진즉에 적용된 것이지만, 그러데이션 기법이 근작에 와서 보다 적극적인 형식효과를 얻는다. 화면이 점점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페이드아웃과 페이드인이 교차되는, 점층적인 띠 그림이 하나의 화면 속에 중첩된다. 마치 경계에 또 다른 경계가 포개진 것 같은, 하나의 지평선에 또 다른 지평선이 오버랩된 것 같은, 첩첩한 허공 아님 심연을 마주한 것 같은, 물질과 현상의 경계가 모호한 빛의 질료를 대면하고 있는 것 같은 아득하고 막막한, 마치 허공에 던져진 느낌을 준다. 이로써 작가는 혹 있음과 없음과의 경계 너머를 바로보고 있는 것인가. 잡히는 것과 잡히지 않는 것과의 경계 너머를 마주하고 있는 것인가. 사실 있음과 없음과의 모호한 경계, 잡히는 것과 잡히지 않는 것과의 애매한 경계, 그리고 빛과 색의 손에 잡히지 않는 경계로 치자면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실은 작가의 그림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아님 어떤 관념?)로 봐도 되겠다. 
그렇게 작가는 애매한 것, 경계 위 혹은 바깥에 있는 것을 넘어 마침내 공, 허, 무와 같은 표현 불가능하고 재현 불가능한 것, 인식론으로 치자면 불가지를 붙잡으려는가. 아님 이미 붙잡았는가. 어쩜 이미 붙잡음 아님 오히려 붙잡힘(사로잡힘) 속에 들어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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