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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만/ 현실을 참조하는, 현실을 변태하는 이미지

고충환

장순만/ 현실을 참조하는, 현실을 변태하는 이미지 


장순만은 1990년부터 컴퓨터로 판화작업을 하기 시작했다(그전에는 석판화작업에 주력했다). 지금까지 근 30년 세월을 컴퓨터 판화작업에 매진해온 셈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한 분야에 투신해온 셈이다. 이처럼 작가가 컴퓨터 판화작업을 시작한 것이 30년 전 일임을 생각하면 선구적인 면이 없지 않다. 당시 시대정황을 보면 국내에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이 도입된 것이 1980년대 중반의 일이고, 연이어 종 다양성 문제가 표면화한 것이 1990년대 들어서의 일이다. 세부적으론 탈 경계와 탈장르 그리고 탈 형식을 아우르는 탈의 논리가, 혼성과 융합(지금으로 치자면 융복합) 그리고 학제 간 연구 같은 경계담론이 전면화한 것도 그즈음의 일이다. 이후 판화에서는 컴퓨터프린트가 그리고 사진에서는 디지털프린트가 논의의 대상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사진에서의 디지털프린트는 현재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반면, 판화에서의 컴퓨터프린트와 관련한 논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보인다. 컴퓨터로 레이저 커팅한 목판화와 동판화가 확장된 판화개념으로 인정받고 있는 정도라고 할까. 그 수용 폭이 이전에 비해 더 확장되고 유연해졌다고는 하나, 아직 컴퓨터 프로세스를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응용하는 단계(이를테면 혼합기법)에 머물러 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그 이면에서는 제도의 관성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제도의 관성에는 고집스런 면이 있는데, 그 관성을 깨는 계기가 창발성 개념이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계기, 예기치 못한 계기가 매개되면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오는 것이다. 보기에 따라선 판화에서의 컴퓨터프린트를, 작가의 경우에는 컴퓨터그래피를 이런 창발성의 계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작가는 컴퓨터로 제작한 자신의 판화를 명명하기 위해 컴퓨토그래피라는 조어를 직접 만들기도 했는데, 그 의미를 부분 적용이 아닌 전체과정을 컴퓨터가 도맡는 경우로 이해한다면 컴퓨터그래피로,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개념으로는 컴퓨터프린트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용어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컴퓨터그래피라는 말보다는 컴퓨터그래픽이라는 정착된 용어가 있고, 이로부터 유래한 시지라는 줄임말은 현재 영화와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통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게 적어도 용어에 근거해 본 작가의 작업은 컴퓨터그래픽과 컴퓨터 프린트, 장르로 치자면 판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여기에 어쩜 사진을 하나로 아우르는, 그 경계를 넘나들면서 하나로 싸안는 혼성적이고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작업의 경우로도 볼 수가 있겠다. 이 모두가 인간의 용량을 초과하는,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컴퓨터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컴퓨터는 기억장치고 정보처리기계다(어쩜 기능으로만 치자면 인간이 꼭 그렇다). 머리를 대신해 수식을 계산해주고, 손을 대신해 입력된 이미지 값 그대로 형상을 구현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구현된 컴퓨터그래픽을 보면 예외가 없지 않겠지만 대개는 중성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기계적이고 무미건조한 인상을 주는데, 그래서인지 아직 감정을 대신하는, 살과 피가 흐르는 실감을 대체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형식으로 치자면 기하학으로 축조된 질서의식에 부합하는 면이 있고, 인성으로 보자면 감성보다는 이성에 걸 맞는 부분이 있다. 살과 피가 흐르는 생명력, 무분별한 기의 흐름, 바이털리즘, 파토스의 분출과 카오스의 역동성과 같은 감성영역은 아직 미개척지로 남아있는 것이 현실이다. 아마도 그 마저도 머지않아 정복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종래에는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서의 머리와 손에 이어 감정과 감성마저도 컴퓨터가 대신하기에 이를 것이다. 사실 기계가 머리를 손을 그리고 감정을 대신하는 것으로 치자면 이미 캐나다의 매체비평가 마샬 맥루한이 언급한 적이 있다(특히 소통의 질 그러므로 감정전달과 관련한 차가운 미디어와 따뜻한 미디어의 구분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보기에 기계란 인간의 기능이 연장된 것이고 능력이 확장된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그렇게 연장된 기능이며 확장된 능력을 자신만의 툴로 맞아들이는 것이고, 덩달아 판화의 표현영역 역시 확장되어야한다고 보는 것이고, 따라서 판화의 장르적 특수성이며 개념도 여기에 맞춰 재정의되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컴퓨터로 제작한 작가의 판화작업은 선구적인 면이 있고, 이로써 판화의 개념을 재정의하도록 촉발하는 계기가 있다. 

그렇게 작가는 사과, 코카콜라병, 우유팩, 치약, 그리고 바코드와 건축물 등 일상적인 기물들과 부호를 소재로 작업한다. 특정 소재를 예로 든 것이지만, 사실상 무한정한 컴퓨터의 기능이며 용량을 생각하면 모든 소재가 가능하고, 결국 작가가 취사선택한 소재 자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일상적인 소재들인 만큼 사람들에게 쉽게 인지되고, 또한 친근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재들이란 점이 굳이 이유라면 이유일 수 있겠다. 여기에 사과는 미술사에 혁명을 불러일으킨 세잔의 사과에 감명 받은 것이 그 계기가 되었고(그러므로 작가 역시 사과를 매개로 또 다른 혁명의 계기가 되고 싶다), 바코드는 문명의 아이콘이란 점 정도를 덧붙일 수는 있겠다. 
그렇게 컴퓨터가 재현(?)한 이미지들이 친근하고 낯설다. 다들 알만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친근하고, 그럼에도 컴퓨터 고유의 언어로 재해석된(혹은 재구성된) 이미지가 낯설다. 컴퓨터 고유의 언어? 그건 알고 보면 사실 순전한 수식이고 산술이다. 앞서 컴퓨터는 그 언어체계(그러므로 코드)가 감성보다는 이성에 걸맞다고 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특히 고대 그리스에서) 수학(그러므로 수식과 산술)은 이성의 언어체계로 알려져 왔고, 그 언어체계의 집(건축물)이 기하학이다. 결국 컴퓨터의 언어체계는 수학과 기하학, 그리고 두 개의 코스모스에 해당할 우주와 질서를 아우르는 이성이 자기를 실현한 도구의 한 경우로도 볼 수가 있겠다. 이로써 최소한 작가는 컴퓨터를 매개로 자기 내면에 자기만의 질서의식으로 축조된 성소를 짓고 싶다는 욕망을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보다 적극적으론 세상을 질서의식으로 축조된 성소 그러므로 기하학의 집으로 대체하고 싶다는 유토피아(니체의 아폴론적 충동에도 부합하는)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여기서 문제는 이처럼 컴퓨터의 고유 언어로 재해석된 이미지를 재현적인 이미지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며, 그러므로 컴퓨터(그리고 컴퓨터 이미지)와 현실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컴퓨터는 현실을 재현하지 않는다. 컴퓨터이미지가 보여주는 감각적 현실과의 닮은꼴, 영락없음, 핍진성에도 불구하고 그건 현실 그대로의 이미지, 현실을 재현한 이미지가 아니다. 외형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현실과의 닮은꼴은 다만 우연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불교는 현상을 믿지 말라고 했다. 현상은 다만 마음이 불러일으킨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말은 곧 컴퓨터가 공중에 던져진 홀로그램(아날로그 버전으로 치자면 모래 위에 지은 성)이 그런 것처럼 감각적인 이미지로 사람들을 유혹하지만, 사실은 그 이미지(그러므로 현상)에 현혹되지 말라는 불교의 전언을 뒤집어 놓은, 그러므로 부처의 역설을 담지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사실상 컴퓨터는 세상의 모든 이미지,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와 미처 존재하지도 않는 이미지를 다 창출할 수 있다. 가히 유혹하는 기계며 도구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유혹하는 기계 속에 부처가 들어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할까. 
그렇담 뭔가. 현실을 재현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컴퓨터는 뭔가? 컴퓨터는 현실을 재현하지 않고 현실을 참조한다. 현실 속 이러저러한 것들을 그저 가져다 쓸 뿐이다. 다시 말해 감각적 현실은 다만 컴퓨터로 하여금 자신의 이미지를 시작할 수 있도록 열어주는 계기에 머문다. 일단 그 계기의 관문을 통과하고 나면, 그래서 어떠한 형태로든 현실이 컴퓨터에 붙잡히고 나면 컴퓨터 자체의 자족적인 언어체계에 의해 최초 입력된 현실은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그 꼴을 바꾸고 내용을 바꾸고 의미를 바꾼다. 변태다. 마치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 뱀이 허물을 벗듯 감각적 현실을 자유자재하게 변태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컴퓨터는 감각적 현실을 변태시키는 기계며 도구다. 적어도 논리로만 보자면 어떤 이미지 값을 어떻게 부여하는가에 따라서, 어떤 툴을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그 변태 가능성은 무한정이다. 
여기서 작가는 오행과 오방, 주역과 역학과 같은 전통적인 사상체계와 도상체계를 이미지 값으로 부여하고 적용한다. 알다시피 그 사상체계는 동시에 도상체계 그러므로 상징체계이기도 하다. 상징색이 있고 상징하는 수가 있다는 말이며, 그런 만큼 특정 색깔이 그리고 특정한 수가 어떤 의미를 특정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게 작가는 전통적으로 동양이 머릿속에 그려온 세계상 그러므로 유토피아를, 그리고 어쩜 자신의 사상체계 그러므로 내적질서의식으로 축조된 성소를 자신의 컴퓨터프린트(그리고 컴퓨터그래피) 속에 투사하고 투자했다. 현란한 이미지에 가려 잘 안보이지만, 잘 보면 보인다. 감각적 이미지에 유혹 당하지 않는다면, 그 속뜻을 읽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컴퓨터프린트를 매개로 현실과 현실의 재현에 근거한, 그래서 여하한 경우에도 현실에서 시작하는 관계설정에서부터, 가상현실과 현실의 무한정 변태에 바탕을 둔, 그래서 처음부터 가상현실을 전제로 시작되는 관계설정에로 이행해온, 그동안 달라진 이미지의 존재방식을 예시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어쩜 작가의 작업이 판환지 아니면 판화와는 다른 종잔지는 기실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작가의 작업이 열어놓는 세계관, 그 남다른 비전이 갖는 작가적 아이덴티티가 정작 결정적인 문제일 수 있고, 작가의 작업은 그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으로 이미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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