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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속의 마법/ 독해를 위한 도구들, 매직, 메타포, 그리고 어쩜 알레고리

고충환

당신 속의 마법/ 독해를 위한 도구들, 매직, 메타포, 그리고 어쩜 알레고리 


화환은 정중하게 사양합니다. 전시초대엽서에 곧잘 기록된 문구다. 한때 밀려드는 화환에 골머리를 앓았던 시절이 있었다. 전시가 끝나면 전시 기간 내내 자리를 지키던 화분만 따로 챙겨가고, 화환은 꽃가게에서 도로 실어가던 시절이 실제로도 있었다. 들리는 얘기로는 그렇게 실어간 화환이 재활용된다고 했다. 제도에 기생하는 경제학의 사례로 봐도 되겠다. 화환은 자리만 지키는 게 아니었다. 줄지어 늘어선 화환은 그 줄 만큼이나 긴 예술가의 정치력과 영향력을 전시(과시?)하고 있었다. 제도에 기생하는 정치학의 경우로 봐도 되겠다. 
류현민은 그렇게 한물간 제도적 관습을 소환했다. 그리고 <전시의 정원>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화환에 목도리처럼 걸쳐있는 리본에 붓글씨로 쓴 문구가 흥미롭다. 교회 봉사 좀 하고, 엄마가. 이해는 안 되지만 이해하려고 노력 중인 친구 은성.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비빔밥도 물 말아 먹을 수 있는 용기, 화가 이명미(비빔밥을 물 말아 먹는 것이 용긴지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여하튼). 여기까지는 약간의 애교와 위트가 섞인, 화가에 대한 격려의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문제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라는 문구다. 조화다. 누가 죽었나? 예술의 죽음? 예술의 종말? 죽은 예술에 대한 애도? 예술을 살해한 제도에 대한 지목과 고발? 여기에 싸구려 향수가 거든다. 시체 썩는 냄새를 방지하기 위해 뿌린 방향제? 그런데, 무슨 시체? 그렇게 작가는 예술 제도와 관습을 비틀어 재맥락화한다. 자기가 자기를 대상화하고 주제화한 예술을, 창작 자체가 이미 비평적 기능을 수행하는 실천 논리를 예시해준다. 

그렇게 초대를 받아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족상이 관객을 맞는다. 이완의 조각 설치작품 <For a Better Tomorrow>다.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하여, 라는 희망찬 의미의 문구 그대로 화기애애한 가족애를 담았다. 품에 아이를 안고 있는 아빠와 손가락으로 저기 앞쪽을 가리키는 엄마, 그리고 아마도 저기 앞쪽에 있을 보다 나은 내일을 향해 치켜든 얼굴 각도가 유형화와 전형성을 떠올리게 만든다. 유형화와 전형성? 이데올로기다. 가족 이데올로기다. 가족상은 이데올로기답게 좌대 위에 모셔져 있다. 미술사에서 좌대가 문제가 되는 것은 모더니즘 조각에서, 그리고 기념비적 동상에서다. 여기서 좌대는 조상을 현실과 구별시켜주는, 그래서 조상에 미학적이고 기념비적인 성격(후광?)을 부여해주는 제도적 장치다. 스스로 이데올로기를 자처하고 고백하고 선언하는 장치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작 희망에 차 있을, 화기애애한 가족애에 부응할, 보다 나은 내일을 맞이한다는 벅찬 감정으로 들떠 있을 표정을 찾아볼 수도 확인해볼 수도 없다. 하나같이 얼굴이 없기 때문이다. 얼굴을 자발적으로 반납한 것인가. 아님, 누군가가 얼굴을 박탈한 것인가. 전자의 경우로 치자면, 알다시피 가면을 의미하는 페르소나는 바꿔 쓸 수 있는 만큼, 없던 일로 할 수도 있다. 그리고 후자로 보자면, 제도가 개별주체의 얼굴을 박탈하고, 대신 익명적인 얼굴, 아마도 계속 웃고 있는 얼굴, 무슨 일이 있어도 웃는 얼굴을 되돌려준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여기서 웃는 얼굴은 상식과 선입견, 그리고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없는 채로, 이미 있는 것이다. 다시, 그러므로 개별주체가 없던 일로 했던 가면을 재차 되돌려준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작품의 반전 포인트는 없어진 얼굴에 있다. 없어진 얼굴은 말하자면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는(우린 때로 우울할 때도 있어요, 라고 말하는) 개별주체와 항상 웃는(우린 항상 행복해요, 라고 말하는) 얼굴을 강요하는 제도의 각축장인 것이며, 작가는 가족 이데올로기를 매개로, 그런, 개별주체와 제도와의 긴장 관계를 보여준다. 

이데올로기에는 이런 가족 이데올로기만 있는 건 아니다.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치자면, 단연 국가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다. 루이 알튀세는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호명할 때, 개인은 비로소 주체로서 거듭난다고 했다. 그러므로 한국인, 한국어 자체가 이미 그 이면에서 국가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국기는 국가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표상에 해당한다. 국기가 포함하는 문양에는 이념을 표상하는 심볼도 있고, 자연을 모방한 심볼도 있다. 윤동희는 다국적 국기에서 이런저런 문양을 차용하고 재구성하는 방법으로 추상적인 패턴 회화 <구겨진 별>을 그렸다. 어쩜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게 재구성된 그림 속에서 어떤 국가도 특정할 수는 없다. 국가를 특정하는 국기를 해체해 순수회화를 위한 도구로 전용하는 제스처로, 어쩜 무정부주의자의 실천 논리로도 볼 수가 있겠다. 마샬 맥루한은 가상현실 속 군소 커뮤니티가 국가와 민족으로 대변되는 현실 속 실물경계를 대체할 것이라고 했다. 보기에 따라서 이 예언은 적어도 가상현실 속에서라면 이제 공공연한 현실이 되었다. 현실이 그렇기에 작가의 형식실험은 탈이데올로기(탈국가주의)를 위해 이데올로기(국가주의)를 해체하고 전용하는 실천 논리를 예시해주는 것이어서 의미가 있다. 
그리고 흥미로운 작업이 <Pink skull>이다. 종이에 에너지 드링크로 그린 해골 그림이다. 장삿속이겠지만, 미래의 생명을 당겨와 오늘 미리 쓰게 해주는 드링크라고 했다. 왜 그래야 하는가. 여기엔 젊음을 권하고 노년을 배척하는 배타적인 논리가 있다. 미래의 생명을 앞당겨 써서라도 젊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자본주의는 경제성과 효율성(그러므로 에너지 그리고 어쩜 젊음의 배터리)이 떨어지는 것을 금기시하는데, 그중 지극한 금기로서 죽음이 지목된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그렇게 금기로 지목된 죽음을 잉여(잉여인간?)라고 부른다. 청춘의 색인 핑크로 그린 해골 그림. 뭔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역설적이지가 않은가. 그렇게 작가가 그린 핑크빛 해골 그림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미래의 죽음을 앞당겨 오늘 미리 죽는 수도 있다는, 역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리고 여기에 또 다른 국가적 아님, 제도적 이데올로기의 표상이 있다. 이런저런 표지석에 아로새겨진 문구들이다. 안동일은 처음에 동상을 찍었었다. 동상은 교육을 통해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과 계몽주의의 산물이다. 선과 악의 기준을 사람들에게 내재화해 스스로 사회적 질서에 동참하게 만드는 유도장치란 점에서 전체주의의, 경찰국가의, 그리고 감시사회의 산물이다. 그 자체에 기념비적인 의미(후광)가 부여된 이데올로기의 표상이다. 어린이가 읽는 위인전기에 해당하는, 어른을 위한 버전으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동상을 찍다가 자연스럽게 좌대 위에 아로새겨진 문장으로 옮겨갔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우아한 세계>다.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사명대사의 동상에 새겨진 문장들이다. 그 문장들은 제목처럼 우아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에게 바른생활이라는 교과서가 있듯, 어른들에게 모범적인 시민의식을 고지시키는 교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 수행이 위인의 전기를 빌린 우회적이고 암시적인 형식을 취했다면, 근작에서 그 경우는 더 노골화된다. 아예 대놓고 고분고분한 시민의식을 강요하는 경우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를테면 국민교육헌장 같은, 새마을운동 같은, 어린이헌장 같은 표지석에 새겨진 문구들이다. 
작가의 이 사진들을 보면서 불현듯 <주유소 습격 사건>이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주유소 털이범들이 사무실에 걸린 사훈, 이를테면 <나는 할 수 있다>거나 <불가능은 없다>와 같은, 속이 빤히 보이는 문구(계몽적인 문구?)에 오두방정에 가까운 급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작가가 찍은 동상도, 위인의 전기도, 표지석에 아로새겨진 계몽적인 문구도 안 보면 그만이다. 보고 안 보고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의지에 달린 일이다. 굳이 누가 보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눈앞에 어른거린다는 것이 마냥 싫은 것이고, 도대체 그 자체가 싫은 것이다. 작가는 아마도 일부러 조명을 어둡게 해 읽기 어렵게 만들었는데, 암울한 시대적 이데올로기와 함께, 이런 불편한 심기를 의도하고 반영하고 연출했을 것이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소통의 기술이다. 미학에서도 정작 작품을 생산하는 주체보다도 작품을 읽는 주체에 방점을 찍는 소통론이 그리고 소통미학이 따로 있다. 상호텍스트성과 저자의 죽음 논의도 그렇지만, 소위 커뮤니케이션아트는 이제 공공연한 현실이 되었다. 왜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 열린 의미라는 예술 언어의 원초적 특수성도 있지만, 언젠가부터 소통문제, 불통 문제는 온 사회가 앓고 있는 급이슈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잠재적으로만 그랬던, 예술 자체가 마침내 소통의 기술이 된 것이다. 
안유진은 이런 소통문제를 다룬다. 작품에서 작가는(그리고 아마도 잠재적인 독자는) <Whats the question?>, 질문이 뭐죠? 라고 묻는다. 정작 작품 자체보다 제목이 더 흥미롭다. 질문이 뭐죠? 라고 묻는 물음 속엔 여러 다중적인 의미가 포함된다. 질문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는, 질문하는 의도를 잘 모르겠다는, 때로 도대체 소통의 기술은 차치하고라도 질문의 기술도 필요한 것이 아니냐는 반문 그러므로 되물음을 포함한다. 그 제목이 소통문제와 불통 문제로 앓고 있는 사회적 난맥상을 압축한 시대적 알레고리 같아서 흥미롭다. 여하튼. 
실제 작품은 똑같은 질문에 대해 서로 다른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 한 번에 답을 쓰는 형식이다. 이를테면 당신의 몸무게는? 당신의 나이는? 당신의 모국어는? 하는 식이다. 다국적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이 질문에서 사람들은 하나밖에 없는 매직펜을 두고 다툰다. 하나의 질문에 대해 한 번의 답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론 매직펜을 선점한 사람이 유리해 보인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 한 사람의 움켜쥔 손에 올라탄 다른 사람의 손의 우격다짐에 따라서 글자는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현듯 소통이 힘(그리고 순발력과 재치)의 문제로 옮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통과 힘은 다른 층위에 속한 문젠데, 슬그머니 그것이 하나로 합치되고 있음을 본다. 인정하긴 싫지만, 실제로도 그렇다. 이로써 작가는 어쩜 소통의 얼굴을 한 힘의 논리를 비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봤자 결국 너도나도 아무도 읽을 수 없는, 오리무중의 의미(그러므로 답)를 되돌려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 진정 주제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예술은 서사의 기술이기도 하다. 옛날에 문자가 없던 시절, 사냥터에서 돌아온 전사들이 부족들을 모아놓고 무용담을 들려주던 것에서 구전문학이 유래했고, 이로부터 최초의 예술이 비롯했다는 설이 있다. 이야기가 실제(그리고 현실, 그러므로 어쩜 역사)를 전달하고 전수하는 최초의 미디어였던 것이다. 그렇게 전수되는 과정에 화자의 상상력이 가미되면서 이야기는 곧잘 각색되곤 했는데, 요새 식으로 말하자면 실재와 허구가 결합 된 팩션이 이때부터 벌써 실현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런 이야기의 기술 곧 팩션을 예술이 발아한 계기로 보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예술은 현실에 기생하지만,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현실에서 시작하지만, 그 과정에 상상력이 매개되면서 현실은 각색된다. 그러므로 예술은 언제나 각색된 현실을 재현할 수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 의미지만, 각색된 형태로만 현실을 재현할 수 있을 뿐이다. 최초의 이야기(어쩜 현실에 대한 발설) 자체가 이미 중의적이고 알레고리라는 말이다. 그 자체를 이야기의 특수성, 예술 언어의 특수성으로 봐도 되겠다. 박정기, 염지혜 작가가 이런 서사의 기술로서의 예술을 다룬다. 
이야기로 치자면 무용담이 가장 결정적이다. 박정기 작가는 관객을 상대로 이런 무용담을 들려준다. <창작의 열쇠>라는 이야기다. 감옥에서 있었던 이야긴데, 죄수가 밥풀을 짓이겨 단단한 열쇠를 만들어 탈옥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간수가 들려준다. 그 이야기가 예술에 대한 알레고리 같지 않은가(작가는 왜 굳이 창작의 열쇠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예술가는 결핍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그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상상력을 쥐어 짜내야 한다. 대개 무용담이 그렇듯 시답잖은 이야기지만, 사실은 절체절명의 이야기일 수 있다. 시시한 농담 같지만, 알고 보면 죽고 사는 문제일 수도 있다. 그렇게 작가는 우리 예술 제대로 좀 합시다, 라는 권고를 시답잖게 건넨다(창작의 열쇠). 그리고 우리 소통 좀 제대로 해봅시다, 라는 이야기를 농담처럼 건넨다(말 같잖은 소리). 바로 이 시답잖은 이야기, 그리고 농담 같은 말 걸기가 작가 고유의 예술적 아이덴티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야기의 고유 형식으로 신화, 설화, 전설이 있다. 이야기들이 유래한 이야기, 이야기들의 이야기, 이야기들의 원형 격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염지혜 작가는 영상 애니메이션 <분홍돌고래와의 하룻밤>에서 이런 설화를 들려준다. 작가는 실제로 아마존에서 분홍돌고래를 마주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설마 해서 네이버 검색을 해보니, 알비노 희귀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설마 해서? 실제 유무와 상관없이 분홍돌고래는 태생적으로 신화화하고, 설화화하고, 전설화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했다. 실제로도 분홍돌고래와 관련한 구전설화, 분홍돌고래를 둘러싼 식민주의 역사, 그리고 여기에 자본주의에 의해 분홍돌고래가 상품화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현지에서 채집되고 조사된 이야기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애초에 이야기가 기생하고 발아할 수 있는 상징적 전형이고 아이콘이었다는 말이다. 물론 하나의 아이콘을 매개로 구전설화, 식민역사, 그리고 자본주의가 하나로 연결된 유기적인 관계를 읽어내는 것, 미시서사로부터 거대서사(그리고 거대담론)를 읽어낸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몫이다. 

그리고 여기에 회화를 형식 실험하는 작가들이 있다. 하지훈, 한무창, 이혜인 같은 작가들이다. 하지훈은 자신의 그림을 <회화를 위한 소조>라고 했다. 제목처럼 그림이지만 양감을 가진 덩어리처럼 보인다. 속이 비쳐 보이는 반투명한 구조가 영롱한 보석 같은, 형형색색의 젤리를 결빙시켜놓은 것 같은 그림이다. 흘러내리는, 녹아내리는 성질을 잠재하고 있는 멜팅구조를 연상시킨다. 그 구조가 영속적이기보다는 잠정적으로 보이고, 알록달록한 색깔로 인해 예쁘고 감각적으로 보인다. 회화이면서 회화에 반하는(양감을 가진 덩어리), 소조이면서 소조에 반하는(영속적이기보다는 잠정적인), 그래서 어쩜 회화와 소조가 그 경계를 허물어 하나로 합치되는 접점에 대한 형식실험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 같다.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무의식이, 내면이 밀어 올린,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잠정적인, 비결정적인, 반쯤은 자동기술적인, 그러면서도 감각적인 형태가 무상한 풍경, 흐르는 풍경으로 불러도 되겠다. 
그리고 한무창은 탈재현 회화 이후의 회화적 성과를 소환하고 재사용하는 경우를 예시해준다. 어떤 감각적 대상을 재현하기보다는 회화 자체가 가능해지는 조건으로 자기를 소급시킨다는 점에서 보면 모더니즘적 환원주의를, 회화(혹은 회화행위)를 매개로 회화를 묻는다는 점에서 보면 개념주의 미술을,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만든다는 점에서 보면 쉬포르 쉬르파스(지지대와 지지체)를 예시해준다. 그림 그리기와 그림 만들기의 경계를 허물면서 넘나드는, 그림과 공작의 경계를 허물면서 넘나드는, 때로 평면을 넘어 공간에로의 확장을 꾀하는, 그래서 일종의 설치회화로 불러도 될 지경으로까지 그림을 몰아가는 과정이 감지된다. 과정? 보기에 따라서 작가의 그림은 혹 과정에 방점이 찍히는지도 모른다. 항상적으로 이행 중인 회화, 항상적인 과정을 잠재하고 있는 회화다. 그러므로 과정주의(어쩜 과정 자체가 주제인)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림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구조적인데, 구축이 해체를, 해체가 구축을 잠재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혜인의 그림은 큰 그림이 없지 않지만, 대개는 손 안에 속 들어오는 작은 그림들이다. 그렇게 작은 그림들을 일렬로 나열하는 디스플레이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일관된 서사를 전달하고 싶을 때, 아카이브나 일지(그리고 일기) 고유의 형식적 특징을 강조하고 싶을 때, 그리고 시리즈 그림에서 흔히 접하는 방식이다. 내용은 이렇다 할 게 없는, 보통 풍경들이고 사람들을 그린 그림이다. 이게 단가. 그렇다고 특별한 주제가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럼, 뭔가. 
관전 포인트는 다른 데 있었다. 작가는 이 그림들을 하나같이 급박한 상황에서 그린 그림들이라고 했다. 비를 맞거나 피하면서, 바람과 맞서면서, 어둠 속에서 최소한의 불빛에 의지하면서, 그리고 아마도, 때로 상대방이 미처 자기를 의식하기도 전에 재빨리 그리기 위해 서두르면서 그린 그림들이라고 했다. 순간의 장면을 현장에서 즉시 캔버스에 옮겨 그린 그림들이라고 했고, 몸으로 지각되는 순간을 감각적으로 담아낸 그림들이라고 했고, 그리고 그렇게 장소성과 신체성에 기반한 그림들이라고 했고, 날씨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에서 그린 그림들이라고 했다. 
이건, 뭔가. 왜 불편한 상황을 감수하는가. 분명, 작가가 기꺼이 미증유의 상황 속에 자기를 던져 넣는 것인데, 여기에 무슨 각별한 의미라도 있는 것인가. 바로 회화를 대하는 태도에 방점이 찍힌다. 이를테면, 태도가 형식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태도가 달라지면 형식도 달라진다. 그런 만큼 그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그림이 되기까지 그림(그리고 어쩜 작가 자신)이 겪은 삶, 그림(그리고 작가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 이를테면 긴박한 상황이 불러온 긴장감, 불안감, 초조함, 서두름, 그리고 어쩜 서투름을 읽어내는 것이 결정적이다. 그렇게 그림 그리기에 대한 작가의 태도에는 객에 주를 던져넣는(투사하는), 그래서 종래에는 주와 객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상학적 에포케에 대한(메를로 퐁티의 세잔 분석에서도 엿볼 수 있는) 공감이 있다. 

예술이 지향하는 노선 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과 삶(혹은 생활)의 일치를 들 수 있다. 그 선두에 선 경우가 주지하다시피 아트앤크라프트 운동이고, 바우하우스로 알려져 있다. 예술과 공예, 가구와 건축의 경계를 허물면서 넘나드는 형식실험과 성과가 전해지고 있고, 담론으로 치자면 탈장르와 탈형식 그리고 탈경계와 같은 각종 탈담론에 부합하는 면이 있고, 좀 더 일반적인 경우로는 융합과 융복합 개념에도 맞닿아있다. 
정재훈의 작업이 위치해 있는 지점이 꼭 그렇다. 현재로선 작가의 작업에 가장 부합하는 개념이 아트퍼니처로 보인다. 예술이면서 가구이기도 하고, 생활미술이면서 건축에 대한 형식실험일 수 있다. 진즉에 르네상스의 팔방미인으로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상한(?) 설계도가 유명하지만, 전적으로 레오나르도이기 때문에 알려질 수 있었다. 장르 간, 분야별 벽이 여전히 공고해서인지 아님, 낀 장르라서인지는 모를 일이나, 여하튼 제도권 미술에서 좀체 그만을 위한 빈자리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마찬가지로 탈담론에 부합하는 또 다른 형식개념, 이를테면 종 다양성 개념이나, 종 다양성 개념에 힘입은 다원예술이 현대미술을 주도하다시피하고 있는 현실과 비교된다. 사실 아트퍼니처만 해도 임시방편의 명칭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트퍼니처이면서 그 범주가 아트퍼니처보다는 더 확장적인, 다원예술에 어우러지면서 다원예술보다는 좀 더 생활 친화적인, 그만을 위한 적확한 이름표를 찾아주는 것이 숙제다. 중요한 건, 실제로 그 방면에 역량 있는 작가가 있다는 사실이고, 자기만을 위한 자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미술관 기획을 위한 콘텐츠며 아이템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재차 호출해보자면, 레오나르도는 성벽에 난 우연한 얼룩이나 미세 균열에서 전쟁을 보고, 자연풍경을 보고, 홍수를 본다고 했다. 심지어 성당의 종소리를 듣는다고도 했다. 스퓨마토 기법과 함께 작가의 평소 신비주의자의 면모를 반영하고 있는 대목으로 볼 수 있겠다. 이런 신비주의를 계승한 경우가 가스통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 개념이다. 물질(레오나르도의 경우에는 얼룩과 균열)이 상상력을 자극하고 일깨운다. 그러므로 물질이 상상력의 원인이 된다. 객체에 속하는 물질과 주체에 속하는 상상력이 상호교감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교감이 없다면 얼룩은 얼룩일 뿐, 상상력 또한 가동되지 않는 만큼 없던 일이 된다. 결국 관건은 주체 쪽에 있고, 주체가 얼룩과 균열에서 뭘 보아내느냐는 것에 있다. 
작가 배종헌의 작업이 그렇다. 그의 그림은 얼룩회화 혹은 흔적회화라고 부를 만한, 자기만의 가능한 회화 지평을 열어놓고 있다. 이를테면 여기에 미장이가 회칠한 회벽 아님, 시멘트를 칠한 벽면이 있다. 보기에 따라서 그 벽면은 미니멀리즘 타블로 작업을 연상시키고, 모노톤 회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더욱이 미니멀리즘 자체가 예술이 가능해지는 최소한의 조건을 상황 논리에서 찾는 것이 아닌가. 말하자면 그 벽면은 일상이라는 맥락 속에 있어서 벽면인 것이지, 제도권 미술 속에 들어오는 순간 작품이 된다는 논리다. 여기에 미장이는 벽면을 바를 때 자신의 땀도 바르고, 한숨도 바르고, 걱정도 바르고, 눈물도 바른다. 논리적 비약이나 상상력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고, 실제로도 그렇다. 물론 그걸 벽면에서 캐내고 읽어내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그렇게 작가는 벽면으로부터 벽면회화를, 검댕으로 새까만 터널에서 터널 회화를 캐냈다. 얼룩과 검댕 속에 숨은 누군가의 땀을, 한숨을, 걱정을, 눈물을 풍경으로 되불러냈다. 
그리고 여기에 벽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가 있다. 면벽 수행하는 선승처럼 시종 그렇게 꼼짝없이 앉아있다. 벽에 난 눈물 자국을 쳐다보고 있다고 했다. 눈물 자국? 벽에 눈물 자국이 있을 리가 없다. 일부러 눈물을 훔쳐 벽에 발랐다면 모를까, 그런 일은 좀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쩜 그 눈물 자국은 작가의 상상력이 지어낸 것이다. 그 집에 살았었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흘린 눈물 자국이 벽에 배어있을 것이라고,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그림 속 남자처럼 벽을 마주하며 속 눈물을 삼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물론 눈물 자국이 아닌 다른 걸 상상할 수도 있다. 문제는 작가가 자기를 가로막고 있는 벽에서 눈물 자국을 상상했다는 것이고, 그 상상이 공감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공감하게 만든다? 연민이다. 존재에 대한 연민이다. 개인적으로 예술이 존재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연민이라고 생각한다. 연민이 없으면 감동도 없고, 공감도 없고, 예술도 없다. 물론 다른 존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여하튼, 상황을 미시적으로 파고드는 섬세한 레이더가 발달 된 작가의 모든 작업에는 어떤 식으로든 이런 존재에 대한 연민이 배어있고, 벽에 난 눈물 자국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에게서 그 연민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경우, 그래서 어쩜 예술에 대한 작가의 평소 입장(그리고 태도)을 새삼 선언하고 있는 경우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대구미술관이 선정한 작가들을 전면에 내세운(그래서 향후 대구미술관의 얼굴 역할을 할) 이번 전시의 제목은 <당신 속의 마법>이다. 마법은 중의적이다. 예술도 중의적이다. 그리고 어쩜 삶 자체도 중의적이다. 이처럼 중의적인 의미를 전시 주최 측은 메타포라고 본다. 그러므로 어쩜 알레고리라고 본다. 그 메타포가 최종적으로 의미화되는 것은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다. 여하튼 마법은 당신 속에 있고, 전시가 그 마법을 일깨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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