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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호/ 그림자의 변신, 존재, 사군자, 집, 그러므로 어쩜 그리움

고충환

김광호/ 그림자의 변신, 존재, 사군자, 집, 그러므로 어쩜 그리움 



현대인에게 전통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저 과거지사며 흘러간 옛노래에 지나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모든 전통은 당대적으로 현대였다. 인간은 자기반성적인 동물이다. 여기서 반성을 매개하는 것이 시간이다. 그렇게 시간을 매개로 역사는 현대를 재생시키고, 전통이 현대의 미의식을 갱생한다. 김광호는 전통적인 소재인 사군자를 소환한다. 전통이 현대 속에 살아 숨 쉬게 만든다. 전통을 사용하는 자기만의 방법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레이저커팅 기법으로 사군자를 재현한다. 아마도 기법적으로 철판 커팅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인데, 평면성이 강한 편이다. 그런 만큼 작가의 조각은 평면적인 철판 조각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이런 평면성이 조각이면서도 회화적으로 보인다. 특히 사군자가 유래한 전통적인 먹그림을 보는 것 같다. 지엽적인 차이를 도외시한다면, 전통적인 먹그림은 선으로 축조된 평면, 선이 평면으로 확장된 회화로 볼 수가 있겠다. 그러므로 다시, 작가의 조각은 전통적인 먹그림을 평면적인 입체로 환원한 조각으로 재정의할 수가 있겠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은 평면과 입체,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하나로 아우르는 부분이 있고, 여기에 곧잘 조각의 경계를 넘어 공간설치로까지 확장되기도 한다. 보기에 따라선 월페인팅(이를테면 만개한 매화나무 가지를 벽면에 걸어 설치한 것과 같은)과 드로잉을 조각으로 표현한 것도 같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은 비록 조각이지만 정작 조각 보다는 그림처럼 보인다. 그림 같은 조각이고, 회화적인 조각이다. 작가의 조각이 갖는 특수성은 바로 이처럼, 회화와 조각 사이(다르게는 관계)로부터 온다. 


작가의 조각은 회화적이다. 마치 그림에서처럼 사각 프레임을 도입한다거나, 프레임 안에 사군자와 같은 모티브와 함께 여백을 들어 앉히는 것 역시 회화적 장치로 볼 수가 있겠다. 프레임은 곧잘 펼쳐진 병풍의 형태를 취하기도 하고, 때로 두 개 이상의 프레임이 일정한 각을 이루면서 잇대어진 형태(병풍이 변주된 형태)가 마치 창문을 통해서 보는 것과 같은 공간적 확장을 꾀하기도 한다. 원래 평면상태로만 감상할 수 있었던 병풍 혹은 족자에서 프레임을 빠져나온 그림으로, 그렇게 그림이 입체로 그리고 재차 입체가 공간으로 확장된 경우로, 그리고 그렇게 전통적인 회화를 감상하는 전혀 다른 방식을 제안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프레임의 도입은 이렇듯 회화적 장치와 함께 공간확장을 가능하게 해주는데, 이를테면 조각을 그림처럼 벽에 걸어 연출할 수도, 환조에서처럼 공간에 세울 수도 있게 해준다. 그렇게 작가에게 조각(회화적인 조각)은 회화와 조각, 평면과 입체, 공간과 설치, 그리고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자기표현을 확장 시킨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는 근작에서 사군자와 함께 나비를 불러들여 생생함을 더한다. 항아리 표면에 그려진(조각된) 나비 그림인지, 아니면 나비가 그림(조각) 속 꽃을 보고 날아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불분명한 경계가 인식의 깊이를 더하는 한편, 비가시적인 향기마저 작업의 일부로서 끌어들이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또 다른 불분명한 경계가 있다. 그림자다. 조각처럼 공간에 설치하든 그림처럼 벽 위에 걸든 커팅된(그리고 투각된) 철판 조각은 그림자를 만든다. 여기서 조각도 평면이고 그림자도 평면이다. 좀 희미한 것을 제하고 보면 형태도 크기도 하나같다. 그래서 적어도 논리적으로만 보자면, 조각과 그림자가 실재를 두고 다투는 일이 일어난다. 실재는 무엇이고, 실재가 보기에 그림자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가 있는가. 그 불분명한 경계가 재차 인식의 깊이를 더한다. 그림자를 통해서 이미지를, 그리고 의미를 확장 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작가의 조각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특징으로, 상호 간 이질적인 재료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 주목된다. 이를테면 레이저커팅 기법으로 조형된 철판 소재와 돌과의 결합을 꾀한 것이 그렇다. 아마도 돌과 화초가 결합 된 전통적인 수석에 착안한 것일 터이다. 그렇게 돌(수석)과 어우러진 난(부작난)을 조형하기도 하고, 마치 돌(수석)에 뿌리 박은 듯 웃자란 대나무를 조형한다. 그리고 돌은 그 위에 항아리와 같은 기물이 올려진 좌대를 대신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조각에서 좌대는 그 위에 얹힌 사물 대상(조각)이 현실과는 다른 대상임을 주지시키는 제도적 장치로 발명된 것이다. 수석에서의 돌 역시 그러한데, 바로 관상용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렇게 현실과의 거리 두기를 위한 미학적 장치로서 고안된 관행으로 볼 수가 있겠다. 여기에 때로 돌은 조형물의 중심을 잡아주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더러 일종의 풍경 조각으로 정의할 만한 경우가 엿보이는데, 예컨대 물이 고인 바위(사실은 조약돌) 뒤편으로 매화나무 한 그루가 보이는 정경이 그렇다. 작가의 조각이 정물에서 풍경으로, 그리고 차후에는 아마도 서사적인 조각(이야기를 함축한 조각)으로 확장될 수도 있음을 예감케 하는 대목으로 봐도 되겠다. 

그리고 작가의 조각은 일종의 반조각 혹은 탈조각으로 볼 수 있는 여지도 있다. 전통적으로 조각은 양감(매스)이 그 본질이다. 그런데 작가의 조각은 양감을 결여하고 있고, 여기에 그림처럼 평면적이다. 조각이면서도 그림처럼 보인다. 이처럼 양감을 결여한 것이나,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도 그렇고, 보기에 따라선 이질적인 재료들을 결합한 것 역시 반조각적이다. 이 모든 형식실험들은 그러나 그 자체 조각에 반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궁극적으론 조각의 표현영역을 확장 시키는 경우, 그러므로 조각이 연장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여기에 집이 있다. 원래 2006년 전시에서 처음 선보였던 것을 최근 수년 내에 다시 불러내 심화 발전시킨 것이다. 그런 만큼 작가에게 집은 사실은 사군자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언덕 위에 야트막한 집들이 층층이 포개져 있는 전형적인 달동네의 풍경이며 정경을 재현한 것인데, 정작 작가는 원래 수평적인 구도(아마도 시골에서 흔히 볼 법한 구도)를 수직으로 세운 것이라고 했다. 집 사이사이로 나무가 보이고, 꼭대기 집 위로는 구름 한 점이 걸려있다. 그리고 세로로 길게 포개진 집들 아래쪽에 석조로 만든 집이 지지대를 대신하고 있다. 시골집으로든 달동네로든 예스러움과 함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정경이다. 

작가는 이 집 시리즈를 <내 그림자 길게 끝나는 곳, 고향>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그림자는 존재의 그림자로 볼 수 있겠고, 그리움의 화신이며 물화 된 형식으로 볼 수가 있겠다. 그 그리움의 긴 끝자락에 고향이 있다. 게오르그 짐멜은 현대인의 징후며 증상으로서 고향에 대한 상실감을 들고 있다. 현대인은 고향을 상실했다. 여기서 고향은 그저 지정학적 장소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정신적 뿌리며 원천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다시, 현대인은 정신적 뿌리며 원천을 상실했다. 현대인은 이런 상실감으로 아프다. 집을 소재로 한 작가의 조각은 이처럼 현대인이 상실한 고향을 상기시키고, 존재가 유래한 원천(원형)에 대한 그리움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 상실감으로 위안을 준다. 


집 시리즈에서도 그렇지만, 그림자는 작가의 조각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애초에 작가의 모든 조각에는 그 이면에 그림자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이 뒷받침되고 있다. 그림자에 대한 성찰이 있었기에 입체를 평면으로 환원할 수 있었고, 그림을 조각처럼 세울 수가 있었고, 그리움을 긴 그림자로 늘어트릴 수 있었다. 앞서, 그림자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이라고 했다. 그림자와의 대면은 운명적으로 존재론적 만남이며 사건일 수 밖에 없다. 사실을 말하자면, 작가는 원래 이런 그림자와의 운명적인 만남과 사건으로부터 자신의 조각을 시작했다. 그러므로 어쩜 그림자는 작가의 조각을 잉태한 모태와도 같은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의미론적으로 작가의 작업을 견인하는 키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림자가 뭔가. 존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의 집요한 일부다. 존재가 있으면 저도 있고 존재가 없으면 저도 없는, 존재의 끈질긴 부분이다. 존재가 움직이면 저도 움직이고 존재가 서면 저도 멈춰서는 그림자는 실재인가 비실재인가. 그림자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그림자는 존재에 기생 함으로서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지, 저 홀로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존재와 그림자와의 관계는? 존재에게 그림자가 갖는 의미는? 단순히 빛이 만든 현상이라고 보고 넘기기에 그림자는 집요한 그리고 끈질긴 부분이 있다. 이런 존재와의 밀월(?) 관계가 그림자로 하여금 존재를 대리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억압된 욕망과 무의식 그리고 심연과 같은, 실존적인 조건과 같은 존재의 비가시적인 부분이 가시화된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그렇게 존재에게 그림자는 친근하고 낯설다. 작가는 원래 존재와 그림자와의 이런 밀월 관계며 양가성을 파고들었었다. 그림자가 존재의 말 못할 속사정을 대신하면서, 존재를 대리 보충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 그림자는 존재(자기)를 넘어 사군자로, 집으로, 그러므로 그리움의 화신으로 옮겨갔지만, 어쩜 그렇게 옮겨간 지점 지점들 모두가 사실은 하나같이 존재가 변신한 자리들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렇게 언젠가 그림자 그러므로 존재가 처음 시작된 자리로 되돌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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