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김대관/ 막막한, 가없는, 아득한, 그리운 강물

고충환

김대관/ 막막한, 가없는, 아득한, 그리운 강물 



강물을 쳐다보고 있으면 정신이 멍해질 때가 있다. 처음에는 강물과 함께 그 강물을 쳐다보고 있는 내가 같이 보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나는 불현듯 지워지고 강물만 보인다. 강물과 의식이 서로 분리돼 있다가 점차 강물이 의식 쪽으로 건너와 스며들고 차고 넘쳐 종래에는 의식을 온통 침범하고 잠식하는 탓이리라. 이처럼 강물이 의식 쪽으로 범람할 수는 있어도 의식이 강물을 범람시키지는 못한다. 의식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강물을 무미건조한 개념으로나 환원할 수 있을 뿐. 이처럼 의식이 강물로 범람할 때 강물은 흐르는 것도 같고 흐르지 않는 것도 같다. 그러나 분명 강물은 흐른다. 마찬가지로 시간이 멈춰 선 것도 같고 흐르는 것도 같다. 그러나 의식이 감지할 수 없을 만치 느리기는 해도 분명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 이처럼 강물도 흐르고 시간도 흐른다. 이렇듯 흐르는 성질을 공유한 탓에 강물은 시간의 유비가 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고 했다. 만물유전이다. 모든 존재는 변화한다. 변화한다는 것은 흐른다는 것. 이렇게 강물도 흐르고 시간도 흐르고 존재도 흐른다. 흐르는 존재를 붙잡을 수는 없는 일. 그래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있으면 가없고, 덧없고, 막막해진다. 

김대관은 독일 할레에서 유학할 때 곧잘 인근에 있는 강을 따라 산책하곤 했다. 그러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삭이고 키웠다. 고향에도 강이 흐르고 있었다. 고향의 강이 범람하고, 이국의 강이 범람해 그의 마음속에 또 다른 강이 흐르게 했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강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곧 향수를 의미했고, 그 시절로 회귀하는 시간여행을 의미했다. 작가는 흐르는 강물에 착안해 그 향수며 시간을 조형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었고, 그 욕망을 작업으로 풀었다. 여기서 작가의 마음속에 흐르는 강은 똑같지는 않아도 우리의 마음속에도 흐른다.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속에 흐르는 강을 간직하고 있다. 향수의 강, 시간의 강, 회한의 강, 그리고 망각의 강 등등. 그러므로 강을 소재로 한 작가의 작업은 작가의 경계를 넘어 우리의 마음속에 범람하면서 공감을 얻고 보편성을 얻는다. 


그러나 말이 쉽지 마음속에 흐르는 강을 조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도 그렇거니와 강 역시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다. 얼핏 색이 있는 것 같지만 천변만화한 스펙트럼을 아우르고 있어서 어떤 결정적인 색채로 환원하거나 한정할 수가 없다. 형태도 비결정적이고 색채도 비결정적이다. 형태나 색채가 자연현상에 연동돼 있을 뿐만 아니라, 이처럼 마음과도 연장돼 있다면 문제는 더 어려워진다. 마음의 프리즘을 통해 본 형태와 색채란 결국 질료를 품으면서 넘어서는 문제이며, 감각의 문제이며, 암시의 문제이다. 이처럼 감각적이면서 암시적인 강을 어떻게 붙잡을 수가 있는가. 

여기서 작가는 유리 회화를 생각해낸다. 물이 그렇듯, 빛을 투과하는, 그래서 투명한 성질을 갖는 유리판 위에 채색이 얹힌다면 마음속에 흐르는 강물을 표현할 수가 있을 것이다. 물을 투명하게 하는 것도 물의 질료 속으로 투과하게 만드는 것도 빛이다. 비록 질료는 다르지만 유리 역시 마찬가지다. 빛이 매개가 되면서 물과 유리가 서로 통하게 한다. 빛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물을 암시하기 위해서 빛도 같이 암시되어야 한다. 유리 회화를 통해서 물의 질료를 감각 하게 하고, 동시에 빛의 질감을 암시하는 것. 

강물의 형태도 그렇지만 특히 색채는 자연현상에 연동된다. 맑은 날에 강물은 파랗게 보이고, 더 맑은 날에는 아예 옥색으로 보인다. 숲을 끼고 있을 때 강물은 연녹색으로 보이다가도 녹색과 때론 짙은 녹색으로 보이기도 한다. 수면 위에 노을이 드리워질 때면 강물은 물의 색깔 위로 빛의 색깔을 밀어 올린다. 그러다가 날이 어둑해지면 파란색은 군청색으로 짙어지다가 점차 어둠 속에 묻힌다. 어떤 색의 경우이건 색채의 이면에 투명한 깊이를 간직하고 있고, 어떤 특정의 색채로 환원되거나 한정되지는 않는, 몇 가지 색채를 동시에 아우르고 있는, 그저 색채라기보다는 색채의 기미, 색채의 느낌에 가까운 어떤 비전을 열어 보인다. 이렇게 해서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색채가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인가에 대한 설명이 된다. 결국 작가의 작업에선 이런 색채의 기미, 색채의 느낌(동시에 물의 기미이면서 빛의 느낌이기도 한)을 재현하는 것이 관건이고 핵심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작업이 제작되는 과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작가는 우선 유리판에다가 유리 착색안료를 칠한다. 이때 가녀린 라인 테이프(소성 과정에서 불에 타 없어지는 특수 테이프)로 화면의 일정 부분을 가려 안료가 묻지 않게 한다. 이 상태로 620도까지 서서히 온도를 높여가며 가마에 구워낸다. 그리고 재차 색을 덧칠하고 구워내기를 수차례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표면에 은근하면서도 투명한 질감의 색채가 착색된 유리판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착색된 복수의 유리판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하나의 화면으로 중첩 시키는데, 같은 계열의 색채가 착색된 유리판을 중첩 시킨다. 이를테면 좀 더 짙은 청색과 좀 더 엷은 청색이 착색된 유리판을 중첩 시켜 같은 색조를 유지하면서도 라인 테이프로 처리한 빈 부분이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 그리고 그 빈 라인 위에 대비되는 보색의 점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여기서 안료가 착색된 유리판은 수면을 암시하며, 라인으로 처리된 부분은 수면의 방향(혹은 평형)과 유속(물이 흐르는 느낌)을 암시한다. 더불어 수면에 던져진 빛의 편린들을 암시하며, 이는 점점이 찍힌 점(광점)들에 의해 강조된다. 이렇게 해서 물이 흐르는 느낌과 함께, 수면에서 난반사되는 빛의 산란 효과를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작업이 제작되는 과정을 재구성해봤지만, 작가의 작업은 기계적인 과정이나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같은 계열의 색조가 중첩된 화면이 특정의 색채로 환원할 수는 없는, 투명하고 깊이감이 느껴지는 색감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중첩된 화면으로 인해 라인으로 처리된 부분이 서로 겹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하면서 다양한 선의 변주를 만들어낸다. 이 일련의 현상들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져 투명하면서도 깊은 물의 질감을 만들어내고, 물의 표면에서 물과 희롱하는 빛의 기미를 자아낸다. 그 질감과 기미에 힘입어 정적이고 서정적인 느낌과 함께, 관조적이고 명상적인 계기로 이끈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작가의 유리 회화 중엔 수직성을 강조한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옆으로 긴 화면으로 수평을 강조한 경우가 많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흐르는 물의 성질에 따른 것이며, 자연의 생리를 따른 것이다. 이처럼 옆으로 가없이 확장된 수평의 풍경이 수직의 풍경에 비해 쉽게 풍경에 동화되게 만든다(이에 반해 수직의 풍경은 범접할 수 없는 거리감으로 숭고를 자아낸다). 


그리고 작가는 이 일련의 유리 회화를 캔버스 그림으로 옮긴다. 다만 매체가 달라졌을 뿐, 주제는 마찬가지로 자연 속에 흐르는 강물이며, 내 마음속에 흐르는 강물이다. 그 과정을 보면, 짙은 색을 먼저 칠하고 점차 밝은색을 덧칠하는 순서를 밟는데, 묽은 안료를 수십 차례 중첩 시켜 이면의 짙은 색이 은근히 배어 나오도록 조절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묽은 안료를 덧칠할 때 일부 안료의 알갱이가 화면에 남겨진 채 굳어지면서, 그 위로 붓질이 지나갈 때 생긴 자국이 여실해진다는 점이다. 화면을 가로지르며 연장된 이 자국은 유리 회화에서 라인 테이프로 처리한 선에 해당하며, 그 선의 느낌 그대로 캔버스 그림의 생리에 맞게 구현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수십 차례에 걸쳐 엷은 안료를 덧바른 화면에서 이면의 색채와 표면의 색채가 하나의 결로 중첩되고, 특정의 색채로 한정되지 않는 풍부한 색채의 스펙트럼을 아우른다. 이로써 마치 색채가 화면의 이면으로부터 배어 나온 것 같은 은근한 느낌과 함께 어떤 내적 울림을 자아낸다. 내적 울림? 그림은 자연 속에 흐르는 강물보다는 마음속에 흐르는 강물, 가시적인 강물보다는 비가시적인 강물, 질료적인 강물보다는 관념적인 강물의 생리를 닮았다. 그래서 캔버스 그림은 유리 회화에 비해 더 관념적이고 더 추상적으로 보인다. 모노톤의 화면이 미니멀리즘의 변주처럼 보이고, 그러면서도 그 이면에 내적 울림을 자아내는 서정적인 느낌으로 후기 미니멀리즘(감각적 미니멀리즘)의 가능성을 예시하고 있다. 


김대관의 작업은 흐르는 강물에 착상된 것이다. 강물은 작가의 고향에 흘렀었다. 모든 고향에는 왠지 강이 흘렀던 것 같고, 강이 흐를 때 고향은 더 고향다운 것 같고, 고향에 흐르는 강은 왠지 과거형으로 기술해야만 할 것 같다. 그리고 강물은 작가가 속해 있는 지금 여기에도 흐르고, 작가의 마음속에도 흐른다. 그 모든 강물은 한줄기로 연결돼 있다. 원래 고향에 흐르던 강이 지금 여기 위로 차고 넘치고, 마침내 내 마음속에마저 범람한 것이다. 이렇게 범람 된 강물은 그 원천이 고향이란 점에서, 모든 강물은 결국 그리움이다. 그래서 강물을 그린다는 것은 곧 그리움을 그린다는 것이다. 

작가는 유리 회화를 통해서 이처럼 고향(그리고 존재 그러므로 어쩜 원형)에 대한 그리움이 투사된 강물을 그린다. 그 그림이 막막한, 가없는, 아득한 감정에 빠져들게 만든다. 강물 앞에 선다는 것, 그것은 밑도 끝도 없는 그리움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그 그리운 강물 앞에 서게 만든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