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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흥/ 나의 애플리케이션, 나의 삶의 연대기

고충환

박진흥/ 나의 애플리케이션, 나의 삶의 연대기
 


현대문명의 이기가 여럿 있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단연 컴퓨터를 들 수 있다. 컴퓨터를 전후로 시대가 갈릴 만큼 컴퓨터의 등장은 가히 생활의 혁명이랄 만하다. 컴퓨터는 등장한 이후 삶의 풍속도를 빠르게 바꿔놓고 있는데, 이전 시대 전체를 합쳐 인류가 겪은 변화와 맞먹거나 상회하는 변화를 리드하고 있고, 때로 그 변화하는 속도는 미처 따라잡기 힘들 정도다. 인류의 역사에서 보면 기술혁명은 주로 근대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이를테면 사회학적으로 뒤르켐의 아노미 현상(미처 물질문명을 따라잡지 못한 채, 정체된 정신문명의 미성숙 혹은 공황상태)으로 대변되는 산업혁명의 시대, 미학적으로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의 상실 개념(사진과 영화의 등장으로 오리지널리티를 잃어버린 예술작품에 대한 애도)으로 대변되는 기술복제의 시대, 그리고 마샬 맥루한(TV의 등장을 계기로 본격적인 대중문화의 출현을 예고한)의 차가운 미디어와 뜨거운 미디어 논의로 대변되는 전자복제의 시대가 그렇다.
 
그리고 이후 바통을 이어받은 컴퓨터는 이와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열어놓으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현실에서 가상현실로 갈아타면서 경험치의 양과 질에 근본적인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그 지각변동을 사는 현대인은 가히 신인류로 불러도 될 만큼,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이제 현실은 감각적 현실과 가상현실을 구분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고, 가상현실과 증강현실과 대체현실로 무작정 분화 확장되기에 이르렀고, 가상현실이 현실을 대체하면서 종전에 현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제 가상현실에서 시작하는, 말하자면 가상현실이 인식의 고향이 되고 의식의 원형 역할을 도맡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극적으로 말해, 신인류의 고향은 어쩜 가상현실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컴퓨터가 탑재되는 바디에 따라 작아지고 있다. 휴대용 컴퓨터(핸드폰)에 이어 시계나 안경과 같이 입고 착용하는 컴퓨터, 그리고 몸에 칩을 심는 생체컴퓨터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화된 것으로 치자면 그중 핸드폰을 들 수가 있겠고, 박진흥은 바로 이 핸드폰을 소재로 동시대성을 담보하고 일상성을 풀어낸다. 


예술에서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무엇보다도 주제를 들 수 있다. 여기서 주제는 동시대성을 담보해야 한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감동도 공감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핸드폰은 동시대성을 담보하고 일상성을 담보하는, 시대적 아이콘이랄 만 하다. 핸드폰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엄밀하게는 주제보다는 소재에 가깝지만, 그래도 여하튼 시작이 좋다고 봐도 되겠다. 
작가는 핸드폰을 만든다. 그렇다고 사제 혹은 수제 핸드폰과 같은 기술적인 측면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작가의 작업은 기술적이라기보다는 공작적이다. 디지털적이기보다는 아날로그적이다. 핸드폰의 형태 그대로 크기를 확대한 것인데, 확대된 핸드폰 형태 안에 이런저런 그림과 오브제를 배치한 후, 그 전체를 투명 에폭시로 가두어 굳힌 것이다. 어쩜 핸드폰의 화면을 바탕 삼아 그 위에 그림을 그리고 조형을 조성한 작업으로 보면 되겠다. 핸드폰 위에 그림을 그린 것이란 점에서 핸드폰을 또 다른 캔버스처럼 사용한 것이고, 그렇게 그려진 그림을 통해 일상성이며 사사로운 서사를 투사한 것이란 점에서 보면 핸드폰을 일종의 자기반성적인(혹은 내면적인) 거울처럼 사용하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투명한 에폭시에 갇힌 채 굳어진 그림과 오브제들은 말하자면 작가의 내면의 거울에 비친 일상성의 편린들이며 정체성의 조각들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담 작가가 조형한 핸드폰 속엔 어떤 편린이 있고 조각들이 있는가.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 홀씨가 있고, 하늘에 떠가는 구름이 있고, 따옴표 같은 말 부호가 있다. 양식화된 새가 날아가고(종이학의 추억?), 하늘을 향해 연이 날아오르고(유년의 추억?), 은행잎이 떠다닌다. 
마치 사사로운 일기처럼 작가의 일상성이며 생활감정을, 그리고 때론 되불러낸 추억을 표현(기술)한 것일 터이다. 그 일기를 매개로 작가가 말을 걸어오는 방식은 일차원적이다. 에둘러 말하지 않는 것이 순수한 마음 그대로를 투명하게 내비치는 미덕이 있고, 아이 같은 심성이 있다. 이를테면 플러스 기호를 그려놓고, 오늘은 플러스 삶을 꿈꾸며, 라고 부른다거나, 마이너스 기호를 그려놓고, 오늘은 마이너스 삶이 아니길, 이라고 명명한 것이 그렇다. 그 연장선에서 물음표 기호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그리고 따옴표 부호는 미처 못다 한 말이나 속말을 의미할 것이다. 그림과 함께, 기호나 부호를 그림처럼 그려 넣은 것이 흥미롭다. 그 결이 좀 다르지만 고대 암각화에서 유사형식(예컨대 번개 표시 같은, 일종의 그림문자?)을 엿볼 수가 있는데, 단순명료한 고대인의 그림에 감동 받는다는 작가의 고백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흥미로운 건 또 있다. 그림자가 그렇다. 화면에 그려진 오브제에는 꼭 그림자가 같이 그려지는데, 오브제 그대로 형태를 반복하는 그림자가 화면을 허공으로서보다는 벽(벽에 비친 그림자)처럼 보이게 만든다. 정작 허공 같고 하늘 같은 화면 자체와의 묘한 언발란스가 흥미롭다. 내면의 거울을 하늘(그러므로 어쩜 자유)로 인식하면서, 동시에 가로막힌 벽으로도 보는 것일 수 있겠다. 여는 마음과 닫힌 마음이 공존하는, 이율배반적인, 마음의 현상학을 생각해보게도 된다. 

그리고 핸드폰 아래쪽에 아마도 이 마음의 주인일 사람 형상이 그려져 있다. 팔도 없고 얼굴도 없는 양식화된 형상이 초현실주의(예컨대 막스 에른스트)의 그림 속 형상을 닮았다. 작가는, 화가인 나는 팔이 쉬고 있을 때 쉼을 느끼고, 다리를 뻗고 있을 때 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혼이 쉼을 취할 때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팔이 없는 대신 영혼과 다리가 쉬고 있는 나를 그린다고 했다. 그림 그대로다. 그렇다면 앞서 본, 화면 위쪽에 그려진 모티브며 그 의미에 대해서는 다름 아닌 작가가 쉬면서 꿈꾸는 것일 수 있다. 하늘을 꿈꾸고, 떠가는 구름을 꿈꾸고, 날아가는 새를 꿈꾸고, 유년의 추억을 꿈꾸는 것일 수 있다. 

이보다 결정적인 경우로는, 쉼을 꿈꾸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쉼은 작가의 주제이기도 하다. 주제에서처럼, 작가는, 쉬고 싶다. 그래서 몸을 내려놓고 영혼마저 내려놓은, 진정하게 쉬고 있는 사람을, 작가는 그렸다. 여기서 진정한 휴식, 진정한 쉼은 모든 사람이 바라마지 않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자체가 정작 진정한 휴식도 쉼도 없는 현실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도대체 진정한 쉼이란 뭔가. 그건 어떤 상태인가 아님, 태도인가 아님, 다다라야 할 지점인가. 작가의 그림은 외관상의 친절한 답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정답보다는 질문을 던져놓고 있다. 예술은 정답보다는, 질문 때문에 예술이다. 예술은 질문의 기술이다. 이렇게 던져진 질문 때문에 작가의 작업은 비로소 예술이 될 수가 있었다. 

이 일련의 작업들과 함께, 작가는 좀 더 사사로운 내용으로 채워진, 그리고 상대적으로 그 크기가 눈에 띄는, 핸드폰을 소재로 한 단품 작품을 선보인다. <쉼_나의 애플리케이션 2015-2019>가 그것이다. 그 속에 이런저런 오브제를 넣어 투명 에폭시로 굳힌 소형 큐브 50여 개를 만든 연후에, 스마트 폰에 깔린 애플리케이션 형태로 배열하고 재구성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앱은 유저의 다양한 목적 수행성을 돕기 위해 개발된 응용 프로그램이다. 그래서 폰에 깔린 앱을 보면 대략적이긴 해도 그만의 취향이며 관심사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작가가 자신의 폰에 집합시켜놓은, 작가의 취향이며 관심사는 무엇인가. 작가의 작업은 일상적이라고 했고, 사적이라고 했다. 그런 만큼 일상을 기록하고, 추억을 되불러내는 일(기능)에 집중돼 있다. 제목 그대로 2015년에서 2019년간의 일상이고 추억일 것이다. 

그 면면들을 보면, 메모지, 색바랜 편지, 불에 탄 종이, 풍경 사진, 아마도 친구들과 함께 찍은 빛바랜 인물사진, 아마도 아이들의 이름이 적힌 사진들, 날짜가 기록된 사진필름, 배신, 열등감, 갑질, 욕설, 무시, 잡부, 그리고 다시 웃고 싶어, 라고 적힌 종이 조각, 단풍잎과 낙엽, 이름 모를 풀, 식물의 씨앗, 양철 캔 따개, 마른 멸치, 커피콩, 소주의 상표와 병뚜껑, 불에 탄 성냥, 담배꽁초, 크고 작은 나사못, 매듭진 밧줄, 그리고 기억처럼 흐릿한, 그 실체가 선뜻 손에 잡히지 않는, 불분명한 사진들이다. 
이 오브제들만 봐도 그동안 작가의 삶이 어땠는지, 그의 하루 일과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가 어떤 일에 상처를 받는지, 무엇 때문에 위로 받고 감동을 받는지 알 것 같다. 한 사람의 삶을 투명하게 엿보는 것 같은, 한 사람의 삶의 단면이 고스란히 영사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한 사람의 삶을 기록한 것이란 점에서 아카이빙 작업이고, 특정 기간 동안의 기록물이란 점에서 타임캡슐 작업이다. 그 기록은 비록 한 사람의 삶을 기록한 것이지만,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사람 사는 꼴이 어슷비슷한 탓에, 작가의 작업은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여기서 그 속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투명 에폭시는 투명한 거울 역할을 하고, 무의식의 거울, 내면의 거울을 대리한다. 

핸드폰은 사사로운 물건이다. 그 사적인 물건을 소재로 한 작가의 작업은 저마다의 내면 앞에 서게 만들고, 별 볼 일 없는 일상에서 새삼 의미 있는 순간을 발견하게 만든다. 그렇게 일상을 의미 있는 순간들의 지속으로 재정의하게 만든다. 사실을 말하자면, 별 볼 일 없는 일상은 없다. 다만 그렇게 보일 뿐, 다만 그럴 것이라고 지레짐작할 뿐. 작가의 작업은, 그렇게, 일상을 재발견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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