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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 오로라, 원형적인 기억 혹은 기억의 원형을 찾아서

고충환

박현주/ 오로라, 원형적인 기억 혹은 기억의 원형을 찾아서 



문명화 이전에 자연은 종교의 대상이었고, 숭배와 경외의 대상이었다. 범신론과 물활론,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이 그렇다. 그리고 문명화의 과정과 더불어 자연은 미신으로 치부되면서 이성의 변방으로 추방된다. 비이성적인 대상이라는 것이 그 이유인데, 이성의 언어로는 호명할 수 없는 잠정적인 상태로 자연을 내친 것이다. 그렇게 추방된 자연이 재차 소환된 것은 칸트의 숭고 개념에 의해서인데, 자연에는 인간의 감정 용량을 초과하는 무언가가 있고, 그것이 파토스(감정을 온통 흔들어놓는)를 불러일으킨다고 본 것이다. 자연의 본질 혹은 본성으로서 비이성적인, 그리고 초감정적인 대상, 그러므로 어쩜 인간의 관념으로도, 그리고 감정으로도 붙잡을 수 없는 대상, 그러므로 미증유의 대상을 인정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그 미증유의 대상성을 계승한 것이 낭만주의이고, 좀 더 최근의 경우로는 영지주의가 그렇다. 

그렇게 자연은 인간의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것, 인간의 감정이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을 포함한다. 문명화 이후 현저하게 둔감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연이 감동을 준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 잔재(자연에 대한 원초적인 기억?)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자연 중에서도 빛과 어둠, 바람과 공기, 그리고 소리처럼 그 실체가 애매한 것들, 단순히 물질로도 비물질로도 환원할 수 없는 것들, 관념적인 대상과 감각적인 대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일수록 그 기억의 고집은, 그 기억의 흔적은 더 집요하게 살아있다. 

그리고 여기에 오로라가 있다. 북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서 극광 혹은 북극광이라고도 부른다. 우리 모두 그것이 자연현상임을 안다. 그럼에도 오로라에는 왠지 그저 자연현상을 넘어서는, 자연의 본성을 엿보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북극의 밤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스펙터클 한 장관이 흡사 오색찬란한 빛 커튼이 공중에 일렁이는 것도 같고, 빛의 하프를 연주하는 천사들의 합주를 보는 것도 같고, 빛의 주름 그러므로 신(빛으로 화한 신)의 옷자락을 보는 것도 같다. 그렇게 오로라에는 모든 가능한 문학적 수사를 동원해 꿈꾸게 하고 상상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초월적인 존재를 상기시키는 뭔가가 있다. 그 자체 꿈들의 꿈, 그러므로 원초적인 기억, 그러므로 존재가 유래한 기억을 꿈꾸고 상상하게 만드는 존재론적인 계기로 봐도 좋을 것이다. 자연에 숨은 신의 현현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쩜 꿈의 아이콘, 혹은 상상의 아이콘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 박현주는 오로라를 조각한다. 오로라를 조각한다? 비록 형태며 색깔이 없지 않지만, 고정적인 형태나 색깔로 환원할 수 없는 오로라를 어떻게 조각하는가. 결국 유형화와 전형화에 기댈 수밖에. 앞서 오로라는 마치 빛의 주름이며 커튼 같다고 했다. 바로 빛의 질료를 표현하는 일이며, 주름과 커튼으로 오로라 고유의 형태를 암시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렇게 작가는 오로라를 만든다. 나무를 이용해 평면 부조 형태의 조각을 만드는데, 주름 커튼이 평면 속에 반쯤 파묻힌 것 같은, 평면이 표면 위로 주름 커튼을 밀어 올린 것 같은, 그렇게 평면과 주름 커튼이 일체화된 것 같은 정교하고 섬세한 손길이, 그리고 여기에 마치 바람을 암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부드럽고 우호적인 질감이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조각이다(참고로 작가는 전작에서 나무 대신, 석재나 스테인리스스틸, 그리고 FRP 소재를 재질로 마찬가지의 오로라며 주름 커튼을 연상시키는 형상을 조형해놓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작가는 어쩜 꽤 오랫동안 마음속에 오로라를 품었을 것이다). 

형태가 그렇다면 빛의 질료는 어떤가. 작가는 빛의 질료를 빛살로 이해하고 표현한다. 알다시피 빛살은 직진하는 성질이 있고, 이 성질은 중첩된 직선으로 표상될 수 있다. 그렇게 작가는 앞서 본 평면 부조 형식의 조형에다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조각된 직선을 중첩 시키는 것으로 오로라의 일렁이는 빛살을 표현한다. 빛살이 그렇다면 색깔은 어떤가. 주지하다시피 빛에 관한 한 형태(빛살)도 그렇지만 색깔이 결정적이다. 앞서 오로라 그러므로 빛 현상에는 색깔이 없지 않지만, 고정된 그리고 결정적인 색깔로 환원할 수는 없다고 했다. 여기서 작가는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카멜레온 도료를 도입해 마치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 같은 자기 발광성의, 미묘한, 변화무상한, 오색찬란한 빛깔을 암시한다. 이처럼 각각 빛살과 빛깔을 매개로 그 자체 비결정적인 오로라 고유의 형태와 색깔을 재현한 것이며, 여기에 마치 미풍에 일렁이는 주름 커튼 같은 빛 현상을 암시한 것이다. 

그렇게 재현된 오로라는 다른 작업에서 긴 속눈썹으로, 거대한 새의 날개로, 하늘거리며 허공에 부유하는 깃털(아마도 그 자체 오로라에서 떨어져 나온 빛의 조각으로, 빛의 편린으로 봐도 될)로 반복 변주된다. 현실과 비현실, 관념적 대상과 감각적 대상의 경계가 모호한 오로라 자체도 그렇거니와, 형상의 자유자재한 변이와 변태가 초현실주의의 자유연상기법(하나의 이미지가 또 다른 이미지를 부르는, 그리고 그렇게 세상의 모든 이미지가 하나의 원형적 이미지로부터 접속되고 파생되는 우연한 계기에 착상된)을 떠올리게 만든다. 작가는 속눈썹(그러므로 어쩜 눈)을 무한한 우주로 열린 시공간의 통로, 그러므로 어쩜 비현실로 열린 현실 속의 계기라고 봤는데, 이러한 사실의 인식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또 다른 작업(근작)에서 오로라를 조형한다. 오로라를 조형한다? 그렇담 조각과 조형은 어떻게 다른가. 편의상 조각을 단품을 제작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조형은 단품과 단품, 오브제와 오브제, 상황과 상황, 의미와 의미가 유기적으로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음악으로 치자면 합주에 해당할,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상황 논리와 관련이 깊다는 정도로 그 차이를 이해하면 되겠다. 

여기서 작가는 조각가를 넘어 공간연출가가 된다. 오로라로 나타난 자연현상을 공간설치 형식으로 옮겨놓은 것이며, 무대미술처럼 꾸며진 공간을 매개로 오로라를 추체험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앞서 살핀 것과 같은, 빛 주름과 빛살로 나타난 오로라 고유의 형식적 특징을 강조하는 것으로 공간을 연출한다. 이를테면 원목을 가공해 만든 세로로 긴 판재를 천장에 매달아 늘어트리는 방식으로 흡사 오로라의 그것과도 같은 빛의 주름 혹은 주렴을 구조화했다. 그리고 전시장 바닥에는 천장에 매달린 오로라에 조응이라도 하듯 바람에 휘어지는 갈대밭을 조성했다. 바람에 반응하는 빛의 주렴과 갈대밭을 통해 마치 자연현장 속에서 직접 오로라를 대면하고 감각하는 것 같은 극적인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크리스털과 팬플루트의 소리를 조합해 만든, 오로라의 자연현상을 소리로 번안한 음향으로 뭔가 현실 저편에 속한 것 같은, 영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각 바람과 소리, 빛과 그림자가 감각적으로 서로 조응하고 교환되는 공감각의 개념을 적용해 현실감을 더한 것이다. 

그렇게 연출된 공간설치작업이 오로라의 자연현상을 재현한 것이면서, 동시에 영적이고 명상적인 분위기로 유도하는, 내면 풍경처럼도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판재들이 어우러져 섬세한 주름을 만드는 구조가 비현실적인 음향에 조응하는 것이 흡사 거대한 현악기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오로라 자체는 비록 자연현상이지만, 왠지 현실 저편의 존재, 영적인 존재, 그러므로 어쩜 신적인 존재를 상기시키고, 그 존재로부터 발해지는 소리, 그러므로 천상의 소리, 다시 그러므로 어느 정도 내면에서 공명하는 소리(내적 울림?)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이 일련의 작업들을 작가는 시간을 정화하는 기억이라고 부른다. 다르게는 기억의 흐름, 그러므로 흐르는 기억이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주제의식으로 미루어볼 때, 기억이 핵심이다. 여기서 기억의 시제는 과거를 향한다. 그러므로 시간을 정화하는 기억이란, 사실은 삶을 정화하는 기억이며, 자신의 존재를 반추하는 기억이며, 좀 더 아득하게는 존재가 유래한 원형에 대한 기억으로서, 그 자체 자기반성적인 계기가 된다. 

그렇게 작가는 사사롭게는 유년의 기억을, 그리고 특이한 경우로서 순수기억을 되불러낸다. 순수기억? 작가에 의하면 순수기억은 흰색 공간으로 표상되고, 근원적인 심상 이미지에 해당한다. 근원적인 심상 이미지? 메를로 퐁티에 의하면 진정한 현상에 도달하기 위해 현상학적 에포케 곧 잠정적인 판단중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게 의식의 영도지점, 의식의 백지상태로 자기를 되돌려놓아야 한다. 이 논리를 작가에게 적용해 보면, 순수한 기억(아마도 기억들의 기억, 기억 자체, 그러므로 원형적인 기억)에 도달하기 위해 잠정적인 판단중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기억을 붙잡는(판단하는) 대신,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 그렇게 흘러 흘러 기억이 처음 유래한 지점, 어쩜 기억이 막 생성되기도 전의 투명한(어쩜 혼미한) 상태로 자기를 돌려세워야 한다. 이렇게 풀어놓고 보니 면벽 수행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그 경우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매개역할을 하는 것이 오로라다. 앞서 오로라는 빛살과 주름이 그 형식적 특징이라고 했다. 총총한 빛살이 흐르는 시간을 표상한다면, 오로라의 또 다른 특징인 주름 속에는 기억들이 깃들 것이다. 의미론적으로 오로라는 작가가 눈(그리고 속눈썹)에 적용한 개념규정에도 그대로 부합할 것이다. 작가에게 오로라는 말하자면 광활한 우주를 향해 열린 시공간의 통로일 수 있다. 현실에서 비현실로 건너가는 관문일 수 있다. 단순한 자연현상이 주는 감동을 넘어 존재가 유래한 기억(아마도 원초적인 우주로부터 발신된 기억?), 그러므로 원형적인 기억의 표상일 수 있다. 다시, 그러므로 진정한 자기(불교에서의 진아)의 표상, 최소한 진정한 자기를 찾아 나서는 여정(길)의 표상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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