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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지/ 도시의 전형, 도시의 유형학

고충환

최윤지/ 도시의 전형, 도시의 유형학 



길들이 이어져가는 면적은 내 몸의 면적으로 단번에 파악하기 힘든 넓이다. 누구나 길을 걸을 수 있다. 누구나가 행인으로서 나와 이 길에서 마주칠 수 있다...어딘가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서는 일은 언제나 짧은 여정이고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다. 도로에 대한 관심은 어떤 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과정이 불러일으키는 불편함(아마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는 불안과 공포, 이를테면 낯선 장소가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은),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망상적인 생각들에 반응하는 자신의 방식을 확인하고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는 행위인 것(작가 노트). 


최윤지는 길을 그리고 만든다. 여기서 길은 무슨 의미인가. 삶에 대한 비유가 여럿 있지만, 그중 가장 강력한 경우로 치자면, 길이다. 삶이란 길을 떠나는 여정인 것이고, 그 여정 곧 길 위에서 이런저런 인연과 사건에 맞닥트리는 것이고, 그 길이 끝나는 곳에서 자기 자신을 찾는 과정이다. 오죽하면 삶을 길에 비유한 장르(영화와 소설에서의 로드무비)가 따로 있다. 그러므로 길을 그리고 만든다는 것은 곧 진정한 자기(불교에서의 진아)를 찾아 나서는 과정인 것이고, 그런 만큼 자기 반성적인 행위일 수 있다. 이처럼 작가는 길을 매개로 자기 반성적인 행위를 수행한다. 여기서 길이 삶인 것은 누구에게나 그럴 것이므로, 작가의 작업은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다시, 이처럼 작가의 작업은 삶의 메타포로서의 길이라는 거대담론을 테마로 한 것이면서, 동시에 도시의 도로를 소재로 한 것이란 점에서 소위 도시회화로도 범주화된다. 현대인은 도시인이다. 더러 몸은 비록 전원에 살고 있다고 해도, 그가 도시인이라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렇게 다시, 작가는 도시의 도로를 소재로 길 그러므로 삶을 만들고(재구성하고), 도시를 그린다. 그 길 위에서 알 수 없는 누군가(혹은 미처 자신마저도 모르는 또 다른 자기)와 우연히 만나지기를 기대하면서. 그리고 두려워하면서. 


보도 만다라에서 공유공간으로. 그런데, 작가가 길을 재현하는 방식이 특이하다. 부분을 클로즈업해 보여주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먼 시점에서 좀 더 넓은 지역을 포착해 보여주기도 하는, 부감법으로 내려다본 평면도 같다. 건축설계도면 같고, 삼차원 조감도 같고, 실경 그대로 크기만 축소해 놓은 미니어처 같다. 작가의 말 대로라면, 현실 속 장소들을 자의적인 생략과 변주를 거쳐 미니어처 스케일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실제 건축재료와 이끼, 그리고 에폭시 등 화공약품을 이용해 캐스팅하고 패널에 조합해 만든 길(도면?)이 정교하고 노동집약적이다. 차도와 인도와 광장이 설계도면대로 구획돼 있고, 보도블록과 아스팔트 도로는 물론이고, 심지어 콘크리트 구조물을 화분 삼아 그 속에 심은 가로수며, 바닥 시공한 석재 사이로 웃자란 풀들마저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오롯하다. 

이처럼 길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업들을 작가는 보도 만다라라고 부르고, 나중에는 공유공간이라고 부른다. 길을 공유공간이라고 부른 것은 그렇다 치고, 보도 만다라는 무슨 의미인가. 주지하다시피 만다라는 우주를 도해한 그림을 말한다. 우주의 스케일이며 섭리를 관념으로 추상한 것이고, 그렇게 추상된 관념을 기하학적 형식을 빌려 도상화한 것이다. 우연하게도 작가가 재현해놓은 도시의 도로 역시 한눈에도 만다라에서와 같은 기하학적 패턴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도 그렇다. 형식이 그렇다면, 의미는 어떤가. 한눈에 조망하도록 조형해놓은 작가의 작업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길은 한눈에 다 들어오지는 않는다. 더욱이 처음 가는 장소나 낯선 길일 때는 더 그렇다. 여기에 좀 극적으로 말해 삶의 길은 언제나 생소한 장소를 향해 열려있고, 낯선 길로 이어진다. 

이로써 작가는 아마도 보도 만다라를 통해 삶의 길을 도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삶의 스케일이며 섭리를 관념으로 추상하고, 그렇게 추상한 관념을 만다라의 형식을 빌려 도상화하고 싶었을 것이다. 비록 소재는 외부에서 왔지만, 실제로는 이를 통해 자기 내면에 질서로 축조된 자기만의 도시, 자기만의 성소를 짓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외적인 감각 경험(매일 걷는 길)과 내면(길 그러므로 어쩜 삶에 대한 관념)이 상호작용하는 자신의 일상을 재구성하는 한편, 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청주터미널 사거리, 일산 미관광장, 샘터광장, 섬말다리 로터리, 파주 아울렛, 여의도 공원, 당산역 사거리, 그리고 일산 이마트 앞 도로며, 국회 의사당 앞 도로를 재현해놓고 있다. 지명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단번에 알 수 있고,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장소를 새삼 확인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작가의 작업은 구체적인가. 현실감이며 실제성을 획득하고 있는가라고 물어온다면, 그건 좀 회의적인 것 같다. 앞서 살폈듯이 작가의 작업은 도로 그대로 크기만 축소해 놓은 미니어처고, 설계도면에 가깝다고 했다. 그 자체가 현실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현실 그대로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여기에 작가의 작업이 갖는 특수성이 있다. 현실 그대로 같은데, 실상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에 기대어, 현실에 대한 자기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그러므로 현실(그리고 현실 인식)을 확장하기 위해 찾아낸, 작가만의 방법이고 문법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비록 작가는 알만한 장소를 특정했지만, 사실은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장소들이고 도로들이다. 근대화의 과정을 공유한 국가들이라면, 어쩜 당연하게도 도시계획도 공유할 가능성이 많고, 그런 만큼 세계적으로도 도시는 지명만 다를 뿐 어슷비슷한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그걸 설계도면으로 환원된 형태로 접할 때는 더 그렇다. 말하자면 도시계획이나 설계도면은 개별성을 상실한 체 서로 닮아가는 도시의 익명성이며 익명적인 도시를 증언해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이 자기 반성적인 경우를 넘어, 근대화의 과정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덧입는 대목으로 봐도 되겠다. 


할당공간(Tree Barrier). 가로수에 보면, 철골 구조물이 있다. 가로수를 둘러싼 구조물인데, 일부 변형 패턴이 있지만, 대개는 원형 혹은 사각형 그리고 반원형 패턴이 많다. 작가는 이 구조물들을 탁본으로 떠내거나, 도로를 소재로 한 작업에서처럼 실물 그대로 크기만 축소해 미니어처를 만들었다. 이 일련의 작업들을 작가는 할당공간이라고 부른다. 할당공간? 자연에 할당된 공간이고, 이식된 자연에 할당된 공간이다. 할당공간이라는 말에서는 왠지 제도와 관리, 강제와 감시의 혐의가 연상된다. 가로수는 원래 자연에 속한 것이지만, 인간의 욕망과 이해관계로 인해 인위적으로 양육되고 이식된 자연, 그러므로 어쩜 변질된 자연이다. 

그 연장선에서 철골 구조물 역시 표면적으론 가로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자연을 한정하는 억압의 기제로도 읽힌다. 그 자체가 꼭 제도와 개별주체와의 관계를 대변하고 있는 것도 같다. 이를테면 건전하고 건강한 시민으로 살기 위해 개별주체는 제도화와 사회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렇게 제도화된 인간, 사회화된 시민을 이식된 자연, 변질된 자연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본성을 거세당한 인간, 그러므로 변질된 인간으로 부른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할까. 작가가 조형해놓은 가로수의 철골 구조물이 이처럼 변질된 자연과 함께, 제도에 길들여진 삶을 사는 건전한 시민의 처지를 생각나게 한다. 


주운 땅. 작가는 버려진 나무 문을, 그리고 장롱 문짝을 주워와 작업한다. 그래서 주운 땅이다. 주워온 걸 주운 것이라고 하는 것이야 당연하다 하겠지만, 문제는 땅이다. 땅? 나무 문짝에 보면 장식을 위해 그리고 모양을 내기 위해 이런저런 각이 져 있고, 음각과 양각이 패턴을 이루고 있다. 작가는 그 각이며 패턴이 꼭 평탄작업한 땅이며 구획된 도로 같다고 생각한다. 평소 도로를 소재로 한 작업에 천착해온 전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발상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주워온 나무 문짝을 바탕 삼아 그 위에 자기만을 위한 길을 내고, 도시를 건축한다. 현실을 참조하고 재현해온 지금까지의 작업과는 사뭇 혹은 많이 다른 작업이고, 그러므로 작가의 다음 작업의 예고편처럼 읽히는 작업이다. 현실을 닮았지만, 사실은 현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도로며 도시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외에도 작가는 건설현장에 투입되는 각종 중장비를 그린 <아스팔트 포장 행렬도>와 같은 일련의 그림들을 통해 자기 언어를 확장하고 다변화한다. 기왕의 작업들과 사뭇 혹은 많이 다른데, 도로를 소재로 한 기왕의 작업들이 입체와 평면 부조의 형식을 취하는 것과 비교된다. 여기에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인 묘사 역시 설계도면 특유의 기하학적이고 기호적인 패턴을 보여주는 경우와 다르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도시의 전형을 재구성해 보여준다. 도로의 구조에 초점을 맞춘 도시공학에 착상된 작업으로서, 도시의 관찰자적 시점, 도시설계자의 시점이 엿보인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을 도시의 전형을 재구성해 보여주는, 일종의 도시의 유형학으로 정의하고 범주화할 수가 있을 것이다. 앞서 도로 그러므로 길은 삶의 전형적인 메타포라고 했다. 길을 소재로 한 작가의 작업은 그러므로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재구성하는, 그리고 그렇게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표현하는 작가만의 여정이고 방법으로 볼 수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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