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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진, 풍경의 상처

고충환

한상진, 풍경의 상처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원래부터 그런,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자연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인식 밖의 대상, 그러므로 대상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대상이다. 인식으로는 가닿을 수도 거머쥘 수도 없는 대상이다. 자연과 인식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연에 관한 한 인식을 위한 자리도 틈도 없다. 그렇게 자연과 인식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고,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다. 

한편으로 서양의 이성주의 시각에서 볼 때도, 자연은, 어쩜 마찬가지로, 이성의 대상이 아니다. 이성의 관점에서 자연은 신비롭고, 주술적이고, 원초적인 대상이다. 그리고(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이성으로 계몽해야 할, 계몽적인 대상이다. 능산적 자연(주어진 그대로의 자연을 의미하는 소산적 자연과 비교되는)이 그렇다. 이성으로 계몽된 자연이다. 그렇다고 자연의 본성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성도 계몽도 다 인간의 일일 뿐, 자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헤겔은 자연을 이성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플라톤이라면 이념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미학에서 배제했지만, 칸트가 숭고라는 개념으로 그렇게 추방된 자연을 구제한다. 그렇게 칸트의 숭고 개념과 더불어 자연의 처음 의미, 곧 신비롭고, 주술적이고, 원초적인 대상으로서의 자연, 이성 밖에 있는 자연, 그러므로 이성의 용량을 초과하는 자연의 의미가 다시 보존될 수 있었다. 그렇게 칸트는 숭고 개념을 매개로 낭만주의를 선취할 수가 있었다. 

이처럼 자연에는 인식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도 틈도 없다. 그러나 풍경에서라면 다르다. 내가 자연을 볼 때(시선), 자연도 나를 본다(응시). 보면서, 열고, 그 속으로 들어가, 그것의 일부가 된다. 나는 자연을 보면서, 동시에 자연을 향해 나를 열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 자연의 일부가 된다. 자연의 입장에서도 똑같이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나는 자연을 보면서 자연을 향해 열리고, 자연 역시 나를 향해 열린다. 그렇게 원래 주와 객이 분리돼 있던 것이 합일되는 일이 일어난다. 

다시, 그렇게 내가 쓸쓸하면 자연도 쓸쓸하고, 내가 아프면 자연도 아프고, 내가 아득하면 자연도 아득하고, 내가 먹먹하면 자연도 먹먹해진다. 그렇게 쓸쓸한, 아픈, 아득한, 먹먹해진 자연이 풍경이다. 여기서 쓸쓸한, 아픈, 아득한, 먹먹한 것은 나에게서 자연 쪽으로 건너간 것이고, 원래 나에게 속한 것이다. 어쩜 자연이 나의 잠재력을 일깨운 것일 수도 있겠다. 자연과 대면하면서 비로소 일어난 일이고, 자연과의 대면이 없다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다. 그렇게 내가 투사된 자연이 풍경이다. 내가 들어서 자연을 풍경으로 변질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풍경에는 자연에는 없는 것이 있다. 주체와 객체가 상호작용하는 긴박한 드라마가 있다. 


이처럼 자연이 열어놓는 풍경에 내가 참여하기 위해선, 그렇게 자연을 향유하기 위해선 내 쪽에서 자연으로 건너가는 무엇, 나를 향해 자연을 열어놓을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중개 혹은 중재를 말하는 것인데, 감정적인 도구며 개념적인 도구가 그것이다. 그게 뭔가. 작가의 경우에는 무경계, 스침, 소요, 그리고 흐르는 풍경이 그것이다. 작가가 자연을 볼 때, 자연을 보면서 자연을 풍경으로 변질시킬 때, 그렇게 자연이 열어놓는 풍경에 동참할 때 작가가 사용하는 도구다. 그 자체 작가의 그림을 뒷받침하는 주제이기도 하고, 평소 자연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를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이기도 하다. 작가의 작업은 형식적으로 페인팅과 드로잉, 목판화와 설치작업을 아우른다. 여기서 작가는 소요, 그리고 흐르는 풍경을 페인팅을 위한 주제로, 그리고 스침을 드로잉을 위한 주제로서 부과한다. 그리고 이 주제들을 아우르는 큰 주제 혹은 전제로서 무경계를 부여한다. 외관상 이와 같은 개념 구도를 취하고는 있지만, 사실상 그 이면에서 주제 간 상호보완적이고 대리 보충적인 의미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경우로, 서로 가변적이고 호환 가능한 경우로 보인다. 

여기서 다시, 작가는 페인팅을 소요, 그리고 흐르는 풍경이라고 부른다. 소요란 하릴없이 거니는 것을 말한다. 목적의식 없이 어슬렁거리는 것을 말한다(주지하다시피 무목적성은 칸트의 미학에서 결정적이다). 의식마저 지워진 상태의 자기를 투기하는 것을 말한다. 어디에 무엇을 투기하는가. 비워진 자기, 열린 자기를 풍경 속에 던지는 것이다. 그렇게 열린 풍경과 열린 자기가 소통하면서 스스로 풍경의 몸이 되고, 몸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메를로 퐁티는 주체와 객체 사이엔 우주적 살로 채워져 있어서, 원래는 주체와 객체로 구분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렇게 내가 이미 풍경이다. 우주적 살이고 몸이다. 그러므로 풍경을 그리는 것은 곧 내가 연장된 몸을 그리고, 나를 그리는 것이다. 

작가는 산 그러므로 풍경을 상처와 파편이라고 본다. 혹은 풍경에서 상처와 파편을 본다. 여기서 풍경 자체가 상처고 파편일 리가 없다. 그러므로 상처와 파편은 결국 풍경에 투사된 작가의 몫이다. 다름 아닌 작가 자신의 징후고 증상이다. 그렇게 투사된, 혹은 보아낸 상처란 뭔가. 연민이다. 작가는 연민하는 마음으로 풍경을 맞아들인다. 파편은 또한 어떤가. 의미의 부스러기다. 산은, 풍경은, 존재는 어떤 의미로 결정되지도 정의되지도 않는다. 그저 거기에 그렇게 있을 뿐. 의미의 부스러기들로 겨우 얼버무릴 수 있을 뿐. 작가는 지시성이 강해질수록 언어는 이데올로기가 된다고 했는데, 아마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것들, 의미화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것들, 의미화했을 때 오히려 그 의미가 왜곡되고 훼손되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더러 그런 것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쩜 인식 밖에, 이성 밖에, 의식 밖에서 보면 존재 자체가 온통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흐르는 풍경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풍경은 흐른다. 흐르는 것을, 항상적으로 이행 중인 것을 어떻게 의미로 결정화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의미로 결정화하는 데 실패한, 작가의 그림은 대개 청회색조의 희뿌연 기운이 감도는 모노톤으로 그려진다. 어둠이 내려앉기 직전의 어스름할 즈음에, 그리고 새벽녘에 본 풍경이라고 했다. 보통 모노톤의 색채 감정이 관념적이라고 하지만, 작가의 경우에는 이보다는 감각적으로 와닿는다. 작가는 풍경 그러므로 몸의 피부를 그린다고 했는데, 대기와 접촉되는 몸의 최전선을 표현하기에 어울리는 경우라고 생각된다. 그 구조(붓질의 결)를 보면 헐렁한데, 말 뒷다리 털로 만든 붓이며 양털로 만든 붓으로 그린 것이라고 했다. 비결정적인 것들, 의미화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것들, 의미의 부스러기로 겨우 얼버무릴 수 있는 것들, 숭숭 뚫린 구멍 사이로 의미가 새나가는 것들을 포섭하기에 적절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산에 기대어, 상처와 파편으로 나타난 자신의 징후와 증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풍경에 의지해, 의미화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것들, 흐르는 것들, 이행하는 것들을 포섭하고 있었다. 

그리고 작가는 드로잉을 스침이라고 부른다. 구조로 치자면 회화보다 더 성글다. 그 성근 구조가 스침이라는 주제를 더 실감 나게 지지해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모든 존재는, 현상은, 심지어 의식마저 흐른다. 스친다. 지나간다. 머무르지 않는다. 그렇게 의미화되지 않은 것들, 결정화할 수 없는 것들, 머무르지 않는 것들의 흔적을 포섭하는 것이 그림의 일이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지속을 순간으로 한정하는 것이 그림의 한계다. 결국 암시를 공략할 수밖에. 그렇게 예술은, 특히 회화는 암시의 기술이다. 그린다는 것은 의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미화로 뻣뻣해진 것들을 풀어헤쳐 구제하는 행위다. 의미화되기 이전의 처음 상태로 되돌려놓는 행위다. 의미화 이전의 존재를, 세계를 추상하는 행위다. 헐거운 구조로 짜인, 그리다 만듯한 드로잉이 그 상태, 그 행위를 예시해준다. 그리고 목판의 경우, 칼은 붓보다는 결정적이다. 그래서 스친다는, 흐른다는, 이행한다는 상황 논리를, 존재의 습성을, 대기 현상을 재현하기에 역부족이지만, 그 대신 풍경의 상처 그러므로 몸의 상처를 즉물적으로 표현하기에 적절한(어쩜 적확한) 부분이 있다.
 
그리고 작가는 아마도 작업실 주변에서 눈에 밟혔을 이런저런 생활 오브제로 설치작업을 재구성해 보인다. 칡뿌리, 조약돌, 아마도 간판에서 떨어져 나왔을 새라는 글자, 녹슨 부삽, 낫, 갈퀴, 쇠스랑, 붓, 빗물이 고여있는 유리잔, 유리병, 하얗게 표백된 새 머리뼈, 표백된 나무뿌리, 플라스틱 용기, 캔 뚜껑, 철망 거치대, 뼈대만 남은 우산대, 붓 다발, 원형의 기계 톱날, 표면에 구멍이 뚫린, 새집에서 떨어져 나온 부분들이다. 

이 오브제들은 이미 반쯤 예술이다. 자연이 만든 예술이고, 시간이 만들어준 예술이다. 원래 속해져 있었을 기능과 자기 목적성을 상실한 것들(그래서 소요의 정신상태에 더 가까워진 것들), 그러므로 오히려 처음으로 진정 자기 자신을 되찾게 된 것들, 그렇게 전혀 다른 표정과 몸짓을 얻게 된 것들이 거기에 그렇게 있다. 마치 스스로 그러한, 처음부터 그랬던 자연이 그런 것처럼, 혹은 그 자체 또 다른 자연인 양 거기에 그렇게 있다. 앞서 예술은 의미화의 과정이기는커녕 오히려 의미화로 결정화된(이 경우에는 기능과 자기 목적성을 덧입은) 것들을 탈구시켜 처음 상태(존재 자체 상태)를 되돌려주는 행위, 처음 상태를 추상하는 행위일 수 있다고 했다. 만약 예술을 그렇게 정의할 수 있다면, 이 오브제들이야말로 그 자체로 이미 예술을 실현해놓고 있는 경우로 봐도 무방하겠다. 
그렇게 작가는 각 페인팅과 드로잉, 목판화와 오브제를 매개로 소요와 흐르는 풍경, 스침, 그리고 무경계의 주제의식을 풀어놓고 있었다. 어쩜 자연과 풍경, 삶과 존재를 맞아들이는 평소 태도와 입장을 예시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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