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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선아/ 숨기 혹은 흉내 내기, 추상미술을 사용하는 방법

고충환

허선아/ 숨기 혹은 흉내 내기, 추상미술을 사용하는 방법 

고충환 미술평론가

균형 잡힌 형태에서 사람들은 보통 안정감을 느끼지만,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균형 잡힌 형태보다는 기우뚱한 균형, 기울어진 균형과 같은 자체 내에 일정한 유격을 포함하고 있는 불안정한 균형에서 오히려 생명감을 느낀다. 스위스의 미술사가 하인리히 뵐플린이 르네상스와 바로크미술을 비교하면서 예로 든 양식사적 특징이기도 하다. 니체가 개념화한 아폴론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에서 예시된 질서와 혼돈 역시 그 경우가 다르지 않다. 질서 잡힌 형태로 안정감을 줄 것인가, 아니면 혼돈 곧 역동적이고 해체 지향적인 형태로 생명력을 불러일으킬 것인가. 어쩌면 양식사를 떠나서 빈 화면과 대면하고 있는 모든 화가들에게 주어진 과제일 수도 있겠다.  

다르게는 게슈탈트 이론 곧 형태지각심리학이 그렇고, 여기에 점, 선, 면, 색채, 양감, 질감과 같은 형식적인 요소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회화라고 보는, 그러므로 의미론적으로 텅 빈 캔버스를 지향하는 모더니즘적 환원주의 역시 그 경우가 다르지 않다. 추상미술을 이론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경우들인데, 한편으로 추상에 대한 사뭇 혹은 많이 다른 입장도 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그 자체 추상이기만 한 추상, 그러므로 그 자체로 뭔가를 의미하거나 암시하지 않는 추상은 무의미하다고 했다. 추상도 구상처럼 뭔가를 의미하거나 암시한다는 말이다. 추상도 구상처럼 말을 한다는 말이다. 의미에 연동되는지 여하에 따라서 이처럼 추상미술에 대한 두 입장이 나뉜다. 

작가 허선아의 회화는 추상미술에 대한 이 두 입장 중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깝고, 그러므로 모더니즘적 환원주의보다는 의미론적인 추상에 속한다. 작가 스스로도 자신의 그림을 추상미술이라고 일컫기도 하거니와, 추상미술을 의미론적으로 재구성한 그림, 혹은 마찬가지 말이지만 의미의 조각들을 재구성한 추상미술로 작가의 회화를 정의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의 조각들을 그림 속에 재구성해놓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순서이고, 그러므로 어떤 주제의식을 부각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 관건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추상미술의 형태로 각색되고 재구성된 것이란 점을 제하고 보면, 작가의 그림은 설핏 숲(내면의 메타포?) 같고, 때로 건축(또 다른 내면의 메타포?) 같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무슨 칸이라도 지른 듯 세로로 길게 전개된 그림의 구조(이를테면 나무 혹은 기둥을 연상시키는 형태) 때문일 것이다. 그 숲속에는 알만한, 때로 알 수 없는 꽃들이 피고, 나뭇잎들이 자란다. 더러 물웅덩이 속 물고기도 보이고, 나비가 날아오른다. 추상적인 반복 패턴이 파충류가 벗어놓은 허물 같기도 하다. 

이런 형태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하나같이 다만 00처럼 보일 뿐, 분명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이 질 들뢰즈의 00되기를 떠올리게 만든다. 알만한 것, 전형적인 것을 흉내 내기다. 의태다. 들뢰즈에게 흉내 내기는 알만한, 전형적인(롤랑 바르트라면 독사 doxa 그러므로 부르주아 고유의 언어 용법이라고 했을) 것을 매개로 제도의 선입견을 재확인하고 안심시키는 척하기다. 그러므로 사실은 제도를 속이는, 다시 그러므로 알고 보면 제도에 반하는 실천 논리에 해당한다. 

제도를 속인다? 그렇다면 제도의 무엇을, 왜, 어떻게 속이는가. 주지하다시피 언어는 가치를 전달하고, 때로 가치를 창출하기조차 하는 도구다(그림도, 이미지도 언어다). 그 언어로 구조화된 가치의 지점들, 이를테면 관습과 풍습, 합리와 상식과 같은 이성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가치론적 지점들, 그러므로 제도의 기제들이 알고 보면 억압의 기제일 수 있음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흉내 내기에는 한편으로 제도를 속이면서, 다르게는 제도가 방심한 틈을 통해 제도의 억압적인 기제를 폭로하고 전복한다는 전략적 수행성이 있다. 

그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 의태 곧 흉내 내기인데, 작가의 그림에는 자연소재와 함께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다른 소재들이 보인다. 눈 같은, 눈동자 같은, 날카로운 손톱을 송곳처럼 세우고 있는 손가락 같은, 긴 손 눈썹 같은, 그리고 여기에 아몬드형의 유기적인 형태가 그렇다. 열거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신체의, 특히 여성 신체의 부분 이미지들이다. 작가는 이 이미지 중 상당 부분이 나방의 날개에 새겨진 패턴과 문양 같은 의태 이미지에 착상된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특히 눈과 눈동자 그리고 아몬드형의 유기적인 형태가 그럴 것이다. 

원래 의태란 더 잘 숨기 위해 그리고 더 잘 숨기기 위해 주변 환경을 흉내 내는 것이며, 주변 환경에 자기를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뭘, 왜 숨기는가. 자연을 가장한 추상 형식 속에 여성 신체의 부분 이미지를 숨긴다. 여기서 숨기 혹은 숨기기는 이중적이고 양가적인데, 더 잘 숨기(숨기기) 위해서 드러내는 것이며, 드러내면서 숨는(숨기는) 것이다. 예컨대 손톱을 송곳처럼 세우고 있는 손가락은 여성성의 전형에 해당할 만한 소재로서, 유혹하면서 동시에 자기를 방어하는 것이 그렇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들을 여성 신체의 의태 이미지로 본다면, 아몬드형의 유기적인 형태는 여성의 성기를 도상화한 형태일 수 있다. 여성의 성기를 도상화한? 실제로도 여성 성기의 도상학은 여성성의 강력한 표상형식에 해당하는, 본질주의 페미니즘의 핵심전략에 속한다. 예컨대 꽃잎과 여성의 성기 이미지를 하나로 결합한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 이후, 숱한 다른 변주된 형식들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은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주제화한 그림인가. 그러므로 여성주의 회화인가. 추상미술 자체가 가변적이라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주제만 놓고 보자면 그렇다.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자연을 가장한 추상미술 속에 여성 신체의 의태 이미지를 숨기는(숨기면서 드러내고, 드러내면서 숨기는) 과정과 방법을 통해서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강조하고 주제화한 그림이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추상미술은 남성 주체 중심의 가부장적 가치관을 반영한 회화로 알려져 있는데(이를테면 추상미술을 성적 정체성 논의로부터 자유로운 성적 중립지대로 보는 것이 그렇고, 이로써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무성적인 것으로 재정의하는 것이 그렇다), 이렇듯 남성 주체 중심의 회화 형식, 최소한 성적인 관점에서 가치 중립적인 회화 형식 속에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숨겨놓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침투? 가장? 내파?).  

작가는 여성의 성적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형상화하고 구체화하기 위해 기생이라는 전통적인 인격 대상을 소환한다.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억압적인 경우로 전제하는 한편, 이처럼 억압적인 정체성을 기생이라는 사회적인, 제도적인, 그리고 가부장적인 인격 대상이 구현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기생은 남성 주체의 대화상대를 위해, 오락을 위해, 성적 서비스를 위해 교육받은 고급 매춘부를 의미하며, 단순한 전통의 유물이라기보다는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면서 현재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작가는 본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이 기생을 추상화한(그러므로 숨겨놓고 있는) 그림으로 전제하고 보면, 전통적인 치마저고리의 부분 이미지가 보이는 것도 같고, 신체 중 가슴 이미지가 보이는 것도 같고, 하이힐의 추상화된 형태가 보이는 것도 같다. 

그런가 하면 작가의 작업에는 다양한 실크 천 조각을 박음질해 콜라주 한, 일련의 직물 드로잉도 있다. 페인팅과 비교해 볼 때 여성의 몸매며 신체적 특징이 더 잘 드러나 보이는 작업이다. 페인팅과 마찬가지로 추상화돼 있지만, 페인팅이 자연의 의태 이미지와 유사 신체 이미지가 추상회화와 결합 된 암시적이고 해체적인 경우라면, 드로잉에서는 체형 자체의 구조화에 집중되고 있는 점이 다르다. 그렇게 드러난 형태가 코르셋을 닮았는데, 억압적인 성적 정체성을 체형으로, 그리고 의복으로 구현한 경우라고 생각된다. 여기에 페인팅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질을 연상시키는 추상화된 형태도 보이고, 이중성이며 양가성으로 나타난 무의식 혹은 내면의 초상을 엿보게 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작가는 일련의 페인팅을 통해서, 그리고 직물 드로잉을 통해서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주제화한다. 작가가 보기에 여성의 성적 정체성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억압적인 것이란 점에서 달라진 부분이 없다. 작가의 그림은 어쩌면 이런 억압적인 존재(굳이 여성 주체가 아니라도)가 자기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자기를 보존하기도 하는 양가성을, 어쩌면 이율배반적인 상황 논리를 그려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숨기(숨기기)와 흉내 내기, 그러므로 그림으로 치자면 자연환경에, 실제의 경우로 보자면 사회환경에 자기를 일치시키기, 다시 그러므로 사회환경에 일치된 척하기가 전략적 방법론으로 소환된다. 그리고 그렇게 더 잘 숨고 숨기는 방법을 추상미술에서 찾아낸 것이며, 이로써 추상미술을 사용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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