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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내 속에 초인이 살고 있다

고충환

박진영, 내 속에 초인이 살고 있다 

고충환 미술평론가

여기에 무표정한 사람들이 있다. 자기 생각, 어쩜 자기 연민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중 누구도 될 수 있는, 우리 중 누구여도 무방할, 그러므로 어쩜 우리 자신일 수도 있을 사람들이다. 익명적인 사람들이고, 우리 보통 사람들이다. 저마다는 개별적인 존재들이지만, 그 개별주체들이 익명성을 덧입으면서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 익명적인 보통 사람들을 작가는 초인이라 부르고 영웅이라 칭한다. 

보통 초인이란 인간을 초월한 존재, 인간을 넘어선 존재, 반신적인 존재를 일컫는 것이지만, 작가는 저마다 주어진 운명을 감내하며 묵묵하게 자기 삶을 사는 보통 사람들이 이미 초인이라고 보고, 또 다른 의미에서의 영웅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초인을 주제로 한 작가의 그림은 어쩜 우리 보통 사람들의 별 볼 일 없는 삶에 기념비적인 성격을 부여해 경의(오마주)를 표하기 위한 것이며, 알고 보면 별 볼 일 없는 삶은 없다고 말하고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부여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다르다. 현실적으로 우리 보통 사람들은 초인이 아니다. 이런 현실 인식과 작가의 의미부여 사이, 현실과 이상 사이에 균열이 일어나고, 그 틈으로부터 불안과 비극이 그리고 부조리가 유래한다. 비록 현실은 비루할지라도 머리로는 이상을 좇는 존재, 현실과 이상과의 거리를 인식하는 존재, 그러므로 이율배반적인 존재가 내재화한 이중분열과 다중인격이야말로 보편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어쩜 한계)이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들의 삶에 경의를 표하는 작가의 그림은 역설적으로 그가 처한 삶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다. 

작가의 그림에는 가면을 쓴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이런, 삶의 존재론적 조건으로서의 이중성과 양가성을 주제화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를테면 주체는 자기 정체성에 해당하는 아이덴티티와, 사회적 주체 혹은 제도적 주체를 의미하는 페르소나(어원적으로 가면을 의미하는)로 분열된다. 가면을 쓴 사람은, 바로 그런, 가면 뒤에 숨은 주체, 분열된 주체를 증언하고있는 것이다. 

형식적으로 작가의 그림은 표현주의적인데, 주제의식과 형식이 서로 부합하고 합치되는 면이 있다. 표현이란 원래 속에 있던 것이 바깥으로 표출되는 것, 그렇게 잠정적인 것이 비로소 자기표현을 얻는 것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표현주의는 유독 주체의 세계감정이 있는 그대로, 날 것 상태 그대로 분출되는 경향이 있다. 작가의 그림은 그 경향성이 강하다. 그렇다면 그 경향성의 회화를 매개로 비로소 자기표현을 얻게 된 작가의 세계감정이란 무엇인가. 바로 초인과 보통 사람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균열을 앓는 존재, 그 균열에서 비롯한 불안과 비극과 부조리와 같은, 어쩜 보편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을 내재화한 존재, 그러므로 분열적인 존재 감정이 그것이다. 

실제 그림을 보면, 일부 색채가 없지 않지만 대개 흑백의 모노 톤이, 회색 조의 절제된 색채 감정이 내면적이고 관념적인 느낌을 준다. 액션페인팅을 연상시키는 격렬한 붓질이 내면에 응축된 파토스의 거칠 것 없는 분출을 상기시키고, 마구 흘러내리는, 그렇게 흘러내리다 맺힌 안료 자국이 비정형의 얼룩을 만들어내는 것이 저마다 초인을 내재화한 사람들(그러므로 어쩜 잠재적인 초인들)이 방출하는 생명력과 무분별한 에너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초인과 보통 사람 사이, 현실과 이상 사이의 균열과 차이에서 파생된 존재론적 조건을 체화한, 불안과 비극과 부조리로 육화된 세계감정을 보는 것 같고, 그 세계감정을 덧입은 인간군상을 보는 것 같다. 바로 지금 여기, 실존적 자의식을 앓는 현대인의 초상을 보는 것도 같다. 그렇게 작가는 비록 보통 사람들의 삶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지만, 그 과정에서 부지불식간 현대인의 실존적 자의식을 표출시킨다. 그 자체가 어쩜 숨은 주제 혹은 진정한 주제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초인과 보통 사람 사이에서 흔들리는 실존적 인간을 그리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부유하는 분열적 주체를 그린다. 그러므로 어쩜 현대인의 징후적이고 증상적인 초상을 그린다. 각 독립상과 군상으로 나타난 그들은 저마다 일상을 사는 모습인데, 지하철에 앉아있거나, 놀이에 열중하거나, 손에 풍선을 쥐고 있다. 특이한 건 무표정한 얼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놀이와 풍선에 걸맞는 유쾌한 기분이며 상황 논리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놀이에도 불구하고 왠지 진지해 보이고, 보기에 따라선 우울해 보이기조차 한다. 차라리 내면적으로 보인다고 해야 할까. 

그림에서 사람들이 손에 쥐고 있는 풍선은 욕망과 희망을 상징하고, 불안과 행복을 표상한다. 비록 풍선은 아름답지만 언제 터질지 모른다. 알량한 행복 역시 언제든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언제나 가지지 못한 것을 욕망하고, 오지도 않은 미래를 희망한다. 그러므로 욕망도 희망도 알고 보면 결여와 결핍으로 나타난 현실의 민낯, 자크 라캉이라면 실재계의 예기치 못한 출현이라고 했을 현실의 궁극을 증명해 보일 뿐이다. 다시,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다. 

저마다 놀이에 열심인 사람들은 어떤가. 여기서 작가는 아마도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유년의 기억을 소환한다. 종이로 학을, 비행기를, 개구리를, 바람개비를 만드는 종이접기 놀이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왜 유년의 기억을 소환하는가.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아이 곧 어른아이(키덜트)를 풍자한 것인가. 어느 정도 그럴 것이다. 우리 보통 사람들 속에는 현실을 감당하는 사람과 함께 잠재적인 초인이, 그리고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 현실에 저당 잡힌 삶으로부터 순간적이지만 일탈을 꿈꾸기 위해 그 잠재적인 아이를 호출하는 것. 현실보상심리다. 프루스트효과다. 스스로 위로받고 싶은 자기 위안이고 자기연민이다. 

한편으로 여기서 놀이를 창조적인 노동의 한 경우로 본다면, 그 자체 예술의 메타포로 볼 수도 있겠다. 실제로도 작가는 놀이에 열중인 사람들과 함께 춤추는 사람을, 허공에 그림 그리는 사람을 그려놓고 있다. 아마도 예술과 창조적인 삶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혼자서 가위바위보 놀이를 놀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아마도 혼자 노는 것이거나(실제로도 많은 사람들이 혼자 논다), 스스로 운을 시험해 보는 것일 터이다. 

좀 더 암시적인 놀이, 거창하게 말해 존재론적인 놀이도 있다. 벽돌로 벽을 쌓고 있는 사람이 그렇다. 놀이보다는 노동에 가까운, 그가 쌓는 벽으로 인해 그는 자신이 쌓은 벽 속에 갇히면서 동시에 벽 밖에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런저런 벽을 쌓으면서 산다. 스스로 가두는 벽을 쌓는 사람도 있고, 창조적인 벽(세계를 건축하는 벽)을 쌓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 눈에 안대를 쓴 사람도 있다. 그는 맹목을 상징하며, 동시에 감각적인 것 너머를 보는 능력 곧 혜안을 상징한다. 다시, 삶의 이중성과 양가성을 증언하는 알레고리로 봐도 되겠다. 그렇게 나는 벽을 쌓으면서 스스로 가둘 수도 세상을 창조할 수도 있다. 현실을 외면할 수도 현실 너머를 꿰뚫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웅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손에 화분을 들고 있는 사람이 그렇고, 동식물과 함께 가족사진이라도 찍는 것 같은 포즈를 보여주고 있는 군상이 그렇다. 좀 비장하게 말하자면, 현대인은 자연을 상실했다. 이식된 자연, 재단된 자연, 인공자연이 상실한 자연을 대신하고 있고, 이제 자연 자체 혹은 진정한 자연은 없다. 

작가는 그렇게 현대인이 상실한 자연을 호출하는데, 특히 작가가 <수풀 초인>으로 명명한 설치작업이 인상적이다. 건물 옥상에 돌출된 콘크리트 구조물을 이용한 설치작업인데, 그 구조물 안쪽 바닥에다 화단을 조성했다. 그리고 그 위에 철골 구조물로 사람 형상을 만들어 배치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화단에는 수풀이 무성해지고, 그중 웃자란 수풀이 사람 형상의 철골 구조물을 덮어서 가리고, 종래에는 말라 죽으면서 구조물과 일체를 이룬다. 모르긴 해도 겨우내 죽은 것 같은 자연은 내년 봄에 다시 소생할 것이다. 이로써 인간도 결국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과 함께, 생사 순환을 무한 반복하는 자연의 위대한 생명력을 일깨워준 경우라고 생각된다. 초인을 통해 보통 사람들의 삶에 경의를 표했던 것처럼, 인간을 넘어 자연에로까지 그 오마주의 대상을 확대 적용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앞서 초인의 일반적 의미, 그러므로 사전적 의미는 인간을 초월한 존재, 인간을 넘어선 존재, 반신적인 존재를 일컫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초인이 철학적 의미를 얻게 된 니체에게서 초인은 반신적인 존재보다는 오히려 자연인에 가깝다. 인간이 만든 것 일체를 넘어선 존재, 혹은 그 바깥에 존재하는 존재를 의미했다. 말하자면 사회와 제도, 도덕과 윤리, 이성과 정의를 넘어선 존재, 그러므로 어쩜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존재, 그리고 여기에 심지어 선악의 기준마저 넘어선 존재를 의미했으니, 가히 자연인이랄 만 하다. 작가는 보통 사람들을 초인이라고 불렀다. 보통 사람들의 삶에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더불어 보통 사람들에 잠재된 자연인을 일깨워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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