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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열, 회색 도시의 사람들

고충환


오상열, 회색 도시의 사람들 

고충환 미술평론가


남미의 환상주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야기하기 위해 산다고 했다. 굳이 이야기꾼이 아니어도, 삶은 한 편의 이야기를 사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서사의 기술일 수 있다. 어떤 식으로든 예술은 삶을 반영하고, 삶은 이야기 곧 서사를 생산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삶을 소설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그 경우가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그렇게 저만의 이야기,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산다. 그 이야기는 비록 저마다 저만의 이야기지만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유별난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 사는 모양새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작가 오상열은 그렇게 유별날 것 없는 사람들, 소시민들, 그러므로 어쩜 우리 보통사람들의 삶을 그리고, 일상을 그리고, 사연을 그린다. 굳이 현실참여가 아니어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삶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주의 미학에 견인되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한 시대를 살아낸 소시민들의 일상적인 모습 그대로를 그림 속에 축도해 놓고 있다는 점에서는 당대적인 시대 회화 혹은 생활 풍속도를 예시해준다. 여기에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품고 사는 사연이란 것이 대개는 우리 보통사람들이 그렇듯 상대방에 가닿지 못한 채 저 홀로 삼킨 것이란 점에서 공감을 자아내고 연민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도 덧붙이고 싶다. 
개인적으로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가 여럿 있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가 연민이라고 생각한다. 연민, 어쩜 타자의 삶의 방식에 대한 이해,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공감 능력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 작가의 그림에는 이처럼 타자에 대한 연민이 있고, 존재에 대한 공감이 있다. 그래서 감동을 준다. 


그렇게 작가는 일상을 그린다.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 지하철로 이동 중인 사람들, 학원으로 직장으로 저마다 갈 길이 바쁜 사람들, 스마트폰에 열중인 사람들, 뭔가를 구경하는 사람들, 건물 옥상에서 기지개 켜는 사람들,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로또 가게 앞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 어둑한 사무실 복도를 지나치는 사람들, 저 홀로 사무실에 남아 미처 끝내지 못한 업무를 마무리하는 사람들, 가게 앞에서 저만의 생각에 골똘한 사람들,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 개를 끌고 밤 산책을 나온 사람들, 희뿌연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귀가하는 사람들이다. 그 중엔 샐러리맨도 있고 아파트 주민도 있다. 학생들도 있고 취준생도 있다. 나도 있고 너도 있다.     

그림이라서 직접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하는 머릿속 생각이나 혼잣말이 들리는 것 같다. 가게 문을 닫아야 하나,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재개발이 된다는데, 월세 올려달라는데, 올해도 못내려 오려나, 일이 언제 끝나지, 어디로 가지(좀 극적으로 말해 현대인은 정체성을 상실하고 방향성을 상실했다. 그렇게 현대인은 어쩌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판단 불능증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는 것과 같은 맥빠지는 생각도 있고, 지난 일은 잊어버리세요,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세요,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겁니다, 하는 것과 같은 격려 하는 아니면 차라리 자위하는 말이 들리는 것도 같다. 
작가가 친절하게 제목으로 풀어놓은 것도 있지만, 굳이 제목이 아니어도 저만의 생각이 읽히는 것 같고 속말이 들리는 것 같다. 문학적이다. 서사적이다. 그리고 일상적이다.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서사를 매개로 일상을, 그리고 현실을 재구성한 것이다. 그렇게 재구성된 일상이 현실적이고, 존재론적(아니면 차라리 실존적)이다. 현실을 반영하면서, 때로 현실을 넘어 존재론적인 문제를 건드린다(특히 어디로 가는지 자문하는 것에서). 


작가의 그림에는 유독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어둑한 사무실 복도를 지나치는 사람이 그렇고, 저 홀로 남겨진 사무실에서 미처 끝내지 못한 일에 골몰한 사람이 그렇고, 가게 앞이나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이거나 저만의 생각에 빠져있는 사람이 그렇고, 희뿌연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귀가하는 사람이 그렇다. 왠지 그 모습이 세상에 저 홀로 던져진 듯 쓸쓸해 보이고, 존재라는 짐이라도 짊어진 양 무거워 보인다. 

미셀 투르니에는 뒷모습이 앞모습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더 진실하다고도 했다. 여기서 앞모습은 얼굴이다. 그리고 얼굴은 가면(페르소나)이다. 그래서 얼굴은 때로 사람들을 속이고, 더러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좀 극적으로 말해 얼굴은 거짓과 위선이 상연되는 극장이다. 이에 반해 뒷모습은 사람들을 속이지도 않고 속일 수도 없다. 어쩌면 가면(그러므로 얼굴)에 가려진 진정한 자기(아이덴티티)가 그대로 드러나고야 마는 불가항력적인 장소다. 
작가는 그렇게 바쁜 일상과 치열한 현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내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사실은 다만 아무렇지도 않게 보일 뿐인, 그래서 결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아닌 현실 감정을 예시해준다. 어쩌면 전면 그러므로 얼굴을 통해서라면 불가능했었을 현실이고 감정이다. 


그 사람들이 저마다 처해있는 현실이, 어쩌면 그 현실을 재현해놓고 있는 작가의 그림이 마치 연극무대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대개 연극 무대에서는 주인공을 강조하기 위해, 그리고 극적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 조명장치를 사용한다. 보통은 국부조명(스포트라이트)을 통해 빛과 어둠을 대비시키는데, 동시에 선과 악, 현실과 비현실과 같은 관념적 현실을 대비시킨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이런 상징적 의미와 함께 주인공이 처한 현실 혹은 상황 논리를 강조하는(이를테면 일종의 상황극과 같은) 효과를 수행한다. 작가의 그림에서 보면 희뿌연 가로등 불빛이 귀가하는 사람의 뒷모습을 더 쓸쓸하고 무겁게 보이게 만드는 것이 그렇다. 가게 앞에 앉아서 저만의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의 경우에 가게의 불빛이 주변의 어둠과 대비되면서 극적 효과를 강조하는 것이 그렇다. 불빛(조명)을 매개로 그의 걱정과 번민에 공감하게 만들고, 그의 불안과 고독에 동조하게 만든다. 회색 도시에 감 싸인 채 저 홀로 불 밝히고 있는 사무실 불빛이 실제보다 더 공허해 보이는 것도 이런 조명효과에 따른 것이다. 

색채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작가는 일상이 전개되는 무대에 해당하는 도시를 회색으로 그린다. 한편으로 빛과 어둠을 대비시키고, 다르게는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무채색과 마치 국부조명에서처럼 부분적으로만 적용된 컬러를 대비시켜 극적 효과를 강조하고, 심리적인 효과를 배가시킨다. 그렇게 비정한 도시, 삭막한 도시 속을 떠도는 외로운 섬처럼 고독한 사람들을 그려놓고 있다. 
다시, 색채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색채 감정은 작가의 그림에서 결정적이다. 벚꽃과 목련이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날들> 시리즈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 않지만, 색채에 대한 작가의 감정은 대개 절제된 것이다. 그런 만큼 작가의 지배적인 색채 감정은 무채색이고 회색이다. 실제로도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대부분의 그림이 잿빛 풍경이고, 그대로 작가가 그림을 위한 배경으로 설정해놓고 있는 도시에 대한 생활감정으로 보면 되겠다. 그러므로 사실상 도시인에 대한, 현대인에 대한, 일상인에 대한 생활감정을 회색으로 재현해놓고 있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회색으로 나타난 잿빛 풍경은 작가가 세계를 보는 감정 곧 세계 감정이다. 그 감정의 프리즘에 비친 삭막한, 비정한, 쓸쓸한, 고독한, 때로 흑백영화에서처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도시를, 현대를, 일상을 그려놓고 있는 그림이 연민과 공감을 자아낸다.
 

이와 함께 작가의 그림에서 동시대적인 문화 풍속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일종의 광장 개념이 발견되는 것도 흥미롭다. 여기서 광장은 단순한 장소 개념으로서보다는 현대인의 징후와 증상을 대변해주는 일종의 문화적 현상(그러므로 어쩌면 문화적 아이콘)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저마다 스마트폰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그렇고, 구경에 열중인 군중을 그려놓고 있는 그림이 그렇다. 
문명의 이기가 여럿 있지만, 그중 가장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인터넷과 특히 스마트폰을 들 수 있다. 스마트폰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면서 마침내 인터넷을 흡수하기에 이르렀고, 그렇게 세상의 끝과도 소통할 수 있는, 그리고 그렇게 손안에 세상을 휴대할 수 있는 세상에 우리 모두는 살고 있다. 그렇게 소통의 시대가 열렸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고립이 심화 된, 이율배반적인 세상에 살고 있기도 하다. 미디어가 사람과 사람이 직접 대면하는 일을 대신해주기 때문에, 미디어가 발달하면 할수록 사람 간 관계는 오히려 그만큼 더 소외되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에는 그렇게 저마다 스마트폰에 열중인 사람들, 그리고 그렇게 자기소외를 앓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상황주의자 기 드보르는 진즉에 현대 문명사회를 스펙터클 소사이어티 곧 구경거리의 사회로 규정한 바 있다. 미디어가 발달한 문명사회를 영화 같은 현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게 현대인은 구경거리를 욕망하고, 사회적 현실은 그 욕망을 부추긴다. 욕망과 욕망의 추동 장치가 맞물리는 것인데, 문제는 욕망이 다반사가 되면서 시들해진다는 점이다. 점점 더 공허해진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욕망하기를 그만둘 수도 없다는 점에 현대인의 딜레마가 있다. 작가는 그렇게 구경거리에 휩쓸리는 사람들(그 자체 일종의 군중심리로 봐도 될)을, 그렇게 공허한 현대인의 초상을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삶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슬픔, 기쁨, 외로움, 고독, 소외감과 같은 감정과 고민을 공유하고 싶다고 했다. 이런 감정과 고민에도 불구하고 삶은 아름답다고도 했다. 어쩌면 이런 감정과 고민 때문에 비로소 삶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로, 비극적 감정이다. 비극적 감정이 삶을 정화하는 경우로 이해하면 되겠다. 작가의 그림에는 이런 존재에 대한 비극적인 감정(그러므로 자기 정화)과 함께, 타자를 향한 연민이, 존재를 감싸 안는 애정 어린 시선이 묻어난다. 그렇게 나를 위로하고, 너를 위안하는 미덕이, 작가의 그림에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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