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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철, 비밀의 정원에는 자작나무 숲길이 있다

고충환


이동철, 비밀의 정원에는 자작나무 숲길이 있다 

고충환 미술평론가

앙드레 말로는 저작 <상상의 박물관>에서 미술관 밖 미술(제도권 바깥의 미술 그러므로 생활 속 미술)을 얘기하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미술관을 머리에 이고 다닌다고 했다(보르헤스라면 도서관을 이고 다닌다고 했을 것이다). 상상의 미술관이며, 의식(그리고 아마도 무의식)의 미술관이고, 무형의 미술관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저마다 의식 속에 미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기준에 부합하는 미의 이상을 찾아 헤맨다. 

미의 이상? 그건 아마도 유토피아일 수 있다. 생생한 삶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어쩌면 삶의 현장으로부터 도피를 꿈꾸고 감행하게 해주는 비현실적인 장소다. 유토피아란 원래 없는 장소, 부재 하는 장소란 의미에서 유래했다. 이처럼 사람들은 부재 하는 장소를 꿈꾼다. 현실 속 비현실을 꿈꾼다. 욕망은 언제나 없는 것을 꿈꾼다. 그러므로 욕망은 이미 실패와 좌절을 전제하고 있고, 여기에 인간실존의 부조리한 원인이 있다. 그럼에도 여하튼 꿈꾸기를 그만둘 수도, 욕망하기를 멈출 수도 없다. 바로 꿈꾸고 욕망하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므로. 그렇다면 꿈 그러므로 욕망이 깃드는 장소는 어디에 있는가. 바로 의식 속에 있고, 더 깊은 층위로 치자면 무의식 속에 있다. 

작가 이도는 이처럼 의식 속의 장소, 어쩌면 무의식이 심연으로부터 길어 올린 장소를 비밀의 정원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비밀의 정원은 유토피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할 것이다. 비록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식 속에 이런 비밀의 정원 하나쯤 간직하고 있기 마련이다. 일상을 살다가도 불현듯 물을 주기 위해, 풀을 뽑기 위해 잠시 잠깐 들렀다가 되돌아오곤 하는 밭 한자리쯤 가꾸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비밀의 정원을 주제화한 작가의 그림은 비록 작가 개인의 꿈이며 욕망 그러므로 일상(그리고 어쩌면 이상)을 테마로 한 것이지만, 사실은 작가 개인의 경계를 넘어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작가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넘어 시대를 공유하는 보통사람들의 꿈과 욕망 그리고 이상을 엿보게 하는 미덕이 있다. 

덧붙이자면 여기서 비밀의 정원이란 무슨 말 못 할 속사정이나 숨기고 싶은 사연, 그러므로 어쩌면 무슨 거창한 의미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의식에 대한, 그리고 더 깊게는 무의식에 대한 탐색을 의미하고, 그러므로 작가의 작가적, 일상적, 그리고 어쩌면 존재론적 아이덴티티에 대한 탐구로 보면 되겠다. 자기 자신의 꿈과 욕망을, 일상과 이상을 탐색하고 탐구하는, 그러므로 자기 반성적인 경향성이 강한 주제며 그림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제 그곳엔 어떤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는지, 그 비밀의 정원 속으로 내려가 보자. 


실제로 작가는 작은 정원을, 정원이라기보다는 농원을 하나 가꾸고 있다. 뭐, 비밀이랄 것도 없다. 장래 자기만의 왕국(?)을 꿈꾸며 틈틈이 물 주고 가꾸기에 열심인데,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무와 당근 같은 하루 야채를 공급해주는 텃밭이 있고, 양귀비와 같은 알만한 그리고 알 수 없는 꽃들이 예쁘다. 불과 4년 새에 제법 숲의 위용이 엿보이는 자작나무 사이로 난 길을 걸을 때면 닥터 지바고 영화 속에서 불던 바람결이 느껴졌다. 아마도 바람에 반응하는 나뭇잎 특유의 몸짓, 다른 어떤 나뭇잎의 그것과도 다른 몸짓, 바로 마음속에 부는 바람의 그것을 닮은 몸짓, 한번 보면 결코 잊히지 않는 몸짓, 그렇게 마치 그리움의 화신인 양 섬세하게 떠는 몸짓 때문일 것이다. 옆에는 작은 계사도 딸려 있었는데, 말이 닭이지 애완에 다름없는 처음 보는 새들이 한집을 공유하고 있었다. 농원을 방책처럼 보호하고 있는 방둑 건너편에는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국내 최고의 습지가 숨겨져 있었다. 

불현듯 가스통 바슐라르로 하여금 물과 빛과 바람이 서로 희롱하는 물질적 상상력 개념을 착상케 한, 연못이 딸린 모네의 정원이 떠올랐다. 거기에는 턱없이 못 미칠 터이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 언젠가 자작나무가 진정한 숲을 이루어 농원 전체를 덮어서 가릴 때면, 마치 자궁 속 태아처럼 자기 속에 하나의 은밀한 정원을, 비밀의 정원을 숨겨놓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작가는 그렇게 자기만의 정원을 가꾸면서 느끼는 생활감정을 그림으로 그린다. 그림에는 가슴이 아니라면 남잔지 여잔지 알 수 없는, 품에 안기거나 어깨 위에 올라타고 있는 것과 같은 정황이 아니라면 어른인지 아이인지조차 알 수 없는 사람들, 기호 같은 사람들, 양식화된 사람들, 익명적인 사람들이 등장한다. 왜 익명적인 사람들인가. 작가는 정작 자기를 그리는 순간에조차 굳이 자기가 아니어도 무방할 사람들을 그렸다. 나이면서 너고, 주체이면서 타자이기도 한 사람들을 그렸다. 그렇게 누구라고 특정하는 대신, 누구나 그림 속 사람들에게 자기를 감정이입하고 대입해 볼 수 있는 사람들을 그렸다. 평등하고 균등하게 그렸다. 누구나 평등하고 균등하다는 깨달음을 그린 것일까. 어느 정도, 아니면 상당할 정도로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깨달음, 아니면 보는 이의 입장에서의 이러한 인상은 어디서 어떻게 유래한 것일까. 바로, 평면성이다. 작가의 그림은 평면적이다. 평면 위에 마치 기호가 사물 대상을 표시하듯, 최소한의 선묘로만 그렸다. 사물 대상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만으로 한정했기에 남자도 여자처럼 보이고, 아이와 어른의 구별이 없다. 그렇게 작가가 보기에 남자도, 여자도, 아이도, 어른도, 나도, 너도, 주체도, 타자도 똑같다. 자연도 그렇다. 무도, 당근도, 도라지도, 자작나무도, 양귀비꽃도, 닭도, 강아지도 똑같다. 나아가 그림 속 물웅덩이(아마도 작가의 무의식을 표상할)와 바다의 표면에 빗금처럼 표시된 물결도, 그리고 그 위에 비치는 빛살도 똑같다. 심지어 철책과 돔과 집과 같은 건축물이며 인공물마저도. 여기에 사물 대상을 한정하는 가장자리 선이 아니라면 여백과 모티브 간 구별조차 없다. 

그렇게 때로 화면이 단순 명료한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모티브와 모티브, 모티브와 여백을 나누는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빼곡한 화면이 흡사 빌헬름 보링거의 공간공포를 상기시킨다. 최소한의 여백을 참지 못하는 심리적, 회화적, 형식적 상황 논리가 어느 정도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도 떠올리게 만든다. 하나의 모티브에서 착상된 계기가 또 다른 모티브, 또 다른 의미, 또 다른 형식을 불러들여 마구 자기를 확장 시키는 경우의 회화, 모티브와 모티브, 의미와 의미, 형식과 형식 간 논리적 개연성은 다만 우연적일 뿐, 보다 큰 틀에서 그것들을 아우르게 만드는, 그런 식의 그리기를 예시해준다. 예컨대 무와 당근 대신, 손에 집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서 확인되는 논리적 비약이 그렇다. 그 자체 그림의 의미를 확장 시키는 한 계기로 봐도 되겠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마치 한정된 화면이 모자라기라도 하는 듯 빼곡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역동적인 화면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평면성이 강하다. 평면성이 바탕이 되고있는 것이다. 윤리적으로 보자면 평등하고 균등하다. 그 자체 작가가 세계를 보고 재현하도록 허락된 장이기도 한 평면 위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똑같다. 아마도 자연 친화적인 생활사를 통해서 터득한 지혜, 아니면 경지로 봐도 좋을 것이다. 


세잔은 세상 모든 존재는 원통과 원뿔과 같은, 최소한의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할 수 있다고 했다. 원통으로 흐르는 강을, 원뿔로 우뚝 솟은 산을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기하학적 요소는 점, 선, 면과 같은, 최소 단위원소로 환원된다. 여기서 작가는 선을 택했다. 선으로 세상 모든 존재를 다 그리고, 표현하고, 재현할 수가 있다. 그에게 선은 확장된 점이며, 축약된 면이다. 그렇게 최소한의 선으로 사람을 그리고, 자연을 그리고, 사물을 그렸다. 최소한의 선묘로 감정 표현도 했다. 비록 기하학적 단위원소로부터 취해온 것이지만, 정작 그에게 선은, 그리고 선묘는 기하학적이지가 않다. 유기적이고, 우연적이고, 분방하고, 역동적이다. 결정적인 선과 머뭇거리는 선이, 한 번에 사물 대상을 정의하는 선과 더듬거리며 미증유의 대상을 찾아가는 선이 어우러지면서 자기만의 회화적 그리기를, 형식논리를 열어놓고 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선으로 나타난 단위원소를 매개로 저만의 꿈과 욕망, 이상과 그리고 어쩌면 유토피아를 예시해주고 있다. 내가 자연이 되고 자연이 내가 되는, 그리고 어쩌면 내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내가 되는, 그렇게 그림 속에서 하나의 차원을 여는,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 열린 차원의 일부가 되는, 그런 그림을, 작가의 그림은 지향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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