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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를 통해 본 한국현대판화_책방, 공방(작업실), 거리, 플랫폼

고충환

장소를 통해 본 한국현대판화_책방, 공방(작업실), 거리, 플랫폼 


판화는 원래 인쇄로부터 유래했다(책방). 판화는 기계적인 숙련과정이 요구되는 만큼 따로 산실이 없으면 안 된다(공방). 판화는 소통을 매개시켜주는 가장 강력한 미디어이며, 소통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이 거리다(거리). 그리고 판화는 관계 곧 네트워크를 매개시켜주는 유력한 매체이기도 하다(플랫폼). 판화의 이러한 장르적 특수성으로부터, 그리고 어쩌면 탈장르적 확장성으로부터 장소 개념이 나온다. 책방, 공방, 거리, 그리고 플랫폼과 같은. 이런 장소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현대판화의 간략한 역사를 다음과 같이 재구성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책방. 판화는 원래 인쇄로부터 유래했고, 인쇄의 한 부분으로서 시작되었다. 인쇄가 판화의 먼 조상인 셈인데, 그렇다면 판화와 인쇄는 어떻게 다른가. 그 과정에 의도적인 왜곡과 인위적인 형식실험이 개입된다는 점을 제외하면, 프로세스 자체만으로 판화와 인쇄를 구분할 수는 없다. 같은 말이지만, 의도적인 왜곡과 인위적인 형식실험이 인쇄로부터 판화를 구분하게 해주는 근거가 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바탕을 둔 상업적인 목적이 인쇄를 지지하고 있는 데 비해, 판화는 비영리적인 목적(이를테면 순수한 미적 향수와 같은)에 부응하기 위해 한정된 수량만을 생산한다는 것도 다른 점이다. 그럼에도 이 말은 판화와 인쇄의 차이보다는 오히려 근친 관계를 확인하고 증언해줄 따름이다. 
그렇게 판화와 인쇄는 친하다. 그리고 인쇄의 존재 방식이 여럿 있지만, 그 중 전형적인 경우가 책이다. 여기서 책에 삽입된 판화를 전적 판화라 하고, 최초의 판화는 이런 전적 판화로부터 비롯했다. 서양의 경우를 보면, 성서에 삽입한 세밀 동판화와 목판화가 그렇다. 금세공사들이 성서삽입판화를 위해 동원되었는데, 알브레히드 뒤러 역시 금세공사 집안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금세공사들이 판화가의 먼 조상인 셈이다. 
우리나라에도 그 경우가 다르지가 않은데, 목판으로 불경을 새긴 목판경이, 그리고 판화로 불경에 삽입한 목판화가 전해지고 있다. 목판경을 보면, 신라 경덕왕 10년인 서기 750-751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현재 세계 최고의 인쇄물로 알려져 있다. 목판화의 경우로는 불교의 경전을 그림으로 도해한 불교변상도가 전해진다. 주로 고려 시대에 집중 제작되었으며, 서기 1007년에 개성의 총지사에서 간행된 <보협인다라니경> 변상도가 국내 최고의 목판화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내용상 유교의 <효경>에 해당하는 <불설대보부모은중경>(줄여서 부모은중경) 변상도가 유명하다. 경전과 변상도 제작을 위해 주로 스님들이 동원되었으며, 원화를 그리는 사람, 원화 그대로 판에 새기는 사람, 그리고 최종적으로 판화를 종이에 찍어내는 사람 간의 역할분담이 돼 있었다. 이러한 분업화의 과정은 일본의 우키요에에서도 오랜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유교의 경우로는 주로 조선 시대에 제작된 삼강오륜과 행실도 등 책에 삽입한 전적 판화가, 그리고 기타 책의 표지를 장식하기 위해 만든 능화판이 전해진다. 이들 전적 판화에서 흥미로운 점은 독특한 서사구조인데, 사건이 전개되는 복수의 장면 장면을 한 장의 판화 속에 담아내, 이야기가 전개되는 전 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영화제작을 위한 사전작업으로 진행되는 콘티의 원형을 보는 것 같다. 
근대 이후로 넘어오면 작곡가 박태준의 악보집 <물새 발자욱>의 표지화를 이인성이 목판화로 제작한 예가, 기타 잡지와 신문에 실린 만화와 만평의 형식으로 다수의 판화가 제작된 사례들이 전해지고 있다. 주로 계몽을 목적으로 한 계몽 판화, 그리고 실생활의 다양한 쓰임새를 위해 제작된 생활판화들이다. 이런 생활판화와 관련해 흥미로운 경우가 장서표(남궁산)인데, 책의 표지나 뒷면 또는 안쪽 겉장에 붙여 책의 소장자를 밝히는 소형판화의 한 형식으로서, 문자와 그림의 조화로운 결합을 그 기본으로 한다. 예로부터 전래 된 장서인(전각 형식의)이 더욱 예술적인 형태로 가공되고 독립된 장르로 정착한 경우라고 생각된다. 
현대로 오면, 판화와 책이 결합 된 경우로서 예술가의 책 혹은 아티스트북이 주목된다. 주로 예술을 개념으로 환원한 개념미술가들, 정치적 메시지가 강한 여성주의 작가들, 그리고 요새로 치자면 장르 간 경계를 넘나드는 다원주의 예술가들(예컨대 다다와 플룩서스의 계보를 잇는 작가들)에게서 폭넓게 제작된 사례가 확인된다. 초현실주의 작가 막스 에른스트의 책 콜라주 작업이, 포장 미술로 유명한 크리스토가 최초로 싼(포장한) 책 오브제가, 플룩서스 작가 디터 로스의 <문학 소시지>(돼지 창자에 책에서 오려낸 활자 조각을 채워 넣은)가, 그리고 여성주의 작가 바바라 크루거의 문자 작업(국내의 경우 장영혜중공업)이 유명하다. 
국내의 경우를 보면, 강애란이 투명 폴리로 책을 캐스팅한 오브제 작업, 동영상을 도입한 전자책, 그리고 도서관이나 서가를 재현한 사진과 영상설치작업에 이르기까지 책에 대한 일관된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책은 말하자면 정신적 사유나 지식의 메타포의 한 경우로서 주어진 것이다. 이외에도 시간의 경과를 한 권의 책 속에 담아낸 임영길의 <시간>, 판화 대신 부식된 판 자체를 판화의 확장된 개념으로 제시한 김홍식의 <감각에 대하여>, 소형 목판화 조각을 일일이 바느질로 엮어낸 강행복의 <화엄> 같은 책 오브제 작업이 흥미롭다. 
전시현황을 보면, 1999년 <예술가가 만든 책전>(구 문예진흥원미술관, 김찬동, 임영길, 고충환 공동 기획) 이후 아티스트북을 소재로 한 다 수의 전시들이 있었고, 현재 한국북아트협회를 비롯한 복수의 관련 협회들이 설립 운영되고 있으며, 세계적인 북페어에도 꾸준히 참가하면서 그간의 활동과 성과를 인정받고 있다. 한편으로 판화는 찍어낸 그림이다. 비록 수작업과 화학반응이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록 컴퓨터프린트 혹은 디지털프린트에선 그 차이가 무색해지지만, 그럼에도 여하튼) 찍어낸 그림이란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디션 개념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판화는 사진과도 친하다. 판화 이전에 인쇄가 있었다면, 이후에 사진이 있다고도 보면 되겠다. 그런 점에서 사진집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묶어낸 <닷 프레스>의 최근 실험과 성과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공방(작업실). 공방은 판화의 산실이다. 국내에서 근대적 의미의 판화 공방은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석판화가 이항성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항성은 1956년 광화문 근처에서 미술교육출판사를 경영하면서 이봉상과 함께 최초로 석판인쇄로 찍은 초등학교 교과서를 제작하기도 하고, 계간지 <신미술>을 발행하기도 했다. 주로 교정기를 이용해 오프셋 인쇄기법으로 찍은 석판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석판화는 물과 기름의 반발 작용에 착안한, 요철이 없는 평판으로서, 회화적 효과에 강하다. 원래 석회석에 지방 성분의 묘화 재료를 사용해 찍어내는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판화기법이지만, 그는 주로 아연판을 이용해 판화를 제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아연판과 알루미늄판이 석판 대신 널리 사용되었지만, 이후 아연판은 공해 문제와 비싼 가격,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정량의 에디션을 찍어내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그 사용이 점차 기피되었는 데 반해, 알루미늄판은 현재까지도 석판 대용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항성은 1958년 아연판으로 제작한 석판화로 첫 개인전을 열었고, 같은 해 미국 신시내티미술관에서 열린 제5회 <국제현대컬러리토그래피전>에 입상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국내 최초의 <한국판화협회>를 창립했다. 이 모든 일이 1958년 한 해에 일어난 일이다. 그는 같은 기법으로 자신의 판화 외에 이상욱, 김정자, 유강렬 등의 작품도 찍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써 판화 공방의 효시로 봐도 될 것이다. 
이 작가들 중 김정자가 주목되는데, 특히 판화교육과 관련해서 그렇다. 각 홍익대와 서울대에서 판화교육이 처음 시작된 것이 1963년이라고 하는데, 김정자가 오클라호마에서 판화를 배워와 처음으로 실크스크린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주한미공보원을 통해 흘러나온 실크스크린 재료와 기법이 갓 대학을 졸업한 젊은 작가들에게 새로운 충동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다. 특히 배륭과 강환성 같은 작가들이 실크스크린 기법을 본격적으로 배워, 이후 실크스크린 판화가 붐을 조성하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당시 시중에는 상업적인 목적으로 시설된 실크스크린 공방이 몇 군데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발주에 의한 제작도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판화공방과 관련해 주목되는 작가가 강국진이다. 강국진은 <한국판화협회>(1958년 창설)에도 <한국현대판화가협회>(1968년 창립)에도 소속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설치미술과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한 아방가르드 작가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1971년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한국 최초의 판화 교실을 개원했다. 당시 김구림, 정찬승과 함께 판화 프레스기를 직접 제작하고, 김상유와 이상욱을 초빙해 판화교육에 앞장섰다. 판화 공방도 그렇거니와 특히 판화교육에 관한 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유학파들이 하나둘씩 귀국해 국내미술대학에 판화과가 개설되기도 전의 일이다. 참고로 국내미술대학 판화과 개설 현황을 보면, 1983년에 국내 최초로 성신여대 대학원에 판화과가 신설된 이후, 1988년에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판화과 및 서양화과 대학원 판화전공, 추계예술대학교 판화과, 그리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판화전공 과정이 각각 개설되었다. 
돌이켜보면 판화시장이 형성되기도 전이어서 당연히 공방체제도 정착되지 않았던 불모의 시기였다. 그런가 하면 벤호 라는 상호 명의 수제 프레스기가 드문 수요에 부응해 주문 제작되었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로 기억된다. 그렇게 옛날에 작가들은 프레스기도, 니들 같은 도구도 직접 만들어 썼다. 
덧붙여 국내 판화 공방 현황을 보면 1980년 김구림 판화 공방, 1982년 김태호 판화 공방, 1989년 서울 공방, 1990년 윤인근 판화 공방과 고도 공방, 장석태 판화 공방, 1991년에 P&P 공방과 가나 공방, 1992년에 P.S 공방, 1993년에 API 공방, 1994년에 장태식 판화 공방, 그리고 1995년에 구그라픽스가 각각 개설되었다. 기타 월인 공방(서울), 동아 공방과 영설화원(부산), 맹일영 판화 고방과 정종환 판화 공방, 그리고 대구 공방(대구), 이종협 판화 공방(대전), 고길천 판화 공방(제주)과 같은 각 지역 소재 공방들이 있었다. 
개인 작업실을 겸한 작가 공방도 있고, 주문제작을 위주로 하는 전문 판화 공방도 있었지만, 이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판화 공방은 없다. 공방이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선 일정한 주문량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낱장이 아닌 에디션 전체가 거래되는 관행이 정착되어야 하고, 판화집 혹은 판화전집 제작이 보편화 되어야 하고, 여기에 무엇보다도 원작이 따로 있는 회화 그대로를 판화로 옮기는 복제판화가 근절되어야 하지만 이 가운데 무엇 하나도 요구조건을 충족시키는 경우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원론적인 얘기지만 시장이 활성화되어야 하고, 끼워팔기(그림을 사면 판화 하나를 끼워주는) 식의 관행이 근절되어야 하고, 투명한 거래환경이 조성되어야 비로소 굳게 닫힌 판화 공방의 문도 다시 열리게 될 것이다. 

거리.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소통의 기술이다. 불통의 시대에 더 절실하게 와닿는 정의이기도 하다. 생산 주체와 함께, 혹은 생산 주체보다도 오히려 수용자의 입장에 초점을 맞춘 미학이 수용미학이다. 수용미학의 핵심개념이 소통이고, 소통을 매개시켜주는 것이 미디어다. 그리고 소통에 관한 한 판화는 가장 강력한 미디어가 된다. 
여기서 혹자는 사진을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장르적 특수성을 제외하면, 이론적으로 판화와 사진은 차이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다. 판화든 사진이든 그 위력은 복제성 곧 복제 재생산으로부터 온다. 비록 판화의 매수를 한정하는 에디션 개념이 있지만, 원론적으론 무한 복제가 가능한 미디어다. 물질성에 구속받는 아날로그 판화도 그렇지만, 물질성이 더 이상 문제 되지 않는, 그리고 여기에 원본과 사본과의 관계 논의 자체가 아예 무의미해지는 디지털 환경에서는 더 그렇다. 
소통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장이며, 소통이 절실한 장이 거리다. 그리고 거리에서 소통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사회적 현실이고, 그런 만큼 현실참여미술이 실질적인 수행자가 된다. 이처럼 국내에서 예술의 현실참여를 표방한 경우로 치자면 1920-30년대 카프 운동이 있었다. 당시에도 판화가 프로파간다 미술을 실천하고 선전하는 주요 매개체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중계몽을 목적으로 제작된 신문 삽화와 같은 소위 계몽 판화가 그렇다. 예컨대 1932년 이상춘이 목판화로 제작한 조선일보 삽화 그림 <질소비료 공장>과 같은.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현실참여미술이 본격화된 것은 1980년대 민중미술에서이다. 1980년대 국내화단은 소위 순수미술 진영과 민중미술 진영 간의 이념대립이 첨예화된 시기다. 당시 민중미술은 민중을 계몽하는 한편, 자신의 이념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주요 수단으로서 벽화운동과 걸개그림, 그리고 민중목판화운동을 널리 전개하기에 이른다. 
민중목판화운동과 관련해 오윤을 그 대표작가로 거론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오윤이 제작한 판화는 주로 널목판 형식의 목판화(우드컷)와 압축고무판화(리노컷) 들이다. 칼맛이 생생한, 선이 굵고 질박한 그의 목판화는 여백과 모티브 부분을 하나로 넘나드는 데서 오는 호흡으로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며, 이념성(메시지)과 도상성(전형성)이 강하게 부각 된 인물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 조각을 전공한 작가가 정작 조각보다 판화에 주력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판화가 갖는 특징 즉 특정의 이념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표현, 전달하고 소통시킬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의 주요 판화 작품들 대개가 유명을 달리하기 불과 수년 내에 집중적으로 제작된 것들이어서 그런지 어떤 응축된 힘이 느껴진다. 일종의 정한의 미(한을 자기 내부에 응축해 정조화 한)로 정의할 만한 미적 감수성의 한 경지를 예시해준다. 
그런가 하면 정원철은 리놀륨 판화 <대석리 사람들>과, 위안부 할머니들을 소재로 한 <초상> 시리즈를 통해 보통 사람들의 초상의 한 전형을 제시한다. 이를테면 개인사 즉 개인의 삶의 역사가 집약된 일종의 상징이자 기호이며 삶의 지도로서의 초상이 갖는 주제의식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작가의 판화를 특징 짓는 요소로서 조각칼 대신 치과용 드릴을 사용해 자기만의 독특한 표현을 얻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초소형 핸드 드릴에 의한 경직되지 않으면서도 대상의 세밀한 부분까지를 포착해내는 특유의 선묘가 그렇다. 조각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속도감이 회화적 깊이를 더할 뿐만 아니라, 유기체의 생리 그대로를 닮은 유연한 선묘와 스크래치가 초상에 각인된 삶의 상처를 드러낸다. 이외에도 작가는 사람들의 지문을 이용해 초상을 재구성한다거나, 기왕의 초상과 함께 환경과 생태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기도 하는데, 어느 경우이건 작가의 판화는 현실주의 미학에 바탕을 둔 리얼리티의 실천에 그 맥이 닿아 있다. 
이외에도 주요 민중 목판화 작가들로는 김봉준(초혼도), 김준권(대동천지굿), 김진하, 김종억(김억), 류연복(골리앗 전사들), 박경훈(토민, 응시, 죽창), 손기환, 이윤엽, 이인철, 이철수, 정비파, 홍성담(5.18 연작_새벽, 오월민중항쟁 연작판화_새벽, 대동세상), 홍선웅(제주 4.3 진혼가.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표지화를 목판화로 제작하기도 한), 황재형(가마 타기) 같은 작가들이 있다. 현재 이 일군의 작가들은 당시의 민중목판화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시대에 맞게 일정한 자기 변신을 꾀하고 있다. 이를테면 도가사상에 바탕을 둔 간결한 묘사와 경구가 함축적인 선 목판화(이철수), 삶의 터전으로서의 환경에 그 맥이 닿아있는 생태주의와 지역주의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생태 혹은 기행 목판화(김억, 김준권, 류연복, 홍선웅)로의 변신이 그렇다. 
더불어 나윤(지하철에서 핸드폰하는 남녀, 조는 남자), 윤여걸(오후 2시 01분 명동), 이상국(홍은동에서), 이인철(신촌 풍경) 이윤엽(일상) 같은, 소통과 함께 거리의 또 다른 담론의 한 축을 형성하는 일상성을 주제화한 작가들이 있다. 

플랫폼. 사전에 찾아보면, 플랫폼은 차가 들고 나는 정류장 혹은 정거장이라고 나온다. 들어오는 차와 나가는 차가 교차 되는 교차로다. 네트워크다. 전통과 현대, 장르와 장르, 형식과 형식, 이념과 이념, 서사와 서사가 만나는 접점이며, 그 경계 너머로 자기를 확장 시키는 정점이다. 퓨전, 하이브리드, 허브, 인터텍스트, 하이퍼텍스트, 하이퍼링크, 그리고 융복합과 같은, 관계 혹은 탈관계 개념이 파생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미술(혹은 예술)에서 그 지점을 찾아보면 장르적 특수성에 천착했던 모더니즘 패러다임으로부터 탈장르와 탈형식 같은 소위 탈담론에 견인되는 후기모더니즘에로의 이동이 여기에 해당한다. 관계 혹은 탈관계 개념이 핵심인데, 우리 말로는 매개다. 그리고 이런 매개 역할에 관한 한 판화는 가장 강력한 미디어가 된다. 이를테면 판화 자체보다는 오히려 현대미술 일반, 그리고 심지어 다원 예술에서 이런저런 형식으로 판화 혹은 판법이 광범위하게 수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원본과 사본과의 구분 논의가 무색해지는 디지털 환경에서라면 더 그렇다. 디지털 환경에서 하나의 이미지는 사실상 무한 복제가 가능한 만큼 원본을 따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무한 복제가 가능한 미디어 모두가 현대적 의미에서의 판화인 것이며, 확장적 차원에서의 판화다. 그러므로 이론적으로만 보면, 손 안의 컴퓨터에 해당하는 핸드폰은 이미 그 자체로 현대적인 그리고 확장적인 의미에서의 판화일 수 있다. 
돌이켜보면, 현대판화의 형식실험 혹은 판화의 확장과 관련한 일화로 김구림의 경우가 새삼 주목된다. 1970년 동아일보가 창간 50주년을 기념해 국내 최초의 비엔날레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를 창설했는데, 3회 전시(1981년)에 참가한 김구림의 작품이 설치작업의 성격이 강하다는 이유로 전시에서 배제된 것이다. 원래 1974년 작품 그대로 재연한 작업에서 작가는 식탁보에 얼룩을 실크스크린하고, 그 위에 걸레를 얹어놓아 마치 걸레에서 배어 나온 물이 보에 스며든 것 같은 일상 그대로의 효과를 연출(아니면 가장?)한 것이다. 판화와 설치작업, 예술과 일상과의 경계와 구분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이처럼 판화의 확장과 관련한 논의는 자체 내에 논란의 여지를 포함하고 있다. 아무래도 모든 현재진행형의 신생담론이 갖는, 숙명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런 판화의 확장과 관련해 주목되는 전시가 <내일의 판화전>이다. 각 1995년, 1996년, 1997년 세 차례 연이은 전시 후 막을 내렸는데, 1995년 전시에서는 정통적인 판화와 함께 실험성을 수용하되 에디션이 가능한 작품으로 한정했다. 그리고 1996년 전시에는 정통판화의 기법에 충실하면서도 판화의 규모를 확대한다는 차원에서 100호 이상의 대작을 중심으로 한 점이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원판이 존재하지 않는 작품, 에디션 개념의 적용을 받지 않는 모노타이프나 모노프린트, 사진이나 영상작업 중 필름을 직접 제시하거나 인화하고 투사한 작품, 그리고 사실상 페인팅으로 봐야 될 작품을 제외시켰다. 또한 1997년 전시에는 판화의 본질을 확장의 계기로 삼았는데, 각 평면성의 확장, 간접성의 확장, 복수성의 확장 등 확장된 개념으로서의 판화를 중심으로 아티스트북이나 컴퓨터프린트와 같은 실험정신이 반영된 판화를 아우르는 등 판화표현의 영역과 경계를 확장하는 계기를 열었다. 
전시가 최종 종결된 이후 1999년에는 <Off Print전>을 열어 그동안 <내일의 판화전>이 갖는 의의와 성과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다. 전시에는 강애란, 곽남신, 김용식, 서정희, 송대섭, 안정민, 윤동천, 정상곤, 정원철 등 현재에도 실험성이 강한 판화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일군의 작가들이 참여를 했으며, 향후 판화의 범주를 확장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작가들 중 곽남신은 <우리 시대의 이콘> 연작을 통해 일관되게 기호가 내재한 의미, 기호의 운명이랄 수 있는 의미의 이중성과 다중성, 기호를 어떤 상황이나 문맥 속에 놓는 방식, 탈맥락과 재맥락으로 나타난 개념미술의 형식과 실천에 주목해 왔다. 그리고 목판과 함께 유리판과 스테인리스스틸 망과 같은 지지대를 다변화한다거나, 유리판에 이미지를 직접 새겨넣는 방법(일종의 유리 에칭)으로 소재를 형상화한 서정희의 작업에서는 정통적인 판법과 재료를 확장하려는 형식실험의 일면이 엿보인다. 
그리고 안정민은 목판 대신 합판에 조각도 대신 구두를 수선할 때 사용하는 주걱칼을 이용한 독특한 판법으로 주목을 끌었다. 주지하다시피 합판은 날실과 씨실이 교차 되는 망구조를 하고 있고, 그 위로 칼이 지나갈 때 망구조가 찢어지고 파열되면서 비정형의 선을 만드는 독특한 질감을 보여준다. 이처럼 목판이 거칠고 질박한 질감을 보여주고 있다면, 또 다른 실리콘 캐스팅 판화를 통해서는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섬세한 분위기를 연출해 보이는 것이 흥미롭다. 소재를 재현하는 대신 소재 자체를 직접 오브제로 차용하기도 하는데, 투명 아크릴판에다가 직접 채집한 각종 들풀이나 씨앗을 붙여 압착 시킨 일련의 작업들이 그렇다. 프린트의 확장된 개념과 오브제를 결합시킨 경우로 생각된다.     
한편으로 윤동천은 일련의 디지털프린트에서 일상과 삶의 현장으로부터 채집한 대비되는 화면(이중화면)을 통해 이미지와 정보가 동격으로 인식되는 동시대 이미지의 존재 방식과 소비행태를 엿보게 한다. 설문지를 배포해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행위를 통해서는 정치적인 참여행위와 의사 표현을 매개하는 예술을, 소프트한 표면 질감을 가진 오브제, 이를테면 식빵이나 네프킨의 표면에 특정의 문장을 타이핑(프린팅)한 일련의 작업들에선 판화 혹은 판법이 개념미술과 결합 된 성공적인 사례를 예시해준다. 
그리고 이미지를 컴퓨터에 입력시켜 임의로 형태를 변형한 후 이를 한지에다가 출력한 정상곤의 판화에서는 디지털 판화의 가능성을 예시해준다. 그의 작업에서 이미지는 자잘한 조각들로 분해돼 크게 확대되기도 하고, 부분들이 연속된 형태로 출력되기도 하고, 소형의 출력물을 모자이크한 연작의 형태로 제시되기도 하고, 때로 필름으로 출력한 이미지를 다른 정통적인 판법으로 옮기거나 한다. 이런 컴퓨터 프로세스와 함께 일련의 프로토타입 작업도 주목되는데, 컴퓨터에 이미지 값을 입력하면, 입력된 값 그대로 컴퓨터가 대신 동판에 만들어준다. 한지의 유기적인 질감과 출력된 이미지 특유의 기계적인 느낌이, 기계적인 프로세스와 아날로그적인 물성이 감각적으로 결합 된 그의 판화에서는 회화적인 느낌이 강한, 디지털프린트의 또 다른 가능성을 예감케 한다. 
비록 전시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판화의 확장과 관련해 주목되는 작가로 임영길과 박광열을 들 수 있다. 임영길은 전자파의 유도방출에 의한 레이저로 조각도를 대신해 컴퓨터에 입력된 그림을 목판에 새기는 레이저 커팅기법을 구사하는데, 정작 그렇게 제작된 판화를 전통적인 책 엮음 방식으로 묶어냈다. 전적 판화의 예를 따르면서도,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접점에 대한 고민이 엿보인다. 이외에도 하나의 이미지를 동시에 잉크젯 방식으로 출력하기도 하고(컴퓨터프린트), 빔프로젝터로 출력하기도 하고(동영상판화), 인터넷을 통해 유포하기도 하는(인터넷아트) 등 현대판화의 새로운 가능성과 형식실험에 진력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신축성 있는 가죽 표면에 사진전사기법을 통해 얼굴을 프린트한 연후에 그 이미지를 도구를 이용해 팽팽하게 고정한 오브제 작업이나, 엑스레이 필름을, 나아가 복제 이미지(이를테면 인쇄물) 자체를 프린트의 일종으로 제시한 박광열의 작업에서는 판화의 확장과 관련한 급진적인 생각이 읽힌다. 그리고 차체에다 종이를 대고 흑연을 문질러 떠낸 정명국의 프로타주(프린트) 작업 또한 판화의 확장 가능성과 관련해 시사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판화의 기본은 에디션이다. 여기에 판화와 조각(멀티플)과 사진이 하나같이 에디션 개념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장르 간 경계를 넘어 혼성하게 해준다. 나아가 제록스프린트(복사 미술), 포토샵, 그리고 3차원 입체 스캐닝과 같은 기계적인 조작과정을 아우르는 디지털 프로세스가, 그러므로 사실상 복수 재생산될 수 있는 일체의 매체가 판화의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여기서 판화의 장르적 특수성 논의는 그 설득력을 잃는다. 그렇게 현대판화는 온갖 이질적인 장르와 형식의 지점들을 가로지르며 이 모두를 하나로 통합해 들이는, 소위 관계에 뛰어난 미디어가 되었다. 크로스오버와 하이브리드컬처, 그리고 토탈아트를 지향하는 동시대 미술 환경에 부응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실효성 있는 미디어가 된 것이다. 일체의 유형무형의 이미지나,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이미지를 전시하고 전송하는 모든 미디어와 메커니즘을 아우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쩌면 월인천강, 그러므로 천 개의 강에 비친 하나의 달 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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