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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 심연보다 아득한, 수면보다 잠잠한, 끊어질 듯 연이어지는

고충환

김정남/ 심연보다 아득한, 수면보다 잠잠한, 끊어질 듯 연이어지는 


점, 선, 면, 색채, 양감, 질감만으로도 이미 회화다. 회화의 필요충분조건은 그림의 의미 내용보다는 형식적인 요소들에 있다고 보는 것이 모더니즘적 형식주의다. 여기에 유형무형의 모든 존재는 형식적인 요소들로 환원되고 표현할 수 있다고 보는, 모더니즘적 환원주의도 있다. 작가 김정남의 회화는 선으로부터 비롯되고 선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적이다. 모더니즘 회화의 형식논리의 세례를 받은 것일 수도 있겠고, 사물 대상의 감각적 표면 현상보다는 본질에 끌리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적어도 외관상 모더니스트(형식주의 관점에서 사물 대상을 보는)와 본질주의자(사물 대상의 감각적 표면의 이면에 숨겨진 본질적 국면을 파고드는)가 작가의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형성시키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없겠다. 

하이데거는 예술이 세계를 창출한다고 했다. 하나의 세계가 열리는 사건이라고도 했다. 그러므로 화가가 마주한 텅 빈 캔버스는 하나의 세계가 창출되기를 기다리는 잠재적인 장이며, 하나의 세계가 열리는 잠정적인 마당이다. 회화적 용어로는 바탕이 될 것인데, 작가의 경우에 바탕으로는 각각 종이, 캔버스, 알루미늄 패널, 포맥스, 그리고 투명한 아크릴판을 그때그때 형편에 맞게 사용하는 편이며, 그 위에 그림을 덧그리는 화구로는 로트링 펜과 니들(바늘)을 사용한다. 하나같이 그 끝이 뾰족한 화구들인데, 가늘고 섬세한 선을 긋기에 적당한 도구들이다. 이 도구들을 이용해 작가는 선을 긋기도 하고, 쿠션(포맥스)이 있거나 단단한 판(알루미늄 패널과 아크릴판) 위에 아로새기거나 한다. 

부분적으로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그리고 전체적으로는 전반적인 패턴을 봐가면서 선을 그어야 하므로 노동집약적인 과정과 함께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그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촘촘한 세선들로 빼곡한 화면이 조성된다. 그렇게 세선들이 어우러진 화면이 기계적이기보다는 유기적인데, 대개 곡선 위주의 선을 구사하는 것과도 무관하지가 않다.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고 한 훈데르트바서의 말도 있지만, 곡선이야말로 유기(체)적인 자연의 본성(아마도 자연의 생명력과 같은)에 부합하는 면이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직선은 문명의 선에 부응하며, 작가가 부분적으로 도입한 직선 구간이 기하학적인 분위기가 강한 것과 비교된다. 아마도 작가 역시 곡선을 자연의 선으로, 그리고 직선을 문명의 선으로 보는 등식에 동의할 것이다. 

실제로도 직선 구간과 곡선 구역이 비교되는 일부 그림에서 작가는 자연과 문명을 대비시키거나, 혹은 마찬가지 의미지만 자연에 이식된 문명의 흔적을 강조하고 있을 것이지만, 대개는 곡선으로 조성된 화면이 지배적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자연의 본성을 옮겨 그린 그림이 절대적이다. 그렇게 곡선과 세선들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의외의 패턴을 만드는 화면이 흐르는 것도 같고 미세하게 일렁이는 것도 같다. 맺히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흐르는 부분이 있고, 촘촘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널널한 부분이 있다. 닫힌 부분이 있는가 하면 열린 부분도 있다. 이것들은 다 뭔가. 역학(역동)이다. 상호작용이다. 대비되는 힘들이 서로 밀고 당기는 상호작용이 역학으로 작동하고 있고, 이로 인해 비로소 화면이 흐르는 것도 같고 미세하게 일렁이는 것처럼도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는 형태도 색깔도 없는 역학에 형태를 주고 색깔을 덧입힌 것이며, 역학을 가시화한 것, 다시, 그러므로 역학을 표상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역학의 표상? 무슨 역학? 어떤 역학? 자연의 역학이고, 자연이 작동하는 원리로서의 역학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자연의 본성이 작동하는 원리를 그린 것이고, 그 표상 형식을 그린 것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각각 자연과 자연성으로 나눈다. 감각적 표면 현상과 이면의 운동성(그러므로 자연의 작동원리)으로 나눈다. 피직스와 나투라로 구분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학은 감각적 표면 현상으로서의 자연의 원인에 해당하는 자연성과 운동성, 그리고 어쩌면 자연의 생명력, 그러므로 나투라의 작동원리에 부합하는 것이며, 작가의 그림은 그 작동원리의 표상 형식을 그린 것이다. 

쉽게 말해 자연의 숨결을 그린 것이다. 유형무형의 모든 존재는 숨을 쉰다. 들숨을 쉬고 날숨을 쉰다. 그 들숨과 날숨과의 상호작용(그러므로 역학)이 존재를 머물게도 하고 흐르게도 한다. 일렁이게도 하고 움직이게도 한다. 빡빡하게도 하고 느슨하게도 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머물면서 흐르는, 일렁이면서 움직이는, 빡빡하면서 느슨한 존재의 숨결을 그린 것이고, 그러므로 자연의 호흡이 들고 나는 길을 그린 것이다. 그 길에 붙여진 이름이 뭔가. 자연율이다. 그렇게 마침내 작가의 주제에 당도했다. 작가의 그림은 다름 아닌 자연율 그러므로 자연의 숨결을 그린 것이다. 숨은 머물면서 흐르고, 일렁이면서 움직이고, 빡빡하면서 느슨하게 흐른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서로 대비되는 힘들이 상호작용하면서 리듬이 생겨난다. 그래서 자연율이다. 

한편으로 자연율(숨결)은 자연 그러므로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성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작가 역시 자연의 일부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자연의 숨결(자연율)을 그린 것이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 작가 자신의 성정 그러므로 내재율을 그린 것이기도 하다. 작가에 내재된 생명력 그러므로 일종의 바이오리듬이 생리학적으로 그리고 반무의식적으로 부지불식간에 표출된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자연율을 그리고, 내재율을 그린 것이다. 여기서 내재율 그러므로 존재의 숨결(아니마)은 비록 작가 자신의 것이지만, 동시에 누구나 숨을 쉰다는 점에서 작가의 그림은 보편성을 얻는다. 그렇게 다시, 작가의 그림은 존재의 숨결을 그린 것이면서, 존재의 약동하는 생명력을 그린 것이다. 

여기서 다시, 작가의 그림은 존재의 숨결을 그린 것이라고 했고, 자연의 호흡이 들고 나는 길을 그린 것이라고도 했다. 길은 도처에 있다. 존재에도 있고, 자연에도 있다. 여기에 흐르거나 쌓이는, 혹은 쌓이면서 흐르는 시간 위에도, 길은 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흐르면서 쌓인 시간의 퇴적층을 보는 것도 같다. 그러므로 시간의 지문을 보는 것 같고, 풍경의 지문을 보는 것도 같다. 시간의 지문? 풍경의 지문? 지문이 뭔가. 존재 위에 아로새겨진 시간의 흔적이다. 나이테가 나무의 지문이라면, 주름은 사람에게 아로새겨진 시간(그러므로 어쩌면 상처)의 지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작가의 그림은 존재에 아로새겨진 시간의 흔적을 그린 것이고, 자연 그러므로 풍경의 지문을 그린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자연율 그러므로 자연의 본성을 좇아 그린 것이지만, 의외로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자연의 감각적 표면 현상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를테면 첩첩한 산세를 보는 것도 같고, 심연보다 아득한 계곡을 보는 것도 같고, 몰아치는 파고를 보는 것도 같고, 수면에서 일렁거리는 물이랑을 보는 것도 같다. 앞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운동성 그러므로 자연의 생명력이 감각적 자연현상의 원인이라고 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비록 자연의 성정 그러므로 자연율을, 그리고 작가 자신의 성정 그러므로 내재율(어쩌면 생리학적 자기 그러므로 바이오리듬)을 그린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산세와 파도 같은 자연의 감각적 표면 현상과도 통하는 것이었다. 

다시, 그렇게 작가는 어쩌면 유형무형의 모든 존재가 하나로 연결되고 서로 통한다는 불교의 인연과 연기설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오라기처럼 가녀린, 어쩌면 실오라기보다 연약한 길을 끊어질 듯 이어질 듯 가다가 마주친, 스쳐 지나간, 어쩌면 놓아버린 인연의 계기들을 한 땀 한 땀 수놓듯 점점이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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