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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강탈, 시선과 응시의 교환으로부터 파생되는 관계와 공감의 파노라마

고충환

시선강탈, 시선과 응시의 교환으로부터 파생되는 관계와 공감의 파노라마 


전통적인 분류법에 따르면, 미술은 시각예술이다. 그런 만큼 시각에 민감하다. 내가 너를 쳐다보면, 너도 나를 쳐다본다. 여기서 너를 쳐다보는 나의 시각이 시선이고, 나를 쳐다보는 너의 시각이 응시다. 그렇게 나와 너는 시선과 응시를 주고받는다. 그렇게 나는 하늘을 쳐다보고, 숲을 쳐다보고, 세상을 쳐다보고, 내면을 바라본다. 그럴 때면 하늘도, 숲도, 세상도, 내면도 네가 돼 나를 쳐다본다. 그러므로 나는 시선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너에게 응시 되는 잠재적인 객체이기도 하다. 그 시선과 응시의 교환으로부터 관계가 생겨나고, 상호교감이며 공감이 파생된다. 여기에 시선을 매개로 생성된 관계와 교감 그리고 공감을 주제화한 18명의 작가들이 있다. 그들의 작품은 그대로 세상을 보는 시각의 다양성을 증명하는, 시선의 파노라마며 스펙트럼이 될 것이다. 

시선, 관계를 묻다. 이승정은 시선의 관계를 주제화한다. 얼핏 보기에 거꾸로 선 압정 같기도 하고 변형된 유리잔 같기도 한, 쌍을 이룬 유리 조형물의 가장자리 선을 따라 프로필 곧 사람의 옆얼굴을 재현했다. 현란한 조형물 속에 사람의 얼굴이 숨어있는데, 숨어있는 얼굴은 그림자에서 더 또렷하다. 여기서 당신은 조형물의 현란한 외장에 매혹될 수도 그 이면에 숨은 사람의 얼굴에 주목할 수도 있다. 관계의 이중성 내지 상대성과 함께, 관계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표면과 외장이 아니라 이면에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전용환의 작품에는 그물 형태의 선조로 표현된 큰 사과 속에 작은 빨간 사과가 들어있다. 여기서 큰 사과 그러므로 그물 사과는 음에, 그리고 그 속의 작은 사과는 양에 해당한다. 그렇게 모든 관계치고 음양에 의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런 음양과의 상호관계와 조화로부터 존재가 결실된다. 작가의 작업에서 사과는 바로 그 존재의 결실을 상징한다. 

시선, 내면을 마주하다. 때로 시선은 자기 내면을 쳐다보고, 자기 내면과 마주할 때가 있다. 한눈에도 내면적인, 자기 반성적인 경향성이 강한 이우철의 작업이 그렇다. 작가의 작업에서 모델은 얼굴에 가면을, 카니발 광대 가면을 쓰고 있다. 여기서 가면은 페르소나를, 사회적 주체며 제도적 주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또 다른 주체, 어쩌면 진정한 주체일 아이덴티티가 그 가면 뒤에 숨는다. 그렇게 나는 사회에 전시된 주체와 숨은 주체로 분리되고 분열된다. 그 분열적인 인격체의 극단적인 경우가 광대다. 겉보기에 광대는 웃고 있지만, 사실은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 울음은 웃는 얼굴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거니와 쉽게 알아차릴 수도 없다. 바라보는 자 그러므로 관조하는 자에게 삶은 희극이고, 사는 자 그러므로 겪는 자에게 삶은 비극이라고 했다. 작가의 내면적인 모델은 그렇게 희비극이 중첩된 삶의 이중성이며, 존재의 양가성을 예시해준다. 

시선, 삶을 관조하다. 작가 최진희는 유리구슬 표면에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아로새겼다. 작가는 그 행위가 삶에 생기를 불어넣고, 존재를 치유하고 회복해준다고 생각한다. 유리구슬은 흔히 속이 들여다보이는 투과성으로 인해 예로부터 존재의 이면을 꽤 뚫어보는 주술을 위한 도구 그러므로 매직 구슬로 전용되곤 했는데, 아마도 예술의 치유능력을 믿는 작가의 작업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문선미의 그림에 등장하는 그녀들은 심리적 갈등과 욕망 그리고 자기성찰로 비대해진 몸을 가지고 있다. 심리적 갈등과 욕망과 자기성찰이 육화된 몸으로 볼 수가 있겠다. 때로 그녀들은 내면적이고, 시기하고, 흐르는 눈물을 진주처럼 두 손으로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다. 하나같이 관계(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때로 자신과의 관계)로부터 생겨난 감정들이다. 그 관계, 그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 보통 사람들의 갈등과 모순적인 삶의 현실을 비대해진 몸을 통해 해학적으로 표현한 것일 터이다. 

시선, 신화를 재해석하다. 윤두진은 엘리시움, 그러므로 파라다이스, 이상향 신화를 소환한다. 여기서 신화는 욕망을 반영한 것이고, 그 언어형식이 상징이다. 작가의 작업에는 갑옷 입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불멸에 대한 욕망을, 벌거벗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을 상징한다. 어쩌면 그 상징은 반어법적일 수 있다. 즉 불멸에 대한 욕망도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도 정작 그렇지 못한 불완전한 현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렇게 신화와 현실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아마도 작가가 신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와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노진아는 스틱스강 신화를 호출한다. 스틱스강에 몸을 담그면 인간은 불멸을 얻는다. 아킬레우스 역시 스틱스강에 몸을 담갔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손으로 잡고 있던 발뒤꿈치가 물에 젖지 않아 치명적인 급소로 남았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서 작가는 스틱스강에 몸을 담근 채 머리만 내민 사람들의 벽을 제안한다. 앞서 신화는 욕망을 반영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몸이 불멸을 얻은 것에 반해, 정작 머리는 필멸인 상태로 남아있다고 봐야 할까. 무한한 몸(그러므로 어쩌면 욕망의 화신인)과 유한한 머리(그러므로 어쩌면 정신에 해당할)가 흔히 정신을 중요시하는 인문학적 관습과 충돌한다. 반어법인가? 역설적인 표현인가? 알레고리인가? 신화를 소재로 한 작가의 작업은 그렇게 신화에 반영된 욕망과 현실(그리고 현실 인식)과의 관계를 재고하게 만든다. 

시선, 숲을 바라보다. 최용대는 숲을 그렸다. 기억처럼 흐릿한, 바람이 쓸고 간 흔적처럼 흔들리는 숲이 서정적인 느낌을 준다. 무채색으로 그려진 단색조의 그림이 수묵화 같은 인상이 들게 한다. 그리고 여기에 여백이 침묵과도 같은, 미처 말해지지 않은, 의미로 환원되지 않은 채로 의미하는, 저마다의 시어들로 채워지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리고 김준용은 노을을 머금어 붉게 물든 풍경(노을 나무?)을 조형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자연을 상실했다. 쳐다볼 자연이 없다. 교감할 숲이 없고, 감동할 풍경이 없다. 이제 자연은, 숲은, 그리고 풍경은 전설로만 전해지고, 풍문으로만 떠돈다. 이런 상실의 시대이기에 증거처럼 이미지로 남은, 유물 마냥 조형으로 남겨진 자연이 더 크게 다가온다. 

시선, 비는 방울져 내리고. 서명수는 물방울을 조형했다. 연못 아니면 연꽃에 담긴 물방울이 정적이고 관조적인 느낌을 준다. 물방울들이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만개한 꽃잎처럼 아니면 꽃송이처럼 한 덩어리로 포개진 또 다른 작업이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인상을 준다. 그리고 편종필은 빗방울이 무리 지어 떨어져 내리는 자연현상을 표현했다.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면서 남긴 잔상을 표현했다. 여기서 잔상은 여운과 마찬가지로 사실은 없는 것이다. 다만 마음에 남은 기미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마음이 만든 그리움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방울의 특이한 경우가 있다. 신한철의 꿈 무리가 그렇다. 꿈이 몽글몽글 무리 지어 피어오르는 형국을 형상화했다. 꿈은 무게가 없다. 무게가 없어야 피어오를 수 있고 날아갈 수가 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무게 없는 꿈 같고 중력 없는 풍선 같다. 다시, 그렇게 작가의 조형물(꿈의 조형이라고 불러도 좋을)이 꿈을 꾸게 만든다. 

시선, 여기가 아닌 어디라도. 때로 시선은 여기가 아닌, 저기를 향한다. 비현실적인 현실 저편을 향하고, 지금은 지나쳐온 현실 이전을 그리워한다. 어쩌면 때로 그런 것이 아니라, 항상 그런지도 모른다. 부재를 그리워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존재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여행, 그러므로 부재로의 여행, 내면으로의 여행, 그리고 과거로의 여행은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김용현이 이런 여행을 조형했다. 어릴 적 갈잎 배를 만들어 물에 띄우며 놀았던, 그 때 그 배 형상 그대로 벤치를 만들었다. 그리고 유년 시절 할머니가 행운을 가져다준다던 삼각형 은행알을 만들었다. 그렇게 작가가 조형한 갈잎 배며 삼각형 은행알에 대해서는 부재를 존재 위로 소환하는, 추억을 현실로 되불러오는 존재론적 여행의 메신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시선, 감각을 훔치다. 그리고 장민호, 곽동준, 전형준의 작업이 유리 본연의 아름다움에로 이끈다. 속이 들여다보이는 투명성, 투명한 덩어리를 통해 보이는 왜곡과 굴절 이미지, 빛이 지나가는 투과성, 그리고 외계를 되비치는 반영성으로 인해 유리는 유리 자체만으로 이미 아름답다. 어쩌면 유리 고유의 본성(혹은 같은 말이지만 본질)이라고 해도 좋을 이러한 성질로부터 형식적이고 의미론적인 실험과 확장이 가능해진다. 여기에 작가들은 색을 더하거나, 투명한 덩어리며 결을 강조하기도 하고(장민호), 샌딩으로 광을 부드럽게 조절하거나, 덩어리의 표면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감싸며 흐르는 선을 부각하거나(곽동준) 하면서 그 가능성에 또 다른 가능성을 더한다. 아마도 유리를 매질로 한 조형 작업 가운데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조형 가능성과 관련해 주목해볼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여기에 유리잔이나 유리그릇 그리고 유리 장신구 등 유리를 소재로 만든 소품들 그러므로 피스들을 하나로 조합해 만든 전형준의 작업이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무슨 토템폴마냥 조각들을 세로로 쌓아 탑을 만든 조형이 기념비적인 인상을 준다. 생활 오브제의 기념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노해율은 변수를 다룬다. 둘 이상의 변수가 서로 원인과 결과로 작용할 때 상호작용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의도적으로 상호작용을 배제한 변수를 나란히 병치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라고 작가는 묻는다. 작가는 아마도 기술과 시스템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외관상 기술과 시스템에 충실한 작가의 설치 작업은 사실은 기술만능주의와 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맹신을 경고하는 우화 같고, 도구화된 이성을 풍자하는 역설적인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그리고 작가 준gk는 예술 자체를 주제화한다. 유리 소재로 끈으로 입구를 질끈 동여맨 봉투 혹은 자루를 형상화했는데, 그 속엔 아마도 예술이 들어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억압된 예술이 주제일 것이다. 이처럼 예술을 통해 예술을 묻는 것은 개념미술의 전형적인 한 경우에 속한다. 그렇게 현대유리조형이 조형을 넘어 개념을 묻기에 이르렀음을 예시해주는 경우로 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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