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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진/ 회화는 어떻게 애도의 형식이 되는가

고충환

김희진, 회화는 어떻게 애도의 형식이 되는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에피소드. 서로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서로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서로 길들여진다는 것,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서로 특별한 존재라는, 전에 없던 관계가 형성된다. 그렇게 나와 너는 서로 사랑함으로써 서로 길들여지고, 서로 특별한 존재로서 관계 맺어진다. 그러므로 나와 너는 그 관계, 어쩌면 신뢰가 깨지지 않도록 서로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것도 기꺼운 책임, 자발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여기서 사랑은 윤리가 되고, 윤리가 곧 사랑이 된다. 이처럼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를 사랑의 윤리 혹은 윤리적인 사랑의 차원으로, 그러므로 존재론적인 경지로까지 확장한 것이 레비나스의 윤리적 연대 혹은 윤리적 공감 혹은 윤리적 참여를 호소해오는 타자의 얼굴, 그러므로 윤리적 타자다. 김춘수식으로 말하자면 어떤 꽃은 이미 다른 꽃과는 다른 꽃이 되었고, 나에게 특별한 꽃이 되었고, 그러므로 어쩌면 내가 비로소 꽃이라고 부르는 꽃, 나에게 의미가 있는 유일한 꽃이 되었다. 어린 왕자의 별에서 서로 사랑했던, 그러므로 서로에게 길들여졌던, 다시 그러므로 서로 특별했던 상대가 꽃이다. 김희진의 그림에는 그런 꽃이 등장하고, 어린 왕자의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그런데, 정작 꽃은, 그리고 어린 왕자의 에피소드는 작가의 그림 어디에 있는가. 

회화는 어떻게 애도의 형식이 되는가. 엄마가 죽었다. 그때 작가는 파리에 있었다. 중환자실에서 일반병동으로 옮긴 엄마의 격려와 함께 떠나온 터였다. 그리고 작가는 서둘러 귀국을 했고, 엄마를 보내드렸다. 보내드렸다? 어디서 어디로? 우리가 무심코 하는 말 중엔 너무나 분명해서 한 번도 그 의미를 의심해본 적이 없는 말이 있고, 사실은 그 의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말, 빈말, 그러므로 공허한 말이 있다. 엄마를 보내드렸다는 말도 그렇게 분명하면서 애매한, 애매한 채로 분명한, 그러므로 이율배반적인 말이다. 그리고 작가는 엄마가 곧잘 오르곤 했던 산을 찾았다. 산에서 작가는 마른 나뭇가지를 주웠다. 그림 그릴 때 붓 대신 사용할 요량이었고, 관성에서 벗어나 그림을 확장할 생각이었지만, 문제는 탄성이었다. 붓으로 쓰기엔 탄력이 없었다. 그래서 산 나뭇가지를 꺾었다. 나뭇가지를 꺾기 전에 나무에 절을 했다. 나뭇가지를 꺾는 것도, 더욱이 나무에 절을 하는 것도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렇게 작가는 붓으로, 빗자루로, 그리고 산에서 꺾어온 나뭇가지로 꽃을 그렸다. 평소 특정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는 그림이나 의미 전달을 의식한 그림보다는 그저 몸이 부르는 대로, 감각이 이끄는 대로 그림을 그리는 것, 그러므로 감각적인 그림이 몸에 밴 작가로선 이례적인 일이다. 그리고 꽃 자체도 그렇지만, 반드시 꽃이 아닐 때도 분홍색조의 그림을 그렸다. 평소 채도가 낮은 중성적인 색채감정에 친숙했던 작가로선 뜻밖의 일이다. 나뭇가지를 꺾는 것도, 나무에 절을 하는 것도, 꽃을 그리는 것도, 그리고 여기에 분홍색의 색채감정마저 아마도 평소 꽃을, 그리고 분홍색처럼 예쁜 색깔을 좋아했을 엄마를 애도하는 작가의 의식적인 행위가 반영된 것일 수 있고, 다만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끌린 경우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외관상 작가의 그림은 무의식적인 그리기에 가깝고, 추상표현에 가깝다. 그렇다면 의식은 작가의 그림 어디에 있는가. 무의식의 이면에 숨어 있고, 무의식의 일부로 녹아 들어있고, 무의식적인 그리기에 일체화돼 있다. 그렇게 작가는 공유, 관계, 연결, 접속, 그리고 사이, 차이, 틈과 같은 의식적인 주제를 무의식적인 그리기를 통해 표현하고 전달할 수가 있었다. 다시,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특이하게도 무의식이 표면이고 의식이 이면이란 점에서, 무의식이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흔히 의식이 표면이고 무의식이 이면인, 그리고 그렇게 의식이 무의식을 반영하는 다른 경우들과는 구별된다는 점에서 다르다. 아마도 엄마에 대한 애도 역시 그랬을 것이다. 의식적인 행위의 반영이라기보다는 작가의 몸에, 무의식에 스며든 애도의 감정을, 때론 그것을 다름 아닌 애도라고 의식하지조차 못한 감정을, 그러므로 불분명한(의식적으로 불분명하지만, 몸 그러므로 무의식에 관한 한 분명한) 감정을 표현하고 그렸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엄마에 대한 애도의 형식에 해당할 나뭇가지를 꺾는 행위, 나무에 절을 하는 행위, 꽃을 그리는 행위, 그리고 분홍색으로 나타난 색채감정 모두는 무의식적인 그리기의 이면에 숨어 있고, 무의식적인 그리기에 일체화돼 있다. 그래서 잘 안 보이지만, 잘 보면 보인다. 평소 작가의 그림 그리기의 감각적 문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 그림이란 그리기와 지우기, 드러내기와 감추기, 의식과 무이식이 교차 되고 중첩되는 과정이다. 하이데거는 은폐를 그 본질로 하는 대지와 비은폐가 본성인 세계의 투쟁이라고 했고, 곰브리치는 표현과 재현이 교차 되는 과정이라고 했고, 폴 클레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이 중첩되는 과정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기술이라고 했는데, 그 의미가 다르지 않다. 다르게는 암시의 기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엄마에 대한 애도는 드러나는 대신 암시된다. 어떻게 그런가. 작가의 그림은 단번에 그려지지 않는다. 그리기와 지우기가 중첩되고 반복되면서 특유의 층 구조를 만들고, 알만한 그리고 때론 알 수 없는 비정형의 얼룩과 흔적을 남긴다. 엄마에 대한 애도의 감정을 긍정(엄마의 죽음을 인정)하고 부정(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미증유의 과정이, 사실은 치열한 과정이 밑도 끝도 없이 반복되고 교차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 그리기에 대해서는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는 과정을 통해 종래에는 대 긍정(자기화해와 자기 치유)에 이르는, 긍정과 부정의 변증법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상실(감)과 관련해 애도와 멜랑콜리 그러므로 우울을 대비시킨다. 여기서 상실을 인정하는 태도가 애도에, 그리고 상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상실된 대상에 들러 붙어있는 경우가 멜랑콜리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작가는 어쩌면 그림 그리기를 통해 멜랑콜리를 넘어 애도로 건너가고 있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그 과정을 넘어 자기화해와 자기 치유를 실현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REHTOM – 216B>라고 부른다. REHTOM – 216B? 얼핏 오리무중의 기호 아니면 부호 같지만, 뒤집어 읽으면 비로소 그 의미가 보인다. MOTHER – B612. 엄마다. 그리고 어린 왕자가 살았던 소행성 이름이다. 서로 사랑했던, 서로 길들여졌던, 그래서 서로 특별했던 엄마에 대한 애도의 감정을 어린 왕자의 에피소드에 결부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본래의 의미를 뒤집어놓은 건 왜일까. 드러내기와 숨기기가 교차하는 숨 막히는 변증법을 형용하는 것일 수도 있겠고, 처음 의미 그러므로 어쩌면 관성적인 의미를 뒤집어보면 비로소 다른 의미 그러므로 어쩌면 진정한 의미가 보인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고, 때로 미처 의미화되지 않은 의미, 의미화를 거부하는 의미, 그리고 그렇게 의미화되지 않은 채로 의미하는 의미를 강조하는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애도의 감정을 어떻게 의미로 환원할 수가 있겠는가. 깨알 같아서 사실상 읽을 수가 없는 어린 왕자의 텍스트나, 여기에 그 텍스트를 꽃 형상 속에 숨겨 놓은 것도 알고 보면 그런 의미일 것이다. 애도의 감정 그 자체와 전체가, 최소한 그중 상당 부분이 의미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의미 말이다. 여기에 적어도 작가의 그림은 독해 그러므로 의미론적인 대상으로서보다는 감정 그러므로 느낌의 대상이라는, 다시 그러므로 감각으로 와닿는 느낌으로 읽어달라는 주문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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