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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문/ 존재의 집, 그러므로 어쩌면 성소를 짓다

고충환

배정문/ 존재의 집, 그러므로 어쩌면 성소를 짓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가진 창조성의 근원이 은유라고 했다. 나의 작품도 메타포의 울타리를 넘은 적이 없다...바깥에 떠도는 주인 없는 말들로부터 스스로 지켜낼 것이며, 마침내 수많은 나를 찾아낼 것이다. 스스로 수없이 반복해서 진화하고 짓는 행위의 성찰을 통해 나는 이번 생에서 한 번만 살 것이다(작가 노트). 

붉은 실에 칭칭 감긴 사람 형상을 소재로 한, 배정문의 조각은 한 눈에도 고치를 연상시킨다. 사전에 찾아보면, 고치는 완전변태를 하는 곤충의 유충이 번데기로 변할 때 자신의 분비물로 만든 껍데기 모양 또는 자루 모양의 집이다. 특히 나비와 나방이 변태를 위해 이런 집을 짓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변태로 치자면, 땅속에서 애벌레 상태로 6, 7년을 지낸 연후에 자신을 꼭 닮은 허물을 옷처럼 벗어놓고 여름 한 철 성충으로 살다가 죽는 매미도 있다. 이처럼 고치에서 그 의미는 변태에 방점이 찍힌다. 
이처럼 변태 자체는 자연현상이고 생물학적 현상이지만, 인간의 관점(그러므로 은유적 관점)에서도 의미심장한데, 특히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종교적인 맥락에서 그렇다. 이를테면 삶은 매 순간순간이 눈에 보이는,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변태의 연속이다. 여기에 종교적인 의미와도 결부되는 것이지만,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듯, 나비가 고치를 찢고 날아오르듯, 옛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덧입는, 그리고 그렇게 거듭나기 위한, 통과의례를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그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과정, 대개는 보이는 곳에서보다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치열한 그 과정을 진화라고 해도 좋고, 성장통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사회학 용어로, 세상과 단절된 채 집(고치)에 틀어박힌 사람을 히키코모리 또는 코쿤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셜미디어가 보편화된 시대에, 마음만 먹는다면 세상 끝에 사는 모르는 누군가와도 소통할 수 있는 시대에, 그리고 그렇게 소통의 계기가 활짝 열린 시대에 오히려 개별 존재 저마다는 더 고독한(그러므로 더 고립된) 시대를 살고 있다. 이처럼 고치란 말속엔 자기 변신을 위한 성장통이라는 존재론적 의미와 함께, 소통의 시대에 정작 소통(어쩌면 진정한 소통)이 소외되는, 시대적 아이러니도 포함된다. 그 자체 고치의 이중성 혹은 양가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의미를 작가는 근작의 주제 <고치의 고백>에 담았다. 여기서 작가는 고치를 고백하는 주체로서 설정해놓고 있는데, 사람 사는 꼴이 꼭 자신의 분비물로 집을 짓고 변태하는 삶을 사는 고치의 삶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고치는 사람 사는 삶(그러므로 세상)을 상징하고, 존재의 집을 은유한다. 존재의 집? 하이데거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언어가 존재를 결정한다는 말이고, 그러므로 언어가 곧 존재라는 의미이다. 유충이 자신의 분비물로 집을 짓는다면, 사람은 언어로, 그러므로 사유로, 다시 그러므로 어쩌면 예술로 자기가 살기 위한 집을 짓는다. 
그러므로 언어가 곧 사람이다. 생각이 곧 사람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예술이 곧 사람이다. 예술이 곧 사람이다? 예술가 중에는 자신과 무관한 예술을 하는 예술가가 있고, 자신과 유관한 예술을 실천하는 예술가가 있다.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이 강한, 내면화의 경향성이 강한 경우인데, 작가의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오죽하면 고백일까. 작가에게 작업은 삶의 고백이다. 우선으로는 자기 고백 그러므로 독백이지만, 사람이 하는 생각이나 사는 모양새가 어슷비슷한 탓에 작가의 자기 고백은 자기 고백의 경계를 넘어 공감대를 얻고 상호소통의 계기를 연다. 말하자면,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언어로 저만의 집(삶)을 짓는, 고치들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언어로 지은 집(삶)을 예시해주는(고백하고 있는) 작가의 작업은 동시에 저마다 어떤 존재의 집을 짓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작가는 부제를 ‘붉은 고백’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외형상 사람 형상을 칭칭 감고 있는 붉은 실에 착상된 것일 터이다. 보기에 따라서 붉은 실은 살아있는 존재의 생명줄을 보는 것 같고, 실핏줄을 보는 것도 같다. 여기에, 고백이되 붉은 고백이다. 작가의 내면을 토로한 것 같고, 작가의 파토스(격정?)가 물질적 형식을 덧입어 현현한 것도 같다. 정작 작가 자신에게 붉은 실은 연을 상징하고, 인과를 상징하고, 시간을 은유한다. 붉은 파토스보다는, 실에 방점이 찍힌 해석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존재란 끊어질 듯 연이어지는 인연의 집이고, 헤아릴 수도 없는 원인과 결과가 실처럼 얽혀있는 인과(그러므로 어쩌면 업)의 집이고, 마치 고대 유물처럼 그 인연과 인과를 낱낱이 축적하고 있는(그러므로 기억하고 있는) 시간의 집이다. 
여기에 그렇게 헤아릴 수도 없는 인연들이 스쳐 지나간 몸이(작가에게는 바람도, 그리고 흘러가는 덧없는 구름조차 인연이다), 얽히고설킨 인과의 끈으로 내면적으로도 보이고 우울하게도 보이는 존재의 집이, 시간을 축적(그러므로 기억)하고 있는 한 사람이 서 있다. 마치 이 사람을 보라(에케 호모), 여기에 존재(초인)가 있나니, 라고 외치는 니체의 소리를 듣는 것도 같고, 그러므로 설핏 비장감이 감도는 것도 같다. 그가 서 있는 가장자리 주변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마치 그를 보호하기라도 하듯 대나무 기둥들이 둘러 서 있다. 둥글게 원을 그리는 형태로 연출된 공간이 고대 유적을 보는 것도 같고, 스톤헨지의 돌기둥과는 또 다른 버전을 보는 것도 같다. 
그런데 왜 돌기둥이 아니고 대나무인가. 작가에게 대나무는 또 다른 삶을 은유한다. 말하자면 대나무의 속이 빈 공간은 비어있으면서 가득한, 비움으로써 채우는 삶의 태도를 상징하고, 대나무의 마디는 매 순간 변태를 통해 성장하는(거듭나는) 계기의 단계들을 상징하고, 길게 뻗은 대나무 줄기는 하늘(그러므로 성)에 대한 지향성을 은유한다. 
하늘에 대한 지향성? 대나무의 뿌리는 땅을 향하고, 줄기는 하늘을 향한다. 그러므로 대나무는 성(하늘)과 속(땅)을 이어주는 매개자다. 여기에 성과 속의 경계를 넘나드는 또 다른 주체가 무당이다. 그러므로 무당과 그 뜻을 같이하는 대나무는 무당의 주물이다. 다시, 그러므로 원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은 혹 무당(어쩌면 초인)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어쩌면 하늘과 땅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처음 사람이며 원형적 인간일 수도 있겠다. 그런 원형적 사람이 속해 있는 세상이 세속적인 세상일 리가 없다. 그러므로 그가 서 있는 원 속의 장소는 성소다. 세상 속의 성소다. 여기에 대나무 기둥에는 사람 형상과 마찬가지의 붉은 실이 감겨 있어서 마치 당집 그러므로 성소처럼 보인다. 그렇게 작가는 처음 사람이며 원형적 인간을, 무당을(요셉 보이스는 예술가를 현대판 무당이라고 불렀다), 신의 메신저를, 그리고 어쩌면 작가 자신의 아득한 원형적 인격을 형상화해놓고 있었다. 
그 원형적 사람이 속해 있는 장소 밑바닥에 작가는 백화된 산호를 깔았다. 순백의 산호가 파도 거품 속에서 태어난 비너스의 탄생을 보는 것 같고, 그러므로 미의 화신을 보는 것 같고, 정화를 은유하는 것도 같다. 그리고 여기에 백화된 산호는 죽은 산호다. 그러므로 순백의 산호는 사실은 죽음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메멘토모리, 곧 죽음을 기억하라는 무당의 전언을 듣는 것 같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서로 통한다는 원형적 사람의 전언을 듣는 것도 같다. 

아마도 작업을 통해서, 작가는 수많은 나를 찾아낼 것이라고 했다. 나는 신화 속을 떠돌고, 고대 유적을 배회하고, 시간 속을 헤매고 있을 터이다. 그렇게 낱낱이 찾아지고 살아낸(작가의 말대로라면 진화한) 나머지, 나는 이번 생에서 한 번만 살 것이라고 했다. 한 번만 산다? 예술은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다. 질문의 기술이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질문이 저마다의 존재에 의문을 일으키고, 상처를 헤집어 존재를 각성시키는 기술, 그러므로 어쩌면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근작에서 작가는, 이번 생에서 한 번만 살 것(?), 이라는 화두(그러므로 어쩌면 질문)를 던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에게. 그리고 모든 존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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