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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영/ 무위자연, 어쩌면 잃어버린 나의 본성일지도 모를

고충환

이광영/ 무위자연, 어쩌면 잃어버린 나의 본성일지도 모를


 거대한 나무가 산을 이루고 있다. 나무이기도 하고 산이기도 한, 나무가 그대로 산이 된 나무 산이다. 화면 아래쪽에는 강이 흐르는데, 운무가 나무 산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 나무 산에 새들이 깃들고, 강에서 올라온 물고기들도 깃든다. 나무에 물길을 내 나무를 거슬러 올라온 물고기들이다. 그렇게 나무는 강물에 연장되고, 강물이 유래한 발원지가 된다. 다시, 그렇게 나무는 나무이면서, 동시에 산이면서, 그리고 여기에 강물이기조차 하다. 하늘 위엔 달이 떠 있는데, 대개는 여러 개의 달이 떠 있다. 아마도 시간의 흐름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고, 존재들 저마다의 내면에 뜬 개별적인 달을 상징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곧잘 나무 산 주변으로 별자리가 총총한 것이 별천지가 따로 없다. 그 자체 작가의 자연관이 반영된 것이면서, 동시에 작가가 꿈꾸는 이상향일 것이다. 

다른 그림을 보면, 머리칼처럼 휘늘어진 나무 아래 정자에 사람들이 앉아서 담소를 나눈다. 또 다른 그림에선 나무에 등을 대고 앉은 사람이 땅바닥에 기댄 사람과 담소를 나눈다. 혹자는 나무를 올려다보고, 어떤 이는 흩날리는 꽃잎을 올려다본다. 특이한 것이,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아이처럼 보인다. 심지어 아마도 작가의 자화상이지 싶은, 좌선한 자세로 앉아 머리에 새를 이고 명상에 빠진 사람도, 저보다 큰 꽃그늘에 앉아 사색에 잠긴 사람도 아이들이다. 보기에 따라서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새도, 꽃도, 심지어 꽃을 찾아 날아든 벌마저도 작가의 이념이 투사된 또 다른 자화상일 수 있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아마도 작가의 유년 시절의 추억을 되 불러온 것일 수 있겠다. 

그런가 하면 작가의 작업실 뒤뜰에는 100년 된 산수유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 아래 쪼그리고 앉아 나물 캐는 노모를 그린 그림에서처럼 저 사람이 남자 아니면 여자지 싶은 일부 예외가 없지 않지만,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남녀노소 구별이 없다. 개별주체를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보편주체를 그린 것이고, 주제 역시 보편주체를 향한 것이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하나라는 만인 평등사상을 담고 있을 것이다. 평등사상은 사람에 그치지 않는다. 예컨대 꽃 속에 벌도 깃들고, 새도 깃든다. 물고기도 깃들고, 사람도 깃든다. 그렇게 존재가 깃든 꽃들이 하나의 줄기로 연결돼 있다. 존재와 존재가 인연의 끈으로 연결된 연기와 인드라망을 표상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다른 그림을 보면 나무 밑에 개가 배를 하늘을 향한 채 사람처럼 누워서 낮잠을 자고, 또 다른 개는 꽃을 보고 짖는데, 흡사 꽃을 보고 말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처럼 설핏 웃음을 자아내는 해학적인 그림이 있는가 하면, 작가의 그림 속엔 지천으로 꽃이 피는데, 꽃은 심지어 새의 날개에도 피고 물고기의 지느러미에도 핀다. 아마도 사람과 사람이 하나라는 만인 평등사상을 넘어, 사람과 자연이 하나라는, 그리고 그렇게 자연이 낳은 모든 존재가 하나라는 만물 평등사상을 담고 있을 것이다. 

작가의 세계관을 은연중 표출한 경우로 볼 수가 있을 것인데, 아이처럼 순진무구한 마음의 눈으로 보면, 동화적인 상상력의 프리즘을 통해서 보면 실제로도 세상이 그렇게 보인다는 사실을 피력한 것이고, 그러므로 현실과 비현실이 하등 구별될 이유가 없다는 전언을 담고 있을 것이다. 참고로 초현실주의자들은 초현실이 억압된 현실(다르게는 욕망)을 포함하고 있는 것인 만큼, 억압된 현실이 또 다른 현실로서 실현되고 있는 것인 만큼, 초현실이 현실보다 더 지극한 현실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어쩌면 아이들이야말로 타고난 초현실주의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다시 아이가 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그 전언(현실과 비현실이 다르지가 않다는)이 역설적으로 지시하고 있는 상실된 시절(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상실된 시절(어쩌면 존재의 원형)을 그리워하는 이상세계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기서 이상세계를 뜻하는 유토피아는 원래 그 의미가 없는 장소, 부재 하는 장소에서 유래한 것인 만큼, 다만 이상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고, 이상을 표현한 예술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가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이상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반영된 경우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비록 작가의 일상을 그리고, 자신의 관념과 이상을 그린 것이지만, 정작 그림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작가의 경계를 넘어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 상실된 유년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고, 상실된 것을 그리워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렇게 상실감에 대한 보상을 꿈꾼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이상주의자들이라고, 잠재적인 이상주의자들이라고, 적어도 이상(그러므로 어쩌면 꿈)은 보편 인간의 잠재적인 본성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그 이상이며 꿈을 그려놓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형식적인 면에서 작가의 작업은 특이한데, 단단한 스티로폼 덩어리를 조각해 일정한 깊이를 포함하고 있는 저부조 형식의 조형을 만든 연후에, 그 위에 석분(미세한 돌가루)을 도포한다. 전에는 토분(흙가루)을 발랐는데, 아마도 흙(그러므로 땅)의 질감을 의식한 것일 터이다. 지금의 석분으로 치자면 시간의 흔적을 머금고 있는 터실터실한 벽의 질감을 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혹 자연의 성정을 닮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는 지금도 질이 좋다는 퇴적암이 있으면 어디든 발품 파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바탕 재질이 조성되고 나면 그 위에 오방색과 오간색을 중심으로 화려하고 장식적인 채색을 올리는데, 섬세한 나무 조각에 채색을 올린 전통적인 단청이며, 사찰의 꽃 창살 문양, 그리고 꼭두인형을 떠올리게 된다. 

아마도 작가가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조형적 DNA로 봐도 되겠고, 작가의 작업이 유래한 원천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 원천으로 전통적인 민화를 빼놓을 수 없다. 앞서 봤던 만인 평등사상이나 만물 평등사상이, 현실과 비현실이 자유자재로 몸을 섞는 형국이, 그리고 그 저변에 깔린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세계관이, 이를테면 상식과 논리를 넘어서는 의외의 조합으로 세계가 재편되는 것이 모두 민화에 그 젖줄을 대고 있는 것이고, 작가의 그림은 그로부터 자양분을 흡수해 자기화한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조각이면서 동시에 회화이기도 한,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아우르는 자기만의 형식을 연 것이다. 

그렇게 제안되고 있는 조형 가운데 특이한 경우로서 때로 이중 삼중의 화면이 시도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연작이 아님에도, 2개 혹은 3개의 크고 작은 화면이 나란히 병렬되는 것인데, 서로 독자적인 개별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하나의 큰 화면의 일부로서 유기적으로 포함되는, 이중적인 형식구조를 견지하고 있다. 가변적인 설치 방법에 따른 것으로서, 조각과 회화, 평면과 입체로 나타난 장르(그리고 형식)의 경계를 넘어, 공간설치로까지 표현영역의 확장을 꾀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여기에 본격적인 공간설치 작업(환조)으로서 인간군상을 다룬 일련의 작업이 주목된다. 평소 작가의 작업에서는 자연을 관조하는 인간이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에서처럼 자연에 방점이 찍히고, 최소한 자연과 인간과의 상호유기적인 관계에 초점이 맞춰진 만큼, 인간 자신에 초점을 맞춘, 인간군상을 다룬 작업이 이례적인 경우로 보인다. 사각형의 기둥에 발가벗은 사람들이 한 덩어리로 엉켜있는 것인데, 더불어 사는 삶을 표현한 것도 같고, 서로 먼저 오르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도 같다. 더욱이 작가는 일부 작품에서 마치 청군과 백군을 나누듯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색깔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 작가의 그림에서는 보기 드물게 사회적 논평을 시도하고 있지 않은가도 싶다. 자연주의자의 내면의 뜰을 찾은 사회주의자의 방문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크게 보면 자연에 귀의한 삶도 사회 속에서 치열한 삶도 다 같이 의미 있는 삶이고, 존재론적 삶의 갈래들이라는 생각을 해보게도 된다. 


이 일련의 작업에 대해 작가는 무위라고 부른다. 흔히 무위라고 하면, 그 뒤에 자연이 저절로 따라붙는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존재 방식이야말로 타고나면서부터 저절로 무위를 실현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인식은 자연 자체에 미치지 못한다. 처음부터 자연은 인간의 인식이 미칠 수 있는 권역 밖에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범신론과 물활론, 애니미즘과 토테미즘, 그리고 최근의 영성주의를 통해 인간은 겨우 자연이 인간과 마찬가지의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추상해볼 수 있을 뿐, 사실상 자연에 대해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자연은 인간이 저를 무어라고 부르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므로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자연을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는 무위자연을 대질시킨다. 무위자연은 어쩌면 그저 자연과 더불어서 사는 삶을 실천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보다는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삶의 태도와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이를테면 저마다 상실한 동심을 회복하는 일이며, 그 동심으로 세계를 재편하는 일, 그리고 그렇게 상실된 처음 세계 그대로를 되찾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의 본성을, 다시, 그러므로 저마다 나의 본성을 되찾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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