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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주/ 밥상 위의 수사학, 밥그릇에 존재의 집을 짓는

고충환

오현주/ 밥상 위의 수사학, 밥그릇에 존재의 집을 짓는 


보통 추상회화에서처럼 주제가 무의미할 때도 있지만, 그렇게 그림과 상관없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오현주의 그림은 문학적이고 서사적이다. 그림 속에 사연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 이런 경우에 주제는 그림과 무관하지도 않고, 무의미하지도 않다. 그림에 내장된 의미로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기도 하고, 그림을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을 발굴하는 탐침이 되어주기도 한다. 

먼저, <내면 풍경>(2018-2019)을 보자. 내면 풍경은 무의식적인 자기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그러므로 작가는 내면 풍경이란 주제를 빌려 자신의 작업이 사실은 무의식적인 자기, 때론 자신에게조차 낯선 자기, 어쩌면 억압되고 상실된 자기를 찾아 나서는 지난한 과정임을, 그러므로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의 회화에 기울여진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그 무의식적인 자기, 그러므로 어쩌면 작가의 본성이 <또 다른 땅>(2019)을 찾아 나선다. 보들레르는 여기가 아닌 어디라도(그 자체 낭만주의 레토릭을 함축하고 있는 전언으로 봐도 될), 라고 했다. 현실에 대한 부정 의식과 보상심리가 여기가 아닌 저기, 그러므로 또 다른 땅을 지향하게 만든다. 여기서 또 다른 땅은 일종의 유토피아일 수 있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유토피아는 원래 없는 장소, 부재 하는 장소, 그러므로 다만 이상으로만 존재하는 장소를 의미했다. 현실 속에는 없으니, 그림으로라도 이상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그림은 곧 이상을 그리고, 이상세계를 꿈꾸는 것이 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무의식적인 자기가 투영되고, 꿈꾸는 자기가 투사된다(투영된 我...우리, 2020). 여기서 작가는 말꼬리를 흐리듯 우리를 불러들인다. 우리가 뭔가. 관계다. 무의식적인 자기를 그리고 꿈꾸는 자기를 그리던 작가의 주제의식이 관계로 확장되고 심화된 것이다. 그 관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명랑한 동거>(2020)라는 주제가 유래한다. 처음엔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부터 시작해, 이후 점차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로 그 설정이 확장되고 심화된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은 집으로 그 관계가 표상된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에서 집은, 그리고 마을은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삶의 풍경을 표현한 것이고,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진 이상세계를 표상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림도 언어다. 그러므로 작가는 그림을 통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그리고 어쩌면 자신만의 존재의 집을 짓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 작가는 명랑한 동거라고 하면서, 상처투성이 꽃 무덤에 핀, 이라고 흡사 속말이라도 하듯 말끝을 흐린다. 여기서 명랑한 동거와 상처투성이 꽃무덤이 부닥친다. 집으로 표상되는 동거 그러므로 관계가 꼭 명랑하지만은 않다. 그것은 어쩌면 마치 상처투성이의 속말(그러므로 억압된 무의식) 위로 피어난 꽃무덤과도 같다. 동거 그러므로 관계 그러므로 삶의 이중성이고 양가성이다. 다시, 그러므로 작가는 집을 매개로 상처투성이이면서 명랑한, 음과 양이 공존하면서 교차 되는, 이중적이면서 양가적인 삶의 풍경을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삶의 풍경에는 음과 양이, 상처투성이와 명랑함이 동거한다. 유독 작가의 삶이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어느 정도, 우리 모두의 삶이 그럴 것이다.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존재의 삶에는 볕들 날도 있고 어두운 구석도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비록 개인적인 삶의 감정을 그린 것이지만, 사람 사는 꼴이 어슷비슷한 탓에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개인적인 경험이 개별성에 함몰되지 않고, 보편적인 경험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것이 예술이라고 한다면, 작가의 그림은 그 정의에 부합하는 면이 있다. 

여기에 가파른 절벽 위, 아니면 긴 계단 끝자락에 오두막이 있는 그림이 있다. 채도가 낮은 색채감정에 분위기도 어둡다. 아마도 상처투성이 삶을 표현한 것일 것이다. 아프고 고독하고 쓸쓸한 생활감정을 표상한 것일 터이다. 질박한 질감이나 갈색조의 색채감정이 마치 퇴적된 시간의 흔적을 보는 듯 고답적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아마도 유년의 기억을 되불러온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룬다. 그 마을이 올라앉은 지반이 절벽 같고 배 같다. 배? 여기서 작가는 삶의 메타포로서 배를 불러들인다. 삶은 망망대해의 바다를 저 홀로 떠가는 일엽편주 같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흘러가는, 배 같다. 

그런가 하면, 우주를 떠도는 미아 같다는 비유도 있다. 여기서 작가는 우주 대신 초승달을 호출한다. 초승달 위에 마을이 소복하다. 초승달 아래쪽에는 달그림자라도 되는 양 은하수가 흐른다. 은하수가 흐르는 초승달과 그 위에, 그 속에 올망졸망한 마을이, 이번엔, 밝다. 유토피아다. 이상세계다. 우리도 저처럼 은하수를 구름다리 삼아 초승달처럼 예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았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주를 보다 직접적으로 환기하는 그림도 있다. 하늘 위에 뜬 채로 둥글게 환을 그리는 마을이 있고, 그림 아래쪽에 또 다른 마을이 있는 그림이다. 지상의 마을과 하늘 동네를 대비시킨 것일까. 현실적인 삶과 이상세계를 대비시킨 것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하늘 동네가 환을 그리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환은, 원은 서클이고 순환을 의미한다. 아마도 순환하는 삶, 순리대로 사는 삶, 그러므로 어쩌면 자연의 생리를 닮은 삶에 대한 작가의 비전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순리에 역행하는 삶, 자연의 생리에 배치되는 삶이 다반사인 현실과 비교되는 것이어서 그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오는 그림이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서 집은, 그리고 마을은 배(삶의 매타포에 해당하는)에 담겨있고, 초승달(유토피아 그러므로 이상세계를 표상하는)에 담겨있다. 그렇게 집을 담고 마을을 담은 경우로 치자면 밥사발과 국그릇 같은 용기가 이례적이다. 용기에는 알록달록하고 소복한 마을이 담겨있고, 여기에 가로등과 솟대도 서 있고, 더러는 젓가락마저 꽂혀있다. 가로등이 마을을 비춘다면, 솟대는 마을을 지킨다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젓가락은? 그리고 용기는? 사발과 그릇 같은 용기에 담긴 마을은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담보하고 있는 것일까. 

밥상을 차리고 밥을 함께 나누는 일이 여성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여하튼, 전통적으로 가사 노동은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반영한다. 여성의 생활감정을 반영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현실성을 얻는다. 일상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어쩌면 일상 중 가장 현실적인 일일지도 모를, 그리고 여기에 관계를 매개하는 계기로도 작용하는 밥상 차리는 일에서 추출된 상상력이고, 한 끼 밥을 나누는 행위로부터 추상 된 상상력이다. 

그 밥그릇에 알록달록하고 소복한 마을이 담겨있다고 했다. 다른 그림들과 비교해볼 때, 색채감정도 다르고 질감도 다르다. 화면 구성이 심플한 것이 긍정적인 기운마저 느껴진다. 아마도 상처투성이 삶보다는 명랑한 삶을 담았을 것이다. 작가가 꿈꾸는 또 다른 이상세계를 담았을 것이다. 우리네 삶도 그림에서처럼 알록달록하고 소복한, 따뜻한 밥그릇 같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을 것이다. 

여성의 성적 정체성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 자체 대모(큰어머니) 혹은 지모(땅 어머니)의 표상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신화적으로 지모는 생산을 주관하는 땅 신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에서 그릇은 땅에 해당하고, 그 땅으로부터 집이, 마을이,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의 집이, 생명이 생산되고 있다고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음식을 나누는 것에서 관계를 보고, 하나의 밥그릇 속에 담긴 존재의 집을, 삶을, 그러므로 어쩌면 생명을, 우주를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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