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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환/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짓는

고충환

윤덕환/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짓는 


윤덕환의 그림은 회화이면서 드로잉이 강하다. 그래서 드로잉회화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드로잉과 회화는 그 생리가 사뭇 혹은 많이 다르다. 회화가 머뭇거리면서 조율한다면, 드로잉에는 머뭇거리는 과정이 없다. 마치 시인이 날아다니는 단어를 낚아채듯, 사물과 사태의 본질을 직접 드러내는 즉흥성이 있다. 그처럼 드로잉은 우회하는 법이 없다. 다시, 그렇게 드러나 보이는 본질은 객관적이라기보다는 주관적이다. 그렇게 저마다 생각하는 본질, 다른 본질, 차이 나는 본질이 가능해진다. 윤덕환의 그림은 그렇게 자신이 생각하는 사물과 사태의 본질을 드러낸다. 거기에는 사물과 사태의 본질을 직접 드러내는(해석하지 않는) 어린아이의 천진함이 있고, 의미를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해체하고 편집하는 의외성과 파격이 있다. 그 직접성과 의외성이 아르브뤼트와 소박파 미술을 떠올리게 만든다. 

동물 시리즈. 작가는 그림에서 공을 가지고 노는 곰, 정원에 서성이는 곰, 러그 위에 반쯤 기댄 채 정면을 응시하는 고양이, 차를 마시는 코끼리, 그리고 날아오르는 새와 같은 다양한 동물을 보여준다. 실제로 본 것일 수도, 매체를 통해 접한 장면을 기억을 더듬어 그린 것일 수도, 순전한 상상력으로 그린 그림일 수도 있겠다. 어느 경우이건 그렇게 그려진 동물들이 마치 우화에서처럼 사람을 닮았다. 사람처럼 우울해 보이기도 하고, 화난 것 같기도 하고,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하고, 무표정한 것 같기도 하고, 호기심으로 세상을 관망하는 것 같기도 하고, 행복해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아마도 작가에게 동물은 어린아이와 인형처럼 친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객체라기보다는 주체가 동화되고 감정이입 된, 그렇게 주체의 일부가 된 특별한 대상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회전목마를 누군가(아마도 악당 혹은 나쁜 사람)에 의해 구속됐다고 보고, 구속된 말을 해방하기 위해 천사를 보낸다. 다시, 그렇게 작가는 동물을 매개로 이야기를 지어내는데, 이야기 속 동물들이 다름 아닌 사람을 연기한다(흉내 낸다?)는 점에서, 사람 사는 세상의 알레고리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미미 시리즈. 아침에 일어나면 미미는 화분에 물을 주기도 하고, 머리가 길면 미장원에 가기도 하고, 사람들 속에 섞여 책을 읽기도 한다. 쌍둥이 그림으로 유추해 보건대 아마도 작가의 또 다른 자아, 얼터에고, 그러므로 어쩌면 분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특히 사람들 속에 섞여 책을 읽을 때 미미는 책을 읽는다기보다는 다소간 무표정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관찰하는데, 미미와 마찬가지로 무표정한 사람, 생각에 골몰한 사람, 잔뜩 화가 난 사람, 호통을 치는 사람, 커피를 마시는 사람, 코를 후비는 남자, 거울을 보는 여자, 경례하는 군인, 그리고 손에 칼을 든 남자와 같은 사람들이다. 흡사 미미를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는 이 사람들은 다 누구인가. 이 그림에서 작가는 미미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본다. 미미의 눈을 빌려 자신의 세대 감정이며 시대 감정을 반영하고 드러낸다. 
그렇다면 그 감정은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인가. 그 감정의 성분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시대의 창에 해당하는, 그래서 세대 감정에 영향을 주고 시대 감정을 결정짓는 뉴스에서 그 일면을 엿볼 수가 있을 것이다. 저녁 황금시간대 뉴스는 이 시대가 살만한 세상이라기보다는, 오늘 하루도 무사히 살아있다는 것이 그저 고맙고 신기할 따름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기에 급급한 것 같다. 묻지마살인과 토막살인, 스토커와 사이코패스, 성폭력과 성희롱, 간이 배 밖에 나온 사람과 얼굴에 철판을 깐 사람과 양심에 털이 난 사람, 자기 능력 이상을 요구하고 전시하는 피로사회가 생존 지옥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 속엔 일반인과 함께 범죄자와 흉악범이, 사기꾼과 살인자가 섞여 있다. 당연히 암울할 것도 같은데, 암울해야 마땅할 것도 같은데 정작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마도 밝은 색채(작가의 순진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작가는 미미의 눈을 통해 지금 여기의 인간 풍속도(어쩌면 인간 시장)를 예시해준다. 

마을 시리즈. 여기에 마을이 있다. 이런저런 집들이며 건물들이 모여 이룬 마을이다. 재건축 중인 건물, 서커스 천막과 텐트, 빌라와 아파트, 허물어진 성벽, 불에 탄 집과 폐허가 된 집, 교회와 창고, 학교와 방앗간, 운동장과 축구장, 그리고 여기에 무지개 같기도 하고 야외공연장처럼도 보이는 돔 형태의 구조물 사이사이로 녹색의 정원과 나무들이 빼곡하다. 아마도 사실과 실재에 근거해 지은 집이라기보다는 작가가 상상으로 지어낸 건물이고 마을일 것이다. 풍경화를 그린 것일까. 사람도 동물도 보이지 않는, 평범하고 평화롭게 보이기조차 하는 전원풍경 같다. 
사람도 동물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혹 숨어있을지도 모르겠다. 집 속에, 건물 뒤에 숨어있을 수도 있겠다. 흥미롭게도 한 건물이 다른 건물을 칼로 찌르고, 한 건물이 다른 건물을 망원경으로 관찰(감시?)한다. 동물처럼 살아 있는 것이 사람을 흉내 내고, 건물처럼 죽어 있는 것이 사람의 생리를 흉내 낸다. 그렇게 작가가 보기에 처음부터 죽어 있는 것은 없었다. 애초에 무생물은 없었다. 사람도 살아있고, 동물도 살아있고, 집도 살아있고, 마을도 살아있다. 물활론이나 범신론과 같은 영지주의의 태도라기보다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구별이 없는 어린아이의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도 작가는 그런 천진한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재구성한다고 생각된다. 
피카소는 자신이 평생 그린 그림이 종래에는 어린아이처럼 그리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했다. 여기에 가스통 바슐라르는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고, 자신이 보기에 의미가 없는 것이 곧 죽은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생사관을 말하기도 했다. 의미 여부가 생물과 무생물을 가름하고 결정하는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각각 천진난만한 경우와 의미심장한 경우의 차이가 있지만, 어느 정도 작가에게도 타당한 경우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마을 시리즈를 계기로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짓는다고 했다. 유토피아는 어원대로라면 없는 장소, 부재 하는 장소, 그러므로 이상으로만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실제로도 이상주의자들이 유토피아를 꿈꾸기도 했다는 역사적 현실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렇게 작가는 어쩌면 마치 동화책 속에서나 볼 법한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 살만한 세상으로, 그 꿈이 현실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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