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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다예, 세상에서 가장 검은빛 치(淄)

편집부



권다예, 세상에서 가장 검은빛 치(淄) 




누보레알리즘 작가 이브 클라인은 청색에 매료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만의 청색을 만들어 인터내셔널클라인블루라고 명명했다. 그 청색으로 캔버스를 칠하고, 조각상을 칠하고, 몸을 칠하고, 해면을 칠했다. 할 수만 있다면 세상 모든 것을 칠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처럼 서양에서 청색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청색은 하늘을 상징하고, 바다를 상징하고, 우주를 상징하고, 영혼을 상징하고, 영원을 상징하고, 이상을 상징하고, 우울을 상징하고, 고독을 상징하고, 죽음을 상징한다. 상징적인 의미가 무색할 정도로 무분별하게 상징한다기보다는, 그만큼 청색에 특별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서양에 청색이 있다면, 동양에는 먹색이 있다. 예로부터 먹색은 오색이라고 했다. 먹색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명암의 단계를 의미한 것이지만, 상징적인 의미로 사실상 오만가지 색을 함축한다고 보면 되겠다. 그런가 하면 우주의 처음 상태 곧 태초를 암흑이라고 했다. 흑색이야말로 가능한 모든 색채를 잠재하고 있는, 색의 원형이라는 의미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 권다예는 세상에서 가장 검은빛(淄)에 매료된다. 작가에게 검은색은 가장 화려하고 풍요로운 색이다. 세상의 모든 색을 함축하고 있는 오묘한 색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검은색 자체로부터 이처럼 화려하고 풍요롭고 오묘한 색감을 감지하기란 쉽지 않다. 화려하고 풍요롭고 오묘한 색감은 검은색에 함축돼있는 것이지, 표면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색감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색감을 어떻게 표면 위로 불러내 자기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매료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과제로 주어지고, 그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 작가의 작업이다. 

그 방법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 검은색의 잉크를 색 분해하는 과정을 통해 검은색이 함축하고 있는 숨은 색을 드러내 보이는 방법이 그 하나고, 이런저런 색깔을 하나로 중첩 시키는 과정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검은빛을 찾아가는 방법이 또 다른 하나다.
 
먼저 색 분해의 경우를 보면, 보통의 안료 대신 검은색 잉크와 종이가 있어야 한다. 잉크와 종이가 만나면 잉크의 번지는 성질과 종이의 흡수하는 성질이 상호작용하는데, 이때 물 곧 수분이 그 촉매제 역할을 한다. 그렇게 수분을 머금은 종이에 잉크를 떨어트리면 잉크가 종이에 번져나가고 흡수되면서 잉크가 넓게 퍼지는데, 그 과정에서 색 분해가 일어나면서 검은색 잉크에 숨어있던 색이 정체를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그 정체는 종이 안쪽보다는 가장자리에서 더 잘 드러나 보인다. 잉크가 떨어진 중심에서 잉크의 검은색이 점차 엷어지는 가장자리에 이르기까지 오묘한 색채의 스펙트럼이 펼쳐지는 것도, 그리고 잉크가 번져나가다가 멈춘 가장자리에 미묘한 라인을 그려 보이는 것도 주목해볼 일이다. 확대해보면 종이의 질은 균질하지 않은데, 아마도 라인은 그 때문에 생긴 것일 터이다. 

이론상으로 수분을 흡수하는 성질을 가진 매질이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종이와 면천 그리고 석고와 같은. 이처럼 종이의 한계를 벗어나면서 작가의 작업은 설치작업으로 확장된다. 색 분해된 종이를 보여주기도 하고, 면천 조각들이 하나로 쌓인 무더기를 보여주기도 하고, 석고를 소재로 하면서는 입체 조형 작업을 보여준다. 그렇게 종이 작업이 실험실의 시료를 떠올리게 한다면, 형형색색의 면천들이 어우러진 설치작업이 주술적인 의미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비정형의 석고 덩어리를 소재로 한 조형 작업이 상처를 암시한다. 보통 사람들이 그렇듯 석고 덩어리 자체는 무감각하고 무뚝뚝해 보인다. 거기에 검은색 잉크가 스며들고 번지면서 잉크에 숨은 색이 설핏 드러나 보이는데, 마치 무감각하고 무뚝뚝한 사람이 자기의 상처를 수줍은 듯 고백하는 것도 같다. 그리고 작가는 스스로 페인팅 프린터라고 명명한 일종의 장치를 통해 직접 그림을 그린다기보다는 그림이 그려지는 조건을 제공하는 일련의 설치작업을 예시하기도 한다. 그 자체 그림 그리는 기계의 또 다른 경우와 버전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림이 그려지는 조건을 제공하는? 그 경우로 치자면 페인팅 프린터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작가의 작업이 다 그런데, 캔버스 위에 그린 타블로 작업에서 그 또 다른 경우를 엿볼 수 있다. 이번에 작가는 색 분해를 통해 검은색에 숨은 색을 보여주는 대신, 역으로 색깔들을 중첩 시켜 검은색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알다시피 이 색 저 색 섞다 보면 처음엔 원하는 색을 얻을 수 있지만, 결국에는 검은색에 도달하게 된다. 이 색 저 색 섞어보는 형식실험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검은빛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렇게 작가는 캔버스에 묽게 갠 물감을 붓고 캔버스를 기울이는데, 그러면 물감이 흘러가다가 멈추면서 맺힌다. 그렇게 또 다른 색으로 같은 과정을 거듭 반복하면서 화면 속에 색색의 레이어가 형성된다. 비록 화면에 물감을 붓고 기울인 것은 작가이지만, 정작 그림을 그리는 것은 우연이다. 그런 점에서 어느 정도 무의식의 발굴에 초점을 맞춘 자동기술적인 측면도 없지 않다. 그렇게 드러나 보이는 화면이 비정형의 얼룩을 만든다는 점에서 작가의 회화는 어쩌면 우연성이 만들어낸 비정형의 얼룩 회화로 정의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가다 보면 실제로도 마침내 작가가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검은빛에 도달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 대해서는 색 물이 든 시료를 채취한다거나 페인팅 프린터와 같은 장비를 설비하는 등 실험실을 방불케 한다는 점에서 개념미술의 가능성이 읽히고, 형형색색의 면천 조각을 설치한 작업에서는 주술적인 의미도 읽힌다. 그런가 하면 세상에서 가장 검은빛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어쩌면 검은빛으로 상징되는 자기 내적 자아 그러므로 진아를 찾아가는 과정일 수 있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이고 명상적인 측면도 없지 않다. 

예술은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비가시적인 것을 드러내 보이는(암시를 통해서 드러내 보이는) 기술이라고 했다. 세상의 모든 색채는 검은색 속에 숨어있고, 그렇게 숨은 색을 바깥에 드러내 보이는 것이 작가의 작업이란 점에서 작가의 작업 역시 그 기술이며 예술의 정의에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이때 드러나 보이는 것은 단순한 색깔만은 아닐 것이다. 색깔과 함께 화려하고 풍요롭고 오묘한 감각과 감수성, 감흥과 감동 역시 같이 드러나 보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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