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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영/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을 헤아리는, 존재의 증명과도 같은

고충환




김승영/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을 헤아리는, 존재의 증명과도 같은 





슬픔, 우는 부처. 여기에 부처가 있다. 그런데 부처가 운다. 우는 부처다. 사실 우는 부처는 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을 살짝 비튼 것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원작과의 차이를 미처 알아보지 못한 채 지나치기 쉽다. 원작에서는 턱에 가볍게 손가락을 대고 있는데, 마치 눈물을 훔치듯 그 위치를 눈 밑으로 옮겼다. 그리고 여기에 고개를 살짝 앞쪽으로 기울인 것도 같다. 슬픔의 감정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까. 그런데 부처는 왜 우는가. 

사실 반가사유상은 사유 곧 생각에 잠겨 있다. 다시, 그렇다면 부처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슬픔을 생각한다. 연민을 생각한다. 불교에서는 삶을 고해라고 했다. 고통의 바다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부처는 곧 삶의 고해를 슬퍼하고 연민하는 부처다. 이타적인 부처다. 작가는 이기적인 시대에 이타적인 부처를 소환해 대비시킨다. 그렇게 어쩌면 사유 그러므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 슬픔에 대해서 생각하고(그러므로 어쩌면 겪고) 연민을 생각하는(겪는) 것일 수도 있겠다. 작가가 살짝 비튼 생각하면서 우는 부처는 바로 이처럼 사유 그러므로 생각을 재정의하게 해준다. 

당신은 당신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 원래 이 작품은 창령사터 오백나한을 소재로 박물관에 설치한 동명의 설치작업에서 유래했다. 오백나한을 박물관에 설치하고 연출하는 일을 작가에게 맡긴 것이다. 고미술과 현대미술이 컬래버한 것인데, 그 자체 시간의 집인 박물관에 현대미술이 들어가 또 다른 공간 경험을 유도하는 것으로 외국에서는 더러 있었지만, 국내에서는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서 오백나한 자체가 보여주는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다채롭고 다정다감하고 인간적인 표정과 감정도 그렇지만, 작가의 설치작업의 결정체랄 수 있는 적고벽돌(폐 벽돌)을 이용한 설치작업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작가는 전시장 바닥에 벽돌을 깔고 그 위에 좌대에 놓인 오백나한을 모셨는데, 그렇게 마치 전돌 바닥으로 조성된, 드문드문 이끼가 자라는 옛길을 걸어 오백나한을 만나는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다. 흥미롭게도 벽돌 한 장 한 장에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토닥토닥, 아버지, 당신은 당신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와 같은 문자가 텍스트로 아로새겨져 있다. 서로 격려하고 응대하는 말도 있고, 상대방을 위로하는 흉내말(의태어)도 있고, 저마다 속으로 다짐하는 말도 있다. 길을 걸으면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생각해보라는 주문 같기도 하고, 때로 오백나한이 넌지시 건네는 위로 같기도 하다(벽돌에 어떤 문구가 실리는가에 따라서 작업의 성격과 의미가 달라진다). 

그리고 작가는 당신은 당신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 라는 영문자 텍스트를 네온으로 쓰고 철망 구조물 위에 설치했다. 아마도 앞으로 또 다른 상황이 주어진다면 동명의 또 다른 버전의 작품이 제안될 것이다. 벽돌에 새긴 문구가 작업의 성격을 결정하듯 또 다른 상황이 또 다른 의미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자유를 물어오는 작가의 텍스트는 역설적으로 자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자신에게 구속된 저마다의 자기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나침반. 여기에 나침반이 있다. 땅을, 대지를, 길을 상징하는 흙 위에 나침반이 놓여 있다. 나침반은 방향을 가리키는 도구다. 여기서 나침반은 아마도 방향을 상실한 현대인, 그러므로 어쩌면 정체성 혼란을 겪는 현대인을 증언하는 역설적인 기호로서 제안된 것일 터이다. 현대인이 앓는 증후군에는 (순간) 판단 불능증도 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는 판단도 선택도 할 수가 없다. 그동안 인문학과 담론의 층위에서나 얘기되던 존재론적 물음(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이 마침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보통 사람들의 삶에 직접 답을 청구하기 시작했다는 느낌이다. 

마인드(마음). 여기에 검은 물이 담긴 원형 수조가 있다. 한가운데 부분이 속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가는 과정을 반복해 보여주는 이 수조를 작가는 마음이라고 부른다. 검은 물이, 마치 밑도 끝도 없는 심연에라도 가닿을 듯 천천히 빨려 들어가는 물길이 정적이고 관조적이고 명상적인 분위기로 이끈다. 작가의 작업에는 이처럼 곧잘 검은 물이 담긴 수조가 등장한다. 여기서 수조는 거울에 해당한다. 물은 거울처럼 반영하는 성질로 인해 자기반성적인 계기로 이끈다. 그리고 검은 물은 무의식을 상징하고 심연을 상징한다. 나의 삶을, 인격을, 정체성을 형성시켜준 추억과 기억과 상처가, 억압된 욕망이, 때로 자신마저 넘어선 아득한 원형적 기억,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의 원형이 잠자고 있는 의식의 저장고를 표상한다. 그렇게 작업은 그 물거울에 무엇(좌절된 욕망? 실패의 기억?)이 비치는지, 당신의 마음은 누구(자기_타자?)를 반영하는지 물어온다. 

뇌. 여기에 뇌가 있다. 낡은 저울에 올려진 뇌가 있다. 뇌의 나이는 낡은 저울만큼이나 오래되고 낡았다. 어쩌면 낡은 저울보다 더 아득한 세월을, 시간을, 세상을, 역사를 살았는지 모르고, 기억보다 더 아득한 기억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선혈보다 붉은, 붉다 못해 시커먼 녹만큼이나 오래 살았을 것이다. 아마도 저울도 뇌도 녹보다 더 오래 살 것이다. 그렇게 늙은 뇌가 낡은 저울에 올려져 있다. 뇌의 무게라도 재는 것일까. 뇌의 무게를 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질량의 무게를 재는 것일까, 아니면 세월의 무게를 재는 것일까, 그도 저도 아니라면 사람이 뇌와 동일시하는 인문학적이고 감정적인 용량의 무게를 재는 것일까. 사실 뇌는 쇠사슬을 소재로 형태적 유사성에 착안해 만든 이미테이션이다. 여기서 작가는 이미테이션이 무색할 만큼 녹슨, 낡은, 늙은 뇌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뇌에 나를 대입해 보게 만든다. 

자화상. 여기에 한 장의 사진이 있다. 그리고 작가가 사진을 벽에 건다. 그리고 벽에 걸린 사진이 떨어진다. 그러면 작가가 다시 사진을 벽에 걸어 고정시킨다. 그리고 다시 사진이 무너져 내리고 작가는 또 다시...이처럼 영상은 밑도 끝도 없는 반복과정을 보여주고, 영상 속 작가는 마치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행위를 반복해 보여준다. 마치 영원히 리플레이 되도록 설정된 영상장치 속에 갇힌 것도 같다. 시지프스의 형벌인가. 
그런데 가만히 보면 작가가 기를 쓰고 벽에 거는 사진 속에 작가가 있다. 등신대 크기의 작가와 똑같다. 그렇게 사진 속에도 자신이 있고, 사진 밖에도 자신이 있다. 그렇게 작가는 영상에 그리고 사진에 이중으로 갇혀있다. 그렇게 이중으로 갇힌 채 내가 나를 벽에 걸고, 그러므로 세우고, 또 세운다. 이 작업을 작가는 자화상이라고 부른다. 작업 속에 작가가 등장해서가 아니라, 작업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의미할 것이다. 말하자면 나, 자아, 자기, 자신, 주체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를 향한, 실패로 점철된, 실패로 끝나도록 운명지어진, 유의미하지만 무모한 몸짓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화상은 여전히 질문으로 남는다. 그렇게 어쩌면 자화상은 처음부터 제목이 아닌, 질문이었다.       
 
쓸다. 쓰다, 와 쓸다, 가 중의적으로 포개진. 작가의 작업 <쓸다>는 각 쓰다, 에 방점이 찍힌 작업과 쓸다, 에 무게중심이 실린 작업, 두 가지 버전이 있다. 두 버전을 하나의 작업으로 한 것은 쓰기와 쓸기가 비록 외형상 다르지만, 그 의미가 서로 통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쓰기도 마음이 하는 일이고, 쓸기도 마음과 관련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먼저, 쓰다, 를 보자. 새벽녘이나 늦은 밤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에 덩그렇게 놓인 의자에 앉는다. 그리고 책상에 놓인 종이 위에 속말을 적는다. 그리고 구겨서 버린다. 그러면 작가가 그렇게 버려진 종이를 일일이 펴서 방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둔다.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관객의 참여로 인해 비로소 완성되는 프로젝트(수행)형 작업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벽녘이나 늦은 밤이란 시간인데, 개인이 무장 해제된 상태에서 오롯이 자신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다. 작가는 인위적으로 그 시간대의 조명이며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작가의 설치작업에서 공간연출은 결정적이다. 그리고 그렇게 무장 해제된, 오롯이 자기에 집중하는 개인이 저마다의 속말을 쓰면서 스스로 치유한다. 

그리고, 쓸다, 의 경우를 보자. 아마도 새벽녘에 스님이 마당을 쓴다. 자기 키만 한 빗자루로 마당을 쓴다. 마당에는 굳이 쓸만한 것도 없어 보인다. 쓸기 전과 쓴 후의 마당이 달라 보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스님은 매일 새벽마다 마당을 쓸 것이다. 무슨 일인가. 수행이다. 비로 마당을 쓸 때 마당에는 빗자루가 지나간 자국이 남는다. 꼭 마당이란 종이에 쓴 속말 같다. 아마도 자기를 비워내는 말일 것이다. 그렇게 스님은 매일 새벽녘에 스스로 비워내기 위해 마당을 쓴다. 여기서 작가는 스님이 비질하는 영상과 함께, 앞선 작업에서 관객들이 저마다의 속말을 써서 버린 종이를 태워 만든 재를 전시한다. 공간을 두 개의 방으로 구획하고, 한 방에는 영상을, 그리고 다른 방에는 영상 없이 비질하는 소리와 함께 재를 전시했다. 그렇게 스님이 스스로 비워낸 말이, 관객들의 속말이 재가 되었다. 무념무상, 마음 그러므로 번민도 없고 생각 그러므로 번뇌도 없다. 그렇게 치유가 되었다. 

창. 일전에 작가의 작업에서 마주한 감동을 기억한다. 벽에 난 쪽창에 노란 셀로판지가 붙어 있었다. 노란 셀로판지를 통해 본 바깥의 정경이 졸지에 과거 속 풍경이 되었다. 기억 속 풍경을 대면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는 현실 속 풍경에 다만 셀로판지가 매개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현실이라고 그렇다고 과거라고도 말할 수는 없는 풍경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할 수 없는 풍경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작가는 전시장에 좁은 골목을 설치하고 그 안쪽에 작은 쪽창을 냈다(창문이 실제로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창문이 없는 경우에 작가는 모니터로 창문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리고 창문 표면에 이번에는 녹색 셀로판지를 붙였다. 그렇게 창밖으로 보이는 옆집의 정원이 또 다른 풍경으로 다가왔다. 달랑 셀로판지 한 장만으로 현실을 기억 속 풍경으로, 비현실적 풍경으로, 존재하지 않는 풍경으로 변질시키는 작가의 감각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타워. 타워는 대형 스피커를 쌓아 만든, 그 속에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방이 있고 공간이 조성된 탑이다. 소재가 스피커인 만큼 당연히 매질은 소리가 되겠다. 지금까지 작가는 이런저런 경로로 자신의 작업에 소리를 도입하곤 했지만, 아마도 타워야말로 소리를 질료로 사용하는 조각 그러므로 소리 조각(사운드스컵처)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몇 가지 버전이 있는데, 처음에 타워는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에 설치되었고, 스피커에서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소리를 채록해 들려준다. 일전에 선 사상에 경도된 존 케이지가 일상에서 채록된 일상 음, 자연 음, 우연 음으로 소리 조각의 전기를 열었는데, 그 생각이 작가와도 통한다고 본다. 그처럼 탑 속에서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주고받는 말들 그러므로 어쩌면 생각들이 교차하고 교환되는 광장을 추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버전으로 바벨탑이 있다. 역시 스피커를 쌓아 만든 탑인데,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에 착상한 작업이다. 옛날에 사람들은 한데 모여 살았고, 하는 말도 똑같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탑을 쌓으려 했는데, 같은 말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그 욕망을 꿈꾸게 했다. 그래서 신이 사람들 저마다 다른 말을 사용하게 해 뿔뿔이 흩어지게 했고, 덩달아 공사도 중단되었다. 그런 만큼 바벨탑은 인간의 무모한 욕망을 상징한다. 그렇게 작가는 스피커 탑 가운데 우물을 설치하고, 우물 위로 쇠사슬이 도르래 운동을 반복하게 했다. 여기서 하늘을 향해 오르내리는 쇠사슬은 인간의 무모한 욕망을 상징하고, 바닥에 있는 우물은 인간의 무모한 욕망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자기반성적인 거울을 상징한다. 

그렇게 타워의 기독교 버전이 있다면, 불교 버전도 있다. 각 욕망 버전과 명상 버전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오백나한을 소재로 한, 박물관과 컬래버한 전시의 부분으로 도입된 것인데, 작가는 스피커로 탑을 만들고 사람들이 탑 안쪽에 조성된 방에 들어갈 수 있게 했다. 스피커로 된 벽 사이사이에 속으로 들어간 감을 만들고, 그 감에 오백나한을 모셨다. 방 중앙에는 저마다의 마음을 들여다보도록 유도하는, 그렇게 자기 자신(자기_타자)과 만나게 하는 명상의 우물이 설치돼 있고,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명상을 돕는다. 여기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는 부처님과 오백나한의 말씀을 표상한다(감각적 질료로 표현한 것).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타워는 타워가 담기고 읽히는 맥락 여하에 따라서 사회적인 의미를 얻기도 하고, 종교적인 의미를 획득하기도 하고, 명상적인 계기로 이끌기도 한다. 어느 경우이건 언어를, 소리를, 말을 매질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로 통한다. 

기억. 영화가 끝날 때 화면에 영화를 만든 관계자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뜨면서 천천히 올라간다. 엔딩 크레딧이다. 작가는 엔딩 크레딧의 형식을 빌려 기억의 스크린을 만들었다. 엔딩 크레딧과 비교해보면 이름이 올라가는 대신 내려가는 것이 다르다. 엔딩 크레딧과 다른 점은 또 있는데, 엔딩 크레딧에서 영화 관계자들의 이름이 화면에 뜬다면, 작가의 작업에서는 작가가 기억하고 있는, 작가가 알고 있는, 작가의 개인사와 얽힌, 작가의 인격을 형성시켜준, 작가의 정체성을 만들어준 사람들의 이름(영문자로 표기된)이 뜬다. 
그 이름들이 모여 전체적으로 하나의 보이지 않는 형상을 이루는데, 처음에는 사람 형상의 실루엣을, 그리고 나중에는 영문자 I를 이룬다. 바로 나, 자아, 주체를 의미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내가 보고 들은 것, 그러므로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다. 그래서 랭보는 나는 타자라고 말했고, 자크 라캉은 나는 당신이 보고 있는 지금 여기에 없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작가는 기억을 매개로 타자들을 소환하고, 자기_타자들을 소환한다. 그러므로 자기를 소환한다. 

반사, 반영. 여기에 적벽돌로 축조된 원형의 우물이 있다. 그리고 그 위쪽으로는 신문지 다발이 매달려 있는데, 마치 허리케인이 지나간 자리 같은, 돌풍 같은, 회오리 같은 형태다. 알다시피 신문은 일용할 소식을 아침저녁 식탁 위로 배달해준다. 식사를 거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친절하게도 손안에 배달해주기도 한다. 그렇게 현대인은 일용할 시사, 일용할 토크, 일용할 상식, 일용한 지식, 일용할 소문으로 포화 직전이다. 아마도 회오리 같은 형태는 그렇게 신문이 배달해주는 어지러운 세상사를 상징할 것이다. 천장에 매달린 신문 더미의 가녀린 끝이 우물의 수면에 닿아있다. 천천히 물을 빨아들인 신문 더미는 마침내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사는, 너무 많은 정보로 과부하에 걸린, 차고 넘치는 정보가 오히려 판단을 흐리고 선택을 방해하는, 그런, 현대인의 초상을, 불구의 현실을 그려놓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온열 의자가 있다. 시장에 가면 손바닥만 한 좌판을 펼쳐놓고 물건을 파는 할머니들이 있다. 할머니들은 전기가 들어오는 온열 의자에 앉아서 추위를 견디는데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는 것이 꼭 휴대용 온돌(방) 같다. 아마도 철공소에 맡겨 주문 제작했을, 칠이 벗겨진 자리가 반들반들해진 온열 의자에서 치열하고 속 깊은 삶의 태도가 느껴진다. 

이런 온열 의자도 그렇지만, 사람들 저마다 속에 담고 있는 말을 한자리에 모아 말들이 서로 충돌하는 현장을 통해서 소통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 스피커 탑이나, 사유하는 부처(반가사유상)를 우는 부처로 각색해 저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부처, 존재론적인 부처의 존재를 불러낸 우는 부처(우리는 모두 어쩌면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앓는, 저마다 우는 부처들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죽은 새에 이르기까지 김승영의 작업에는 시대를 관조하는 비판과 풍자의 와중에도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을 헤아리는 깊이가, 인간애와 연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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