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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옥/ 월명동의 기억, 마인드맵으로 그린

편집부




서진옥/ 월명동의 기억, 마인드맵으로 그린 





개인적으로 서진옥은 작가보다는 기획자로 기억에 남아있다. 군산 월명동에 소재한, 오랫동안 빈집으로 남아 방치돼 있던 여인숙을 개조해 창작공간을 연 초기부터 문을 닫기까지(현재 군산 평화박물관) 근 10년간 기획을 도맡아 했다. 지역 리서치에 바탕을 둔 전시기획과 입주작가 관리 운영, 그리고 지역연계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당시만 해도 문화예술에 관한 한 불모지에 다름 없던 군산 지역의 대표적인 창작공간 및 대안공간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근에 일본식 사찰 동국사를 비롯해 수많은 적산가옥이 원형을 보존하고 있어서 지금도 건축 연구를 위해 많은 사람이 현장을 찾는,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고 있는, 도시재생의 표본실을 방불케 하는, 도시 전체가 근대에 시간이 멈춘 근대생활사박물관을 연상시키는 지역이며 도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짧지 않은 세월을 이 지역과 함께하면서 정도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에게 군산은 제2의 고향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전시 기획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작가로서 전시에 참여하고 했었던 모양이다. 사실 기획자로서보다는 작가가 베이스였고, 그런 만큼 원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전시 주제가 <확장된 마음_월명동>이다. 바로 작가가 10년간 몸담았던 동네를 소재로 한 것이다. 모르긴 해도 월명동과 함께한 세월이 작가의 인격을 형성시키고,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고, 작가의 예술혼으로 아로새겨졌을 것이다. 그렇게 월명동의 추억은 아마도 앞으로도 한동안 작가의 작업에 유형무형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전시 주제로 유추해 보건대 아마도 기획자로 변신한 그동안의 경험이 예술에 대한 개념을 확장 시키고, 인격을 확장 시키고, 마음을 확장 시켜 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확장된 고맙고 넉넉한 마음을 담아 이번 전시를 준비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작가는 오픈 마인드와 고양이를 함께 떠올리게 된다. 근대 도시의 골목길에는 왠지 고양이가 있어야 제격일 것 같다. 그렇게 마치 근대에 시간이 멈춘 도시 속에서 작가도 덩달아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할까. 이번 전시에서는 그런 인상, 말하자면 자기를 품어준 동네에 대한 고맙고 넉넉한 마음씨와 함께, 일종의 근대 감정이라고 불러도 좋을 회화적 색감과 질감과 분위기가 묻어나는, 그 자체 작가가 얼마나 근대에 시간이 멈춘 그 동네에 동화되었는지를 말해주는 경향성의 회화를 확인해볼 수 있다. 

예술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했다. 그동안 지역 리서치에 기반한 전시기획으로 시대를 반영했다면, 정작 본인의 이번 전시에서는 시대를 감정으로 녹여내는 방법으로 풀어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시대를 감정으로 녹여낸다? 한눈에 보기에도 작가의 그림은 메시지 중심이나, 그 사물 대상을 알만한 재현적인 경향성의 회화와는 거리가 멀다. 

외관상 작가의 그림은 추상 아니면 반구상에 가까운 경향성의 회화를 예시해준다. 알다시피 추상은 의미 내용보다는 형식논리에 강하다. 점, 선, 면, 색채, 양감, 질감과 같은 형식요소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회화라고 보는 논리다. 회화는 다만 회화일 뿐이라는 논리다. 물론 여기서 그 자체 완전한 추상은 없다거나,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추상은 없다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형식논리에 천착한 모더니즘 패러다임과는 배치되는 논리 같고 말 같지만, 여기서 그 형식요소에 마음을 담았다면(녹여냈다면), 그렇게 형식요소로 하여금 감정의 표상이 되게 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여기서 반구상이 소환된다. 주지하다시피 반구상은 알만한 사물 대상을 추상화한 것이다. 추상의 배경으로 감각적이고 재현적인 현실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런 만큼 추상적 형식 속에 알만한 사물 대상이 암시되는 회화적 형식이라고 해야 할까. 작가의 경우로 치자면 사물 대상과 함께 사물 감정이 암시된다. 여기서 사물 감정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근대 감정과도 통하는 것인데, 마치 색 바래고 빛바랜 오랜 벽면 앞에 선 듯 그 속에 시간을 응축하고 있는 것 같은, 시간의 앙금을 보는 것 같은, 파스텔 톤의 중성적이고 고답적인, 우호적이고 부드러운 색채감정이며 질감이 그렇다. 

사물 감정은 그렇다 치고, 사물 대상은 또한 어떻게 암시되는가. 작가의 그림은 얼핏 무의미한 추상회화처럼 보이지만, 잘 보면 크고 작은 색면들이 하나로 어우러진 색면 구성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리고 그 색면들을 눈으로 좇다 보면 얼핏 알만한 형상이 보이는 것도 같다. 위에서 내려다본, 그러므로 부감 시점으로 본 밭 같고, 마당 같고, 지붕 같고,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지붕을 맞대고 있는 동네 같다. 아마도 동네에 대한 작가의 마음속 지도, 그러므로 월명동에 대한 일종의 마인드맵을 그려놓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마음속 지도라고 했고, 마인드맵이라고 했다. 작가는 월명동의 현실 그러므로 실제를 그렸다기보다는 마음으로 되불러낸 이미지를 그리고, 추억 그러므로 기억으로 소환한 분위기를 그렸다. 기억을 소환한다는 것, 그것은 결국 그리움을 되불러온다는 것이며, 그리움으로 화한 실제를 현재에 되새긴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억은 현실 그대로를 재현해주지는 않는다. 기억은 현실을 변형시키는데, 좋은 기억은 과장하고 나쁜 기억은 축소한다. 여기서 좋지 않은 기억이 현실을 축소하는 것은 가능한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한 심리적 방어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억은 현실을 재현하기보다는 각색하고, 때로 없는 현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자체 기억의 역학(혹은 미학)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얼핏 작가의 그림은 색 면과 색 면이 조화를 이룬 정적이고 안정된 화면 구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그리기와 지우기가 수도 없이 반복되는 치열한 과정을 숨겨놓고 있다. 그림의 논리로 치자면 그리기와 지우기가 반복 중첩되는, 심리로 치자면 드러내기와 숨기기가 교차하는 밑도 끝도 없는 과정(하이데거라면 대지와 세계의 변증법 그러므로 은폐와 비은폐가 교차하는 과정이라고 했을)을 함축하고 있다. 말하자면 작가의 그림에서 그리기와 지우기의 반복과정 자체는 형식논리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 이면에서 이런 기억과 관련한 치열한 과정(다시, 하이데거를 인용하자면 투쟁)이 뒷받침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월명동에 대한 작가의 추억에는 때로 상처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 트라우마마저도 그리움의 색감과 질감과 분위기로 승화시켜 놓고 있는 것에 작가의 그림의 미덕이 있다(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그리움이다). 

이처럼 작가는 월명동의 과거와 현재를, 월명동에 얽힌 사사로운 기억을, 기억과 더불어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을 조형으로 옮겨 놓고 있다. 그렇게 작가가 실제로 그려놓고 있는 것은 월명동의 기억(그러므로 어쩌면 추억)이지만, 동네에 대해 떠올리는 감정(근대 감정?)이 비슷한 탓에 작가의 그림은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그렇게 기억을 그리고, 추억을 그리고, 그러므로 그리움을 그린 것이며, 그리움의 색감과 질감과 분위기를 그린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상실한 고향의 색감을 떠올려주고, 잃어버린 원형의 질감을 감촉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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