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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정은/ 회화, 실존적이며 동물적이고 감각적인 존재를 증명하는

고충환




이이정은/ 회화, 실존적이며 동물적이고 감각적인 존재를 증명하는 





전작에서 작가는 꽤 오랫동안 상품을 그렸다. 대형마트에 상자째 쌓여있거나 진열된 상품을 그렸다. 작가에게 상품은 욕망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상품이 좋았다. 문제는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에 있었다. 욕망이 작동할 때 자본주의가 매개되는 것이 문제였다. 욕망은 자신으로부터 유래하고 자기에게 속한 것 같지만, 사실 욕망은 자본주의가 만든 것이다. 욕망은 언제나 결여와 결핍을 전제로 한다. 하나의 욕망은 다른 욕망을 불러들이기 위한 구실로서만 의미가 있고, 더 큰 욕망으로 나아가기 위한 계기의 크기만큼만 충족된다. 

그렇게 자본주의는 욕망을 생산하고, 때로 없는 욕망을 만들어내기조차 한다. 그렇게 욕망은 끝이 없고, 그렇게 욕망의 무한순환구조가 완성된다. 그 순환구조 속에서 욕망은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다. 좋으면서,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이율배반적이고 자기 모순적인 대상이다. 코카콜라나 브릴로 상자와 같은 상품을 통해 소비사회의 도래를 기꺼워했던 앤디 워홀과는 사뭇 다른 태도라고 해야 할까. 욕망하면서, 동시에 욕망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고 해야 할까. 

욕망의 그림자가 뭔가. 페티시즘 곧 물신이다. 작가는 물신이 자기를 전시하는 매장을 보여주고(사람들이 물신을 욕망하고), 스스로 주인공이 돼 공연하는 무대를 보여주고(사람들이 물신에 열광하고), 물신 자신을 위한 기념비를 세운다(사람들이 물신을 기린다). 그렇게 작가는 소비가 권장되는 사회의 명과 암을 그린다. 비록 그림 속에 실제로 등장하는 사람은 없지만, 물신에 사로잡힌 현대인의 암울한 초상을 그린다. 물질적 풍요가 오히려 사람들을 공허하게 만드는 소비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그렸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의 그림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도 판이하게 변했다. 판이하게? 비록 외관상 형식상의 변화가 두드러진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그 이면에 흐르는 자기반성적 사유와 비판 정신은 그대로였다. 다만, 그 대상이 도시와 문명사회로부터 자연으로 옮아갔을 뿐. 자연이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고 해야 할까. 실질적으로는 철암 그리기와 태백 순례(?)가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철암 그리기는 할아텍이 주축이 돼 정기 혹은 비정기적으로 태백 일대의 탄광 지대를 찾는 스케치 여행을 꽤 오랫동안 지속해왔고, 작가도 그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한때 우리나라의 경제를 책임진 주요 산업지역 중 하나지만, 당시만 해도 사람들이 다 떠나고 없는 버려진 땅이었다. 그렇게 작가들은 버려진 탄광을, 버려진 주거지를, 버려진 자연을 찾아 순례를 떠났다. 그 순례는 어쩌면 저마다 예술의 존재 이유를 찾아 나선 순례이기도 했다. 

한 번씩 가면 몇 날 며칠을 현장에서 지내기도 하는데, 그때 작가에게 헐벗은 땅이, 버려진 자연이 눈에 들어왔다. 자본의 착취가 이번에는 땅에, 자연에 가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버려졌지만, 버려진 자연이 무색하게 스스로 복원하는 자연의 자생력이 작가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도시에 익숙한 삶을 살던 작가가 자연 자체에 처음으로 맞닥트렸다고 해도 좋았다. 처음으로 자연을 보게 되었고, 처음으로 자연에 눈뜨게 되었다고 해도 좋았다. 

그렇게 마주한 자연의 생태는 도시의 그것, 문명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무엇보다도 개념화할 수가 없었다. 개념화를 전제로, 이념화하는 과정을 거친 연후에라야 비로소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헤겔은 예술을 이념의 감각적 현현이라고 했다), 그렇게 작가가 상품을 매개로 자본주의 물신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한다면, 자연은 아예 개념화할 수도, 이념으로 옮길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림으로 그릴 수도 없었다. 자연은 처음부터 개념 밖에 있었고, 이념의 외부에 있었다. 그럼에도 자연을 그린 그림이 있다면, 그때의 자연은 다만 개념화된 자연, 이념화된 자연을 그린, 그러므로 부분적인 자연, 불완전한 자연을 그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자연의 개념이며 이념을 그린 것이지, 자연 자체를 그린 것이 아니었다(자연 자체와 자연의 개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그렇다면 자연 자체를 어떻게 그릴 수가 있는가. 자연 자체를 그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도대체 자연 자체가 무슨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나투라와 피직스로 구분한다. 자연의 질료 곧 물질적 실체를 가지고 있는 감각적 자연을 피직스라고 한다면, 그 감각적 자연을 밀어 올린 원인 그러므로 자연성, 다시 그러므로 어쩌면 자연 자체가 나투라다. 우리 식으로 치자면 기운생동이 여기에 해당한다. 기운 그러므로 에너지와 운율 그러므로 리듬과 생동 그러므로 변화무상한 생명(다르게는 생성변화)이 상호작용하면서 하나로 합체된 말이다. 그렇게 기운생동 자체 그러므로 자연 자체는 정해진 형태도 색깔도 없는 채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그릴 수가 있는가. 여기서 가시적인 것은 비가시적인 것의 거울(그러므로 상징 혹은 표상 혹은 알레고리)이라는 말에 주목할 일이다. 예술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기술이다. 그 기술을 가능케 하는 것이 감이고 암시다. 암시가 있어서 관념적인 것, 이념적인 것, 추상적인 것, 그러므로 어쩌면 자연 자체도 비로소 그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감각적 자연이 자기 속에 숨겨놓고 있는 생명을 그리고, 에너지를 그리고, 리듬을 그리고, 호흡을 그린다. 여기에 작가와 자연이 상호작용하는 교감을 그린다. 내게서 자연으로 건너간 것을 그리고, 자연에서 나에게 건네진 것을 그린다. 그리고 그렇게 건너가고 건너오는 것들의 상호작용을 그린다. 슬픈, 쓸쓸한, 외로운, 막막한, 아득한, 먼, 화사한, 발랄한 풍경이 그렇다. 그렇게 감정이입을 매개로 자연은 풍경이 된다. 인문학적 풍경이 되고, 인문학 자체가 된다(풍경은 인문학이다). 

여기서 메를로 퐁티의 우주적 살 개념에 주목해 볼 일이다. 나와 자연 사이에는 우주적 살로 채워져 있어서 주체와 객체로 구분할 수가 없다. 내 속에 자연이 있고, 자연 속에 내가 있다. 그러므로 자연을 그린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이미 속해져 있는, 내가 연장된 나의 일부를 그린다는 것이고, 나를 그리는 것이 된다. 작가가 그림에 붙인 제목을 보면, 거의 <거기, ooo> 하는 식인데, 그러므로 거기, 내가 속해져 있었던 곳, 거기, 나에게 일어난 일(그러므로 사건)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여기에 작가는 주제를 <살아있음에 대하여> 라고 부른다. 작가는 자연과 대면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이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느낀다. 낯선 자연, 생경한 자연, 원초적인 자연, 마치 처음 보는 자연, 그러므로 어쩌면 자연 자체, 다시 그러므로 살아있는 자연이 자신에게 일깨워준 사실이다. 

그렇게 그려진 작가의 그림을 보면 액션 페인팅 혹은 추상표현주의를 연상시키는, 그저 무분별하게 덧칠된 붓질과 두툼하게 발라 올린 물감층의 우연한 조합과 재구성이 느껴질 뿐, 제목이 아니라면 자연을 알아볼 수는 없다. 제목에 기대여 보면 설핏 무지개 같은 것이, 노을이나 일출 같은 것이, 폭포 같은 것이, 그리고 어쩌면 들꽃 같은 것이, 다시 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봄이나 겨울 속의 가을 같은 것이 보이는 것 같기는 하다. 그리고 여기에 정색을 하고 보면 하늘 같은 것이, 섬 같은 것이, 호수 같은 것이, 수면에 일렁이는 빛 여울 같은 것이 보이는 것도 같다. 보인다기보다는 암시되는 것, 그러므로 암시를 통해서 보이는 것 같다. 

앞서 작가에게 자연을 그린다는 것은 자신이 이미 속해져 있는, 자신이 연장된 자신의 일부를 그린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자기를 그리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속해져 있었던 곳(그러므로 자연)이며, 그 속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그린다고도 했다. 그렇게 살아있는 자연이 자신에게 일깨워준 사실 곧 살아있다는 각성을 그린다고도 했다. 그렇게 작가는 어쩌면 자연에 감정이입하고 자연과 교감하는 순간을 그리고, 불현듯 자연과 혼연일체가 된 찰나의 느낌을 그리고, 종래에는 자연도 지워지고 나도 지워지는, 자연도 지워지고 형상도 지워지는, 그리고 그렇게 다만 우연하고 무분별한 자국으로만 남은, 몸이 지나간 자리며 존재가 머문 흔적을 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연과 더불어서 황홀했고, 자연과 함께 격렬했던, 주체할 수 없는 파토스를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는 형상을 넘어서, 이미지 너머로 회화를 확장하고 있었다. 물성과 제스처, 그리고 특유의 색채감정만으로 오롯한, 그리고 여기에 형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리고 그렇게 형상과 추상을 재정의하게 만드는, 그런, 회화의 지평을 열어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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