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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진, 리얼픽션에서 철빛 풍경으로

편집부




장우진, 리얼픽션에서 철빛 풍경으로 





리얼픽션(2016). 현대인은 신을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게 폐기된 신의 빈자리를 차지한 것이 물신(페티시즘)이다. 경제 제일주의 원칙과 효율성 극대화의 법칙으로 추동되는 물신의 작품이 도시다. 도시는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꽃이다. 물신의 욕망은 무분별하고 무차별적인데, 경제성이 없는 것들,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들이 도시의 그림자로 추방된다. 도시는 다만 자본주의의 욕망을 전시하는 파사드와 스펙터클을 위한 몫일 뿐, 그림자 연극을 위한 자리는 없다. 재개발 현장에서 쫓겨난 원주민들,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노숙자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하루살이들과 같은 도시의 추방자들이 고단한 몸을 누일 자리는 없다. 

그렇게 추방된 그림자(이면)는 그림자답게 도시의 파사드(표면)를 통해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소격효과 혹은 소외효과)가 소환된다. 사람들은 표면이 곧 현실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 현실은 사실은 물신이 퍼트린 풍문(이데올로기 효과)일 뿐, 진정한 현실은 따로 있다. 그렇게 표면에 가려진 이면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현실을 낯설게 해야 한다. 그렇게 도시를 소재로 한 작가의 사진에서는 하늘 위로 열기구며 비행선이 날고, 건물과 건물 사이로 끊어진 사다리가 다시 연이어지고, 빌딩의 유리창 전면에는 돛단배가 비친다. 

그렇게 사람들은 다시 꿈꿀 수 있게 되었다. 물신이 봉쇄한 여름(그 자체 꿈과 이상을 상징하는)으로 가는 문이 다시 열렸다. 다시, 그렇게 물신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박탈했는지, 도시 속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상실했는지가 비로소 드러나 보이게 된다. 낯설게 하기를 통해서 억압된 현실을 드러내고, 픽션을 매개로 리얼을 폭로하는 작가만의 전략이고 방법이다. 

철빛 풍경(2020). 울산 장생포는 한때 고래잡이로 유명했다. 경기가 좋을 때는 지나가는 개도 입에 종이돈을 물고 다닐 정도라고 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포경이 금지되면서 도시는 쇠락했고, 그 빈자리에 공단이 들어섰다. 그렇게 여수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화학공단이 조성되었고, 고래잡이의 추억을 간직한 구도심과 초현실주의의 SF 버전을 떠올리게 하는 공단이 공존하는, 친근하면서도 낯선 지금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굴뚝에서는 연신 하얀 연기를 뿜어내고, 밤이면 수많은 인공불빛 아래 철 파이프와 기둥으로 조성된 건물이 골격을 드러내는 도시가 기묘한 느낌을 자아내고, 지금도 좋았던 시절을 추억하기 위해 부둣가의 선술집이며 카페를 찾아 사람들이 모여드는 도시가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작가는 그렇게 보기 드문 풍경에 매료되었다. 구도심과 공단이 공존하는, 산업현장과 향수가 교차하는, 초현실주의와 도시재생이 교직 된 도시의 다중적인 지층과 그 지층이 펼쳐 보이는 파노라마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일상을 기록했다. 비록 사진 속에 사람은 없지만, 사람들의 사연을 담았다. 마치 사람을 찍듯 사물 초상화를 찍었다. 바다를 상징하는 파란색에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유영하는 고래가 그려진 굴뚝을 찍었고, 건물 유리창 전면에 비친 고래 조형물을 찍었다. 공단의 녹슨 탑을 찍었고, 타일 마감한 해운업체 사무실 건물을 찍었고, 고래고기를 팔지 않는 고래고기 전문점을 찍었다. 현실과 함께 사람들이 상실한 것들을 찍었고, 여전히 과거를 기억하는 현실을 찍었다. 

비록 사진 속에 사람은 없지만, 사람들의 사연을 담는 작가만의 방법이라고 했다. 지금은 작은 미술관으로 바뀐 오래된 동사무소 건물을 소재로 한 작업에서 그 일면을 엿볼 수가 있다. 미술관 옆에는 칠공주 카페가 입주해 있는데, 카페지기에 해당하는 동네 할머니들에게 엿들은 사연을 건물 전면에 텍스트로 중첩 시켰다. 건물을 무채색으로, 그리고 텍스트를 컬러로 처리해 대비시켰다. 얼핏 보면 전체가 무채색으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로소 컬러가 보이고, 텍스트가 보이고, 사연이 보인다. 한 시절을 증언하는 사연을 매개로 과거와 현재를 대비시키는, 부재를 통해 존재(한때 존재했었음)를 상기시키는 작가만의 방법이다. 한때 고래잡이로 유명했다가 지금은 공단으로 바뀐 도시의 철빛 풍경(녹슨 도시에 기억을 흔적으로 간직하고 있는)을 재현하는 작가만의 방법이다. 

그렇게 작가는 감각적 현실이 억압하고 있는 현실, 그러므로 어쩌면 진정한 현실을 폭로한다(리얼픽션). 공단이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고래잡이의 추억을 드러낸다(철빛 풍경). 그렇게 폭로하고 드러낸 작가의 사진은 그러나 사실은 폭로와 드러낸다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현실 그대로처럼 보인다. 보통의 도시며 공단을 소재로 한 사진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도시가 억압하고 있는 현실은, 공단이 기억하고 있는 추억은 작가의 사진 속 어디에 있는가. 감각적 현실 속에 숨어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작가의 사진은 감각적 현실 자체를 재현한 사진이라기보다는 감각적 현실을 해체하고 편집하고 재구성한 디지털사진이다. 주지하다시피 디지털사진에서 감각적 현실의 편집과 재구성은 기본적인 기능에 속하지만, 영락없는 현실 자체처럼 보이는 현실 속에 억압된 현실이며 상실된 현실을 숨겨놓고 있다는 점에, 잘 안 보이지만 잘 보면 비로소 보이는 미세한 차이를 운용하는 감각적 기지를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 미덕이 있고 특수성이 있다. 거리의 문제인데, 그 차이가 크면 공상이 되고, 차이가 아예 없으면 현실 자체와 다를 바 없는 것이 된다. 차이를 최소화하면서 차이를 드러낼 때 밀도감도 긴장감도 감동도 크다. 절약의 법칙이라고 해야 할까. 작업에서 결정적인 것은 감각이라고 하는데, 그 자체 감각의 게이지 곧 감각이 작동하는 방식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다시, 사실을 말하자면 현실을 편집하고 재구성하는 사진은 진즉에 아날로그 사진 시절에서부터 있었다. 그러므로 사진을 매개로 한 현실의 재구성은 어쩌면 아날로그 사진에서 예비 되고 디지털 이후 보편화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문제는 이를 통해 작가가 현실을 재구성하는 것이 현실이 억압하고 있는 현실을 폭로하고, 상실된 현실을 되찾기 위해서다. 여기서 억압된 현실을 폭로하는 것이든 상실된 현실을 되불러오는 것이든 자신이 머리에 그리는 제3의 세계(그러므로 어쩌면 가능한 세계)를 제안한 것이란 점에서 유토피아(아니면 디스토피아 그리고 어쩌면 헤테로토피아?)의 또 다른 한 경우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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