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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희/ 휘어지고 기울어진, 그러므로 어쩌면 노마드적인 공간 경험

고충환




장은희/ 휘어지고 기울어진, 그러므로 어쩌면 노마드적인 공간 경험 





모든 존재는 공간을 점유하면서 흐르는 시간을 산다. 시간(아니면 삶)을 겪는다고 해도 좋다. 어떤 식으로든 시간과 공간에 매개되지 않고 존재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렇게 시간과 공간은 삶의 조건이 된다. 그중 작가 장은희는 공간에 관심이 많다. 사사로운 감정이며 생활 경험을 공간화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작가는 원래 조각을 전공했는데, 가장 물질적인 질료를 다루는 조각의 장르적 특수성에 부합하는 관심사며 형식논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사적 감정과 경험치를 공간으로 환원해 표현하는 것, 그리고 때로 공간을 통해 세계를 보는 것, 그리고 역으로 세계를 공간에 투시해 보는 작업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존재의 보편 조건인 공간을 매개로 한 것이란 점에서 존재론적인 작업이다. 그리고 비록 사적 감정과 경험치를 표현한 것이지만,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그 매개 역할을 하는 공간 경험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사적 작업의 경계 너머로 확장되고 공감을 얻는다. 

그렇다면 작가는 자신의 공간 경험을 어떻게 예시해주고 있는가. 보들레르는 여기가 아닌 어디라도, 라고 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다. 그러나 현실원칙이 발목을 잡아 마음대로 떠날 수도 없다. 여기서 작가는 자신을 가공된 포장육으로 둔갑시켜 택배로 보낸다. 그러면 나는 원하는 어디로든 갈 수가 있다. 다소간 엉뚱하고 그로테스크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욕망을 부피로 환원한(사실은 자신의 몸을 고기로 환원한) 최초의 공간화 작업이 되겠다. 

그렇게 작가의 공간 작업은 자신의 몸을 부피로 환원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사람들이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는 거리가 있다. 전깃줄에 앉은 새들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작가는 아마도 이 정도 공간이면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지 않고 쾌적할 수 있겠다 싶은, 그래서 1인 전용 공간이라고 불러도 좋을, 한 개인에게 할애된 공간을 입체로 조형한다. 크기로 치자면 1인용 침대나 타일이 가설된 욕실 정도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조성된 공간은 일종의 작은 집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주지하다시피 집은 세계로부터 주체를 단절시키면서 보호한다. 집으로 보호받고 싶으면서, 동시에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을 두려워한다고 해야 할까. 그 자체 집(어쩌면 존재론적인 집)의 양가성이라고 해야 할까. 어쩔 수 없이 사회생활을 하고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끊임없이 자기만의 공간을 꿈꾸는(그러므로 어쩌면 현실도피와 일탈을 꿈꾸는) 존재의 부조리를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이 곧잘 앉아 쉬곤 했던 계단을 입체로 조형하는데, 작가의 공간화 기획이 직접 공간을 떠내는 형태를 취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다만 공간을 암시하는 다른 작업과는 구별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자신의 생활공간을 실제로 떠낸 것인데, 자신의 손때가 묻은, 자신과 호흡을 같이했던 공간 그대로를 이미테이션으로 옮긴 것이란 점에서 사적이고 각별하고 살가운 작업이다. 그런 사적 작업의 다른 예를 찾아볼 수가 없어서 좀 그렇지만, 다름 아닌 자기로부터 비롯한 경우란 점에서 자기반성적인 작업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아마도 다음 기회에 좀 더 발전시켜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빈 공간을 떠내는, 그러므로 어쩌면 비가시적인 공간을 가시화하고, 비물질 공간을 물질로 채우는 레이첼 화이트리드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도 덧붙이고 싶다. 역발상으로 공간을 해석한 경우란 점에서, 그렇게 공간 해석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 경우란 점에서 좀 더 파고들어도 좋을 것이다. 

전형적인 조각의 문법으로 치자면 카빙(깎아내기)과 몰딩(주조와 주형 작업) 그리고 캐스팅(떠내기)을 들 수가 있을 것인데, 그중 작가는 캐스팅 곧 떠내기 방식에 주력하는 편이다. 기법을 보고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작가의 작업은 생활 오브제 친화적이란 점에서, 재제작된 레디메이드를 예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네오다다의 연장선에서 읽히는 부분이 있다. 

이런저런 재료를 이용해 공간을 떠내고 오브제를 떠내는데, 각종 포장 용기를 떠낸다. 택배가 늘어나면서 덩달아 포장 용기도 늘어났는데, 포장 용기에 보면 물건을 고정시키기 위한 스티로폼(때로 종이와 플라스틱) 소재의 고형물이 들어있다. 여기서 작가는 물건을 빼내고 남은 고형물의 빈 속을 그대로 떠낸다. 그렇게 떠낸 형태를 보면 그 출처를 알만한 경우도 있지만, 때로 도대체 뭘 떠낸 것인지 종잡을 수 없을 때가 있다. 분명 조형이 유래한 모본이 있음에도 사실은 원본과는 상관없는 제3의 조형이 예시되는 것인데, 그 자체 모본(원본)과 사본과의 관계를 매개로 조각의 또 다른 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빈 공간을 물질로 채워 감각적 실체를 부여한 것이란 점에서는 공간에 대한 역발상이 엿보이고, 스티로폼 고형물과 고형물을 떠낸 조형물을 대비시킨 것에서는 조각에서의 주형(거푸집)과 조각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그렇게 생활 오브제, 다시 말해 재제작된 레디메이드를 제안한 작가는 다시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마치 재개발 현장에서 뜯어온 건축 구조물의 파편을 연상시키지만, 사실은 작가가 일일이 직접 떠내고 만든 것이다. 마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삶의 흔적들을 채집하고 진열해 놓은 근대생활사박물관의 유물이며 수장고를 연상시킨다고 해야 할까. 시간의 화석을 떠올리게 한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유추해보자면, 아마도 작가는 허물어진 집 속에서 부분적으로 타일이 떨어져 나간 욕실과 욕조를 탐색했을 것이고, 항상 습기를 머금어 눅눅한 개수대 밑쪽을 탐방했을 터이다. 그리고 그렇게 현장에서 수거한, 사실은 일일이 이미테이션으로 떠내고 만든 오브제(유사 오브제)를 이용해 공간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관객들이 그렇게 재구성된 공간 속을 거닐면서 저마다의 의미를 재구성하게 만든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작가는 때로 물성을 배반한다. 보통 사물은 고유의 물성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견고한, 단단한, 평평한, 유기적인 것과 같은. 여기서 작가는 타일 조각을 무슨 원고지나 되는 것처럼 허공에 날리는데(매달아 놓는데), 타일 고유의 물성을 종잡을 수 없게 만든다. 그렇게 오브제(그리고 유사 오브제)의 또 다른 임의적인 용법을 열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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