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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산/ 천상의 소리, 존재가 공명하는 소리

고충환


강화산/ 천상의 소리, 존재가 공명하는 소리 


나의 작품에 있어서 대전제는 우연의 지배다. 우연의 지배란 전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우연처럼 작용해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의미를 지닌다...화면에 등장하는 직선과 원은 삼라만상의 모든 사물을 의미하며, 동시에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상징한다. 이렇듯 본인의 작업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와 함께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본 생명체의 존재를 표현한 것이다.,,문자와 철, 청동의 발견으로 문명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지만, 문명의 발달로 삶이 행복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지점이 있다. 
작가 노트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그리고 여기에 삶과 죽음과 같은 존재론적인 문제, 있음과 없음, 우연과 필연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문제, 그리고 여기에 자연과 인간, 문명과 자연과의 관계 문제가 있다. 전형적인 거대 담론의 문제의식에 해당하는 주제들이다. 한때 후기모더니즘의 바람이 분 적이 있다. 어쩌면 그 바람은 지금도 여전한지도 모르겠다. 주지하다시피 후기모더니즘은 모든 종류의 거대 담론을 의심한다. 그리고 다중주체(주체란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와 저자의 죽음(하나의 작품이란 타자들과 주고받은 내밀한 대화의 결과물일 따름이다)과 미시 담론(개별주체의 이야기는 역사적 담론만큼이나 의미가 있다)을 진단과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 제안이 현대미술의 생태계를 바꿔놓았고 지금도 바꾸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런 바람에도 불구하고 거대 담론의 문제의식이 무효화 되지도 않거니와 무효화 될 수도 없는 일이다. 어쩌면 후기모더니즘이 진정 폐기를 주장한 것은 거대 담론 자체가 아니라, 그 세목들이며 실천 논리들일지도 모른다. 담론은 담론일 뿐, 현실원칙의 입장에서 거대 담론은 무효화될 수도 폐기될 수도 없다. 앞으로도 여전히 예술의 계기가 되고 사유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여하튼 이토록이나 가벼운 시대, 감각적인 시대, 표면적인 시대에 작가 강화산은 우연과 필연, 문명과 자연,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문제와 같은 거대 담론을 제안하고 있어서 새삼스럽고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헤겔은 예술을 이념의 감각적 현현이라고 했다. 감각적 질료를 빌려 이념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질 들뢰즈는 감각 철학이라고 했다. 감각을 매개로 철학을 하는 것이다. 작가가 꼭 그렇다. 작가의 머릿속엔 우연과 필연으로 직조된 문명사적 비전으로 가득 차 있고, 상황을 봐가면서 그 비전을 평면으로, 오브제로, 설치로, 영상으로 풀어낸다. 


형식적으로 작가의 작업은 크게 그리기에서 화면을 만들고 구축하는 방법으로 진화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기와 만들기, 이 두 과정은 눈에 띄게 단절되기보다는 그리기에서 빠져나오면서 다음 공작 단계의 이면이며 부분으로 스며들고 합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선후랄 것도 없이 회화적 프로세스 위에 만들고 구축하는 과정이 덧대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먼저 회화적인 프로세스를 보면 원색의 색채가 화면에 스미고 번지는 것이 수묵에서의 선염법을 연상시키는데, 부드럽고 화사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 비정형의 붓질에 의한, 아마도 캘리그래피에서 착상되고 변주된 것으로 보이는, 문자 같기도 하고, 알 수 없는 기호 같기도 한, 아마도 무의식 그대로를 받아쓴 듯(자동기술법?) 끄적거린 흔적처럼도 보이는 조형이 덧대어지는데, 문명의 3 원소(문자, 철, 청동) 가운데 하나인 문자를 의미할 것이다. 유기적인 색채와 비정형의 붓질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 몸 그림을 연상시키고 감각적인 그리기를 떠올리게 된다. 어느 정도 무의식에 자기를 의탁한, 몸이 부르는 대로, 감각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림이라는 말이다. 

인상적인 것은 문자를 표현한 부분인데, 흥미롭게도 상감 기법이 적용되고 있다. 아마도 건축재료를 이용해 점토판과 같은 판을 만든 연후에, 그 위에 문자를 새김질하고, 그 표면에 덧칠하고 갈아낸 것이다. 그 질감이나 색감이 발굴된 유물을 떠올리게 되는데, 유적으로서의 문자를, 화석화된 기호를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때로 그 위에 단면을 잘라 만든 나무 조각이 덧붙여지는데, 아마도 자연을 표상할 것이다. 이처럼 문자를 소재로 한, 원형과 사각형 형태의 화석 이미지(문자가 아로새겨진 점토판?)가 대개는 화면의 중앙에 위치하는데, 문명의 중심(문자는 문명의 중추다)을 표상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는데, 그런 존재의 집을 표상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판 자체가 벽감처럼 화면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데, 실제로 발굴된 터의 느낌을 주기 위한 것일 터이다. 

작가가 제안한 문명의 3 원소 중 문자가 그렇다. 그렇다면 나머지 철물은 작가의 작업 중 어디에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가. 아마도 작가의 작업에서만 볼 수 있는 조형적 특징이랄 수도 있을 것인데, 와이어와 리벳 그리고 동판 조각과 같은 철물들을 이용해 조형을 견인한다. 복수의 와이어를 팽팽하게 당겨 리벳으로 고정시키는데, 일정한 높이의 나무 조각을 거치대로 사용하면서 입체의 효과를 준다. 

와이어가 중첩된 직선을 만들면서 기하학적 구조가 두드러져 보이고, 보기에 따라선 작업과 마찬가지로 복수의 현으로 이루어진 현악기를 변주하고 추상화한 것도 같다. 해보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연주가 가능할 것도 같고, 튕겨 보면 최소한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앞서 말했듯 화면의 중앙에는 벽감처럼 화면 안쪽으로 꺼진 부분이 있어서 현악기의 울림통을 연상시킨다. 음악이 사람들을 동하게 하는 것과 같은, 존재와 존재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관계를, 감동을 의미할 것이다. 세계의 중심에서 발원한, 그렇게 존재들에 가닿는 공명하는 소리를, 공명하는 기운을, 공명하는 에너지를 표상할 것이다. 

철물을 이용해 악기를 조형하고 음악을 조형한 것인데, 아마도 작가가 제안한 문명의 3 원소에 예술을 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악기를 연상시키는 형태에 연유한 것이지만, 이 일련의 작업에서 기하학적 구조가, 수학적 질서가, 그리고 음악이 손에 잡힌다. 예로부터 음악은 수학으로 여겼다. 그리고 수학은 기하학적 구조로 표상되고, 내적 질서를 표상했다. 지금은 시각적 이미지와 관련해서 더 많이 알려진 신성 비례나 황금비율 같은 가치개념도 하모니(조화)와 리듬(운율 혹은 율동)이 그런 것처럼 사실은 이보다 먼저 천상의 소리를 암시하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악기를 떠올리게 하고 음악을 연상시키는 작가의 작업은 이로써 자기 내면에 내적 질서의 성소를 짓는 한편으로, 그 성소에 천상의 소리(내면의 소리? 우주의 소리? 존재가 공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려는 기획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우연과 필연이, 자연과 문명이 직조되면서 공명하는 소리를 표상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로써 작가는 묻는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삶의 질도 덩달아 행복해졌는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 우리는 가벼운 시대, 감각적인 시대, 표면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 거대 담론은 무거워서 싫고, 현실은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다. 오직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고 현실인, 이미지가 현실을 삼키고 진실을 삼키고 모두를 삼키는 이미지 정치학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시대이기에 우연과 필연, 문명과 자연, 자연과 인간 간 진정한 관계 설정을 묻는 작가의 작업은 그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온다. 나에게서 발원한 소리가 너에게 가닿아 천상의 소리로 공명을 일으켰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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