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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희/ 새벽, 세상의 모든 경계가 지워지는, 혹은 열리는

고충환


강승희/ 새벽, 세상의 모든 경계가 지워지는, 혹은 열리는 


김포 작업실에 앉아 있으면 여백을 생각하게 된다. 평야가 펼쳐지고, 한강 하류의 넉넉함이 있다. 비어있음이 좋고, 한적한 공간이 좋다...정적이고 고독을 느낄 수 있는, 여기에 커다란 여백을 주어 더 허전하고 비어있는 공간을 표현한다. 그 공간과 더불어 어쩌면 고독함을 넘어 자유로운 사유를 표현하고 싶다. 
작가 노트


작가의 김포 작업실에서 보면 평야가 펼쳐져 있고, 드문드문 집이 보이고, 창문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하늘이 보인다. 인근에는 한강 하류가 흐른다. 속설에 흐르는 강물 옆에 집을 지으면 우울해진다고도 하는데, 정작 작가는 이 적막하고 심심한, 허허롭고 고요한, 눈에 띄는 변화도 없고 별반 시선을 끌 만한 것도 없는 풍경이 여백을 떠올리게 해서 좋고 고독해서 좋다. 자연스럽게 한강 하구를 걷는 것이, 논밭 사잇길을 걷는 것이 작가의 산책코스가 되었다. 그대로 작가의 그림을 보는 것 같고, 작가의 그림 속에 들어온 것도 같다. 

그동안 작가는 새벽의 어스름한 대기에 감싸인 도시를 그렸고, 한강 변을 그렸고, 제주 오름을 그렸다. 그동안 도시에서 한강으로, 바다에서 제주 오름으로 소재는 변했지만, 언제나 그 시간대는 새벽이었다. 아마도 적막하고 심심한, 허허롭고 고요한 새벽의 기운이, 색조가, 분위기가 여백을 떠올리게 해서 좋고 고독해서 좋았을 것이다. 청회색의 색조도 그렇거니와 아득하고 막막한 느낌의 정조로 미루어 볼 때도 새벽은 작가에게 그저 시각을 지시하는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새벽은 경계 위의 시간이다. 시간과 시간 사이의 비시간이다. 존재가 잠정적인 존재에서 존재로 건너가기 직전의 시간이다. 존재가 잠정적인 존재에서 의식적인 존재로 막 깨어나는 순간이며, 아직 깨어나지는 않은 미몽의 시간이다. 사람은 매일 깨어나고 죽는다. 이 말은 논리적 비약도 문학적 수사도 아니다. 매일 재생되고 갱신되는 것인데, 이때 삶을 재생하고 갱신하는 것은 죽음(죽음 같은 잠)이다.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다. 죽음이 삶을, 타나토스가 에로스를 정화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매번 새 삶을 예비하는 것이다. 

그렇게 삶과 죽음 사이, 밤과 낮 사이에 존재하는 새벽은 다만 경계를 지시할 뿐, 엄밀하게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고 비시간이다. 미처 시간이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운, 부재 하는 시간이다. 잠정적인 존재는 이처럼 부재 하는 시간의 경계를 넘어 존재로 건너온다. 부재를 넘어 비로소 존재가 된다. 역설이다. 부재가 없으면 존재도 없다.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다. 그러므로 어쩌면 부재가 존재의 근원이고, 죽음이 삶의 원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새벽에 감응하면서, 이런 경계에 대해서도 어렴풋하게 인식의 눈을 떴을 것이다. 새벽에 대한 작가의 경험치가 그저 감각적 경험의 경계를 넘어 존재론적인 층위로까지 그 의식의 촉수가 가닿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경계 위로 무엇이 열리는가. 작가는 그 경계 위에서 무엇을 열고 무엇을 보고 싶은 것인가. 작가의 그림은 아득하고 멀다. 다른 그림들도 그렇지만, 특히 바다를 그린 그림에서 경계가 없고 끝이 없다. 하늘과 바다를 가름하는 경계가 지워지면서, 마치 경계 너머로 사라질 것 같고, 경계 속으로 빠져들 것 같다. 그렇게 사라지는 경계의 끝에는,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심연이 있고, 내면이 있다. 어쩌면 상실한 것들이 있고, 잊힌 것들이 있다. 그리고 아마도 존재의 원형이 있다. 칼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곧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바다는(그리고 어쩌면 강도 마찬가지) 반복 상징이고, 자기가, 존재가 유래한 원형 그러므로 존재론적 원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제주가 고향이고, 여기에 공교롭게도 줄곧 한강을 그리고 바다를 그린다. 곧잘 산을 그리고 나무도 그리지만, 이때의 산이나 나무마저도 정서적으로는 강과 바다에 부수되는 경우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바다야말로 작가의 내면 정서를 견인하는 정서의, 감정의 원형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원형은 다르게는 고향이라고 해도 좋고, 일종의 고향 의식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고향은 지정학적 장소로서보다는 상실된 고향감으로 보면 좋을 것이고, 그러므로 상실된 존재(이를테면 유년과 같은, 그리고 어쩌면 좌절된 꿈과 같은, 그리고 존재의 근원 같은)를 그리워하는 감정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작가의 그림은 아득하고 멀다. 작가의 시점은 항상 이쪽에서 저편을 바라보는 관조자의 시점이다. 거리두기의 시점이고, 그리움의 시점이다. 세상과 나 사이에 거리가 있어야 비로소 그 틈새로 정서가 스며들 수 있고 그리움이 배어날 수 있다. 그래서 관조적이다. 명상적이다. 내면적이다. 작가는 비록 알만한 강을 그리고, 바다를 그리고, 오름을 그리고, 구름을 그리고, 미몽의 잠에서 꿈꾸듯, 깨어나듯 가물거리는 바다 건너편 도시의 불빛을 그리지만, 사실은 이런 알만한 감각적 대상을 넘어서 있는 것을 그린다. 외형적인 형태를 따라 그린다기보다는 자기 내면에서 길어 올린 내면 풍경을 그리고 심의적인 풍경을 그린다. 정서로 응축된 분위기를 그리고, 정서로 환원된 분위기를 그린다. 

발터 벤야민은 분위기를 아우라라고 불렀고, 실제로는 멀리 있는 것인데, 마치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이라고 했다. 여기서, 멀리 있는 것이 뭔가. 신이고, 정신이고, 원형이고, 영적인 기운이고, 그리고 아마도 상실된 것을 그리워하는 감정이다. 그렇게 작가는 그리운 감정을, 그 색감을, 그 질감을, 그 느낌을, 그 분위기를 질료를 빌려 눈앞에 소환하고 있는 것이다. 감각적인 것을 통해서 비감각적인 것을 보고, 가시적인 것을 매개로 비가시적인 것을 불러오는 것인데, 예술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기술 그러므로 어쩌면 암시의 기술이라는 정의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게 작가는 한라산을 그리고, 백록담을 그리고, 오름을 그린다. 바다를 그리고, 구름을 그리고, 폭포를 그린다. 자작나무를 그리고, 소나무를 그린다. 수평선 너머로 꿈꾸듯 깜박거리는 불빛이 그곳에 도시가 있음을 말해주는 암시적인 풍경을 그리고, 여명으로 날이 밝아오는, 수평선과 지평선을 경계로 나뉘는 풍경을 그리고, 칠흑 같은 밤에 달빛에 반사되면서 드문드문 하얀 속살을 드러내 보이는 숲과 길을 그린다. 아득한, 가 없는, 막막한, 깊은 풍경을 그린다. 

그렇게 그려진 작가의 그림에는 평면이 없다. 얼핏 밋밋해 보이는 평면도 사실은 수도 없이 중첩되고 뭉개진 결과로서, 그 이면에 치열한 과정과 세부가 오롯하다. 그렇게 그림은 찰진, 터실터실한, 거친 듯 부드러운 느낌이다. 빛에 대한 감수성으로 치자면 마치 벨벳처럼 빛을 자기 내부에 흡수해 들이는 감미로운 느낌이다. 그렇게 경계를 세우기보다는 경계를 지우는 느낌이다. 개별 소재의 존재가 강조되기보다는 사물 대상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인 덩어리를 이루는 느낌이다. 

점을 찍으면서, 때로 뭉개면서 사물 대상을 형상화해 나가는 것인데, 사물 대상을 스스럼없이 침투하고 침범해 들어오는 터치가 때로 형상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해체를 위한 것이라는 느낌이다. 찍고 뭉개고, 구축하면서 해체하는 유기적인 과정이 특유의 질감을, 색감을,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아마도 붓과 함께 니들이나 스크레이퍼와 같은 판화 도구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알다시피 작가는 회화보다 먼저 동판화로 일가를 이룬 이력을 가지고 있고, 이미 진즉에 판화를 할 때부터도 회화적인 판화를 위해 형식실험에 매진한 부분이 있고, 그런 만큼 회화에서도 역시 가능한 판법을 구사하면서 자신만의 차별화된 질감을, 색감을,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숲으로 빼곡한 산속에 끊어질 듯 이어지는, 드문드문 산길이 드러나 보이는 풍경이 있다. 그리고 칠흑 같은 밤에 달빛 아니면 자동차 불빛과 같은 인공조명으로 설핏 그 실체를 드러내 보이는 자작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 풍경도 있다. 칠흑 같은 산을 넘어 새벽이 밝아오는 풍경도 있다. 칠흑 같은 밤과 어스름한 새벽이 대비되는 이 일련의 풍경에 대해서는 아마도 작가의 심의적인 풍경이라고 해도 좋고, 어쩌면 풍경의 형식을 빌린 작가의 자화상, 그러므로 자기 고백적인 자화상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를테면 칠흑 같은 세상에 새벽을 기다리는. 아니면 마찬가지 의미지만, 그리워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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