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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형/ 흔적에서 행위로, 혹은 흔적은 어떻게 그림이 되는가 하는 문제

고충환



김동형/ 흔적에서 행위로, 혹은 흔적은 어떻게 그림이 되는가 하는 문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낡은 성벽에 난 비정형의 얼룩과 우연한 크랙에서 풍경을 보고, 홍수와 같은 재해를 보고, 전쟁을 본다. 심지어 먼 성당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듣기조차 한다. 남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을 보고 듣는 유별난 능력이라도 타고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보들레르는 예술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상상력이라고도 했지만, 상상력으로 보는 것이 맞겠다. 남들은 쉽게 지나치는 미미한 흔적에서마저 상상력을 작동시켜 유의미한 뭔가를 캐내고 발굴하는 예술가적 자의식 혹은 근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실제로도 낡은 벽면은 많은 것을 상상하게 만든다. 마치 발에 빨판이라도 달린 것처럼 벽면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담쟁이넝쿨을 보면 저런 채색화가 없을 것 같고, 시멘트를 되는대로 터실터실 발라 놓은 벽체를 보면 저만한 단색화도 없을 것 같고, 반쯤은 자연이 그리고 반쯤은 세월이 그린 낡은 벽면에 난 비정형의 얼룩과 크랙을 보면 저만한 그림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연만 한, 세월만 한, 그리고 여기에 미장 일을 업으로 하는 노동자만 한 예술가도 따로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그렇게 그림은 화가만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작가 김동형은 유년 시절 건축 일을 하는 아버지 덕에 자연스럽게 건축 현장을 일상으로 접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동안 뭘 어떻게 그릴까 고민도 많았고 시행착오도 있었을 터이지만, 그 와중에도 시행착오의 밑바탕에는 이런 유년의 경험이 감각으로 남아 작용했을 것이다. 건축 현장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 기능 중심으로 볼 수도 있고, 구조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일 수도 있고, 자본과 경제와 같은 사회(학)적인 의미로 접근할 수도 있고, 그리고 벽면과 같은 세부가 가지고 있는 표면 질감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그중 작가는 아마도 벽면이 가지고 있는 표면 질감에 끌렸을 것이고, 그 질감이 감각적 기억으로 내장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름 아닌 자신의 감각적 기억 속에서 자신의 회화에도 부합하는 주제(아니면 소재?)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한눈에도 알만한 벽면, 아니면 최소한 암시적인 벽면을 그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점차 알만한 벽면이 지워지고, 뭉개지고, 흐릿해지고, 해체되면서 다만 질감과 물성만이 두드러져 보이는 알 수 없는 화면으로 진화한 것 같다. 뛰어난 미장 기능공의 벽면 질감을 닮아간 것 같고, 단색화를 오마주한 것도 같다. 단색화를 오마주한? 어느 면에서 작가의 작업은 단색화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지만,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보다는 더 절실한, 예술가적 자의식과 직결되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이 그린 그림(아마도 알만한 벽면 그림과 벽면을 추상화하거나 변주한 그림)이 도통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지우기로 했다. 다 지워 없애기로 했다. 그렇게 아마도 흰 젯소로 화면을 덧칠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지우기 그러므로 비우기 위한 행위가 반복적으로 쌓여가고 있음을 그러므로 오히려 채우고 있음을 깨달았다. 역설이 가져다준 깨달음 혹은 각성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존재가 이중적이고 만사가 양가적임을 깨달았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비움이 있어야 채움도 있다. 음과 양은, 그리고 채움과 비움 역시 서로를 전제로 해서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상대적이고 상호적인 개념이고 가치다. 그 자체로 홀로 서는 개념도 없고 가치도 없다. 흰색도 마찬가지. 비록 지우기 위해 흰색을 사용했지만, 정작 그 과정에서 지우는 행위 자체가 반복 수행되고 있음을, 그 자체가 또 다른 그림을 그려놓고 있음을 흰색이 증명해주고 말았다. 그래서 그 이중성, 그 양가성, 그 역설을 작업의 빌미로 삼기로 했다. 

그렇게 작가는 먼저 밑 작업을 하는데, 아크릴릭필러와 같은 건축용 자재를 가지고 캔버스 화면에 질감을 조성한다. 아마도 벽면 질감을 연출하고 재현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 위에 한지로 덮어서 거친 질감을 누그러트리는데, 작가에게 캔버스 천과 건축용 자재는 음을 그리고 한지는 양을 상징하는 만큼 음과 양이 상호 작용하는 존재의, 자연의, 우주의 이치를 표상한다. 그리고 그 위에 복수의 색층을 올리고 나면, 이제 흰색으로 지우는 일만 남는다. 최종 과정인 것으로 봐서 적어도 논리적으로만 본다면 마치 애써 그린 그림을 지우는 것이 목적인, 그렇게 완성 아닌 완성을 지향하는, 어쩌면 완성을 애써 보류하는, 그래서 어쩌면 오히려 그림 속에 어떤 잠정적인 심급(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울림)을 보존하는, 그러므로 어쩌면 역설적인 그리기를 예시해준다. 

그렇게 그림은 비록 단색이지만, 사실은 지우개로 지운 연필의 흔적이 여전한 그림처럼 다중적이다. 사실은 아크릴릭필러가 만든 질감과 한지로 덮어서 가린 중화된 화면, 그리고 여기에 복수의 색층과 최종적으로 흰색이 하나의 층위로 포개진 다층적인 그림이 된다. 여기서 흰색은 비록 최종이지만, 전면균질회화에서처럼 균일하게 도포된 것이 아닌 만큼 그 이면에 흔적을 고스란히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수행과정을 보존하기 위한, 행위가 지나간 자리를 보존하기 위한, 그러므로 어쩌면 흔적을 보존하기 위한, 다시 그러므로 어쩌면 흔적이, 울림이, 아우라가, 분위기가 최종심급인 그림이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단색화를 떠올리게 한다. 비록 그 이면에 다중적이고 다층적인(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다의적인) 행위의 흔적을 포함하고는 있으나 최종적으로 흰색의 모노톤으로 나타난 색채감정이 그렇고, 그리고 여기에 그리기를 빌미로 수행과정을 강조하는 것이 그렇다. 그러나 여기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단색화는 그림 자체보다는, 혹은 그림 자체와 함께, 그리기로 나타난 반복 수행과정 자체를 강조하고 의미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작가의 단색화는 앞으로도 여전히 그럴지는 모르나, 벽면이라는 실제, 그러므로 감각적 현실이라는 기반 위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리기의 문제에 천착한 경우와 감각적 현실에서 시작되고 있는 점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작가 역시 지금까지는 감각적 현실에서 시작하지만, 앞으로 그리기 자체의 문제로 건너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작가의 그림은 그리기와 감각적 현실 사이, 수행과 재현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점할 수도 있는, 단색화 이후, 그러므로 후기 단색화로 범주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범주와 경향이 중요한 것은 아닌 만큼, 자신만의 형식을 위해 더 지켜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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