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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혜, 편집된 풍경과 의식의 재구성

고충환


김자혜, 편집된 풍경과 의식의 재구성 


다양한 순간과 시점의 차이에 의한 다양한 층을 만들어 순간을 공간으로 기억하는...움직이는 순간의 장면을 다차원의 공간 속에 기록하는...평면으로 변한 공간에서 시간은 멈추고 고정된 화면을 통해 세상을 다시 보게 만드는...문을 통과하면 다른 세상이 드러나고, 그림은 그 세계를 바라보기 위한 문의 역할을 하는 것. 
작가 노트

여기에 하늘이 있다. 흰 구름과 대비되면서 실제보다 파란 하늘이 청명한 기운을 느끼게 하고, 붉은 노을과 대비되는 먹구름이 아직은 오지 않은 폭풍우를 예고하는 것도 같다. 하늘만큼 파란 바다가 있고, 물안개로 희뿌연 바다도 보인다. 야자수가 보이고, 멀리 산이 가물거리고, 야생의 들판이 보인다. 풍경인가. 그런데 하늘은, 바다는, 산은, 들판은 어디에 있는가. 풍경은 어디에 있는가. 창문을 통해 본 풍경인가, 아니면 거울에 비친 풍경인가. 파문을 그리며 그 형태가 일그러지는 것으로 보아 풍경은 수면에도 비친다. 풀장인가. 수영장은 실내에도 있다. 그렇게 풍경은 실내외 수조에 일그러진 자기를 반영한다. 여기에 의자가, 화초가, 커튼이, 블라인드가, 레이스로 장식한 보가, 타일로 마감한 벽체 구조물이, 끊어질 듯 연이어진, 때로 허공에 떠 있는 것도 같은 계단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실내에서 창밖을 통해 본 풍경일 것이다. 

그러나 다만 그렇다고 추정할 뿐,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는 도대체 어디인가. 현실인가, 아니면 작가의 의식이 그려낸 풍경인가. 실내외를 넘나드는 풍경이 공간을 오리무중으로 만든다. 그림 속 지금은 언제인가. 다른 시간대에 속한 풍경이 하나의 화면 속에 공존하면서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다. 수면에 비친 반영상은 또한 어떤가. 창문을 통해 본 풍경이, 그리고 화면 밖에 있는 풍경이 비친 것으로 추정해 볼 수는 있지만, 꼭 그렇다고 단언할 수도 그 인과성이며 개연성을 장담할 수도 없다. 

주지하다시피 초현실주의에서 실제에 연유한 인과성이며 개연성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임의적인 편집과 의외의 조합으로 예기치 못한 현실을 열어 놓는 것인데, 그렇게 열린 현실은 터무니없는 현실, 공허한 현실이 아니라, 억압된 현실이며 잠재적인 현실, 그러므로 어쩌면 현실을 밀어 올리는 현실, 현실이 유래한 현실, 현실보다 더 지극한 현실, 다시, 그러므로 진정한 현실일 수 있다. 그렇게 탈 혹은 비 인과성과 개연성으로 의식의 확장을 꾀하고 무의식의 확장을 실천한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경우 역시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에서처럼 의식의 확장을 꾀하고 무의식의 확장을 실천한 것으로 볼 수가 있는가. 아마도 어느 정도 그렇다고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의 그림에서 보면, 여기에 색면과 추상적 패턴이 화면을 분절하면서, 화면에 개입하면서, 그러므로 화면을 매개하면서 실제에 근거한 선입견을, 시공간에 대한 인식구조를 흔들어놓는다. 색면과 추상적 패턴이라고 했다. 작가는 화면을 기하학적인 구조로 재편하고 재구성하는데, 실내 건축구조가 이미 어느 정도 기하학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건축구조와 색면의 구조가 서로 어울리면서 충돌하는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의미기능을 수행한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작가는 화면을 기하학적인 구조로 재편하고 재구성한다고 했다. 이 부분이야말로 작가의 그림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세계를 보고 재현하고 제안하는 작가만의 시각이, 입장이, 태도가 작동하는 지점이고, 그런 만큼 작가의 작가적 아이덴티티가 생성되고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작가는 세계를 기하학적인 포맷으로 해체하고, 분절하고, 재편하고, 재구성한다. 작가는 화면에다 이런저런 기하학적 구조를 던져놓는다. 그리고 그 구조를 화면 삼아, 스크린 삼아 마치 그 위에 영상을 투사하듯 이미지를 중첩 시킨다. 그렇게 투사된 이미지 화면은 앞서 말했듯 창틀과 거울 같은(그리고 여기에 수면마저 가세하는) 현실구조와 어울리거나 충돌하면서 그림을, 그림의 형식을, 그림의 의미를 중층화한다. 

그렇게 현실을 닮은 듯 닮지 않은, 현실의 구조를 다중적이고 다층적이고 다의적인 복잡 구조로 가져간다. 그렇게 실내 구조물 위, 이를테면 벽면에, 수면에, 거울에, 창문에 아마도 그림 밖에 있을 잠정적인 풍경의 일부가, 그리고 여기에 더러 실제 풍경과는 상관없는 작가의 의식이 소환해 첨부한 이미지가 반영되고 반영하면서 그림을 확장 시킨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림의 확장은 곧 확장된 의식을 반영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겠다. 다시, 그러므로 사실은 어쩌면 작가의 자의식이 그린 그림이며 내면 풍경으로도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친근하면서 낯설다. 알만한 풍경을 소재로 한 것이란 점에서 친근하고, 풍경을 기하학적인 형태로 재구성한 것이란 점이 낯설다. 이처럼 재구성된 풍경은 작가가 세계를 대하는 태도와 입장이 반영된 것이고, 작가의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다. 해체된 풍경, 편집된 풍경, 편집되고 재구성된 풍경을 예시해주는데, 그 이면에서 총체적 주체와는 비교되는 파편화된 주체, 우연적인 주체를 반영한다. 

주체는 세계를 반영한다. 마찬가지 의미지만, 주체는 세계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세계가 주체를 만들고 형성시킨다. 세계가 유기적이면 주체도 총체적이다. 세계가 조각나 있으면 주체 또한 파편화된 세계를 반영한다. 그렇게 조각난 세계를 반영하는 주체는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보고 듣고 겪었던, 그러므로 타자들에게서 건너온 것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총체다. 이처럼 조각난 세계와 파편화된 주체는 디지털 이후에 가속화되는데, 부분 인식의 편집과 재구성으로 나타난, 이질적이고 무분별한 것들을 하나로 접맥시키는, 그렇게 제3의 현실을 열어 놓는, 관계의 기술 혹은 네트워크의 기술 혹은 편집의 기술로 나타난 현대미술의 경향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렇게 작가는 파편화된 부분 인식을 매개로 사실은 조각난 세계를, 현실을, 존재론적 조건을 부지불식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작가의 그림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물이 흥미롭다. 작가의 그림에서 물은 외계를 반영하는 스크린이며 영사막으로 작용하는데, 작가의 기억이, 자의식이, 무의식이, 그리고 어쩌면 억압된 욕망이 투사되고 방영되는 극장이라고 할 수 있겠고, 자기반성적인 거울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그러므로 작가는 어쩌면 의식과 함께 반쯤은 무의식이 자기를 실현하도록 열어 놓는 그림을 그려놓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의식의 흐름 기법에도 맞닿아 있다. 의식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의식은 예측 가능하지도 않다. 나는 의식과 나를 분리할 수조차 있다. 그래서 자크 라캉은 지금 나는 여기에 없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의식은 욕망을 따라 흐르고, 자유 연상을 따라 흐른다. 하나의 연상이 다른 연상을 부르고, 그 연상이 또 다른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현실은, 현실 인식은 첨부되고, 덧붙여지고, 부풀려지고, 확장된다. 

아마도 그렇게 확장되는 작가의 의식(혹은 무의식)은 한동안도 지속될 것이다. 마치 부속을 갈아 끼우듯 변주될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의식의 흐름 기법에 맞닿아 있으면서, 이를 통해 현실 인식은 어떻게 가능하고 또한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문제를 건드린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조각난 화면들, 구획된 영사면들이 질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을 연상시킨다고 한다면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할까. 천 개의 고원은 천 개의 방이고 천 개의 문이다. 의식의 문이고 방이다. 작가는 하나의 문을 통과하면 다른 세상이 드러나고(열리고), 그림은 그 세계를 바라보기 위한(그 세계로 건너가기 위한) 문의 역할을 한다고 했는데, 아마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현실과는 또 다른 세계를 연다는 것, 그것은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의식의 방에서 또 다른 의식의 방으로, 그렇게 겹겹이 중첩된 또 다른 방들을 찾아서 어쩌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를 여행을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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