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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정/ 살 색처럼 부드러운, 온건한, 우호적인, 따뜻한

고충환


안현정/ 살 색처럼 부드러운, 온건한, 우호적인, 따뜻한 


나의 작업은 본인이 경험한 감정과 이야기를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추상적인 형태의 시각적인 언어를 통해 표현한 일종의 일기와도 같다...개인적인 서사의 시간과 감정들의 응축, 그리고 그것들이 존재했었음을 보여준다...팬데믹이라는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시간 속에서, 한정적인 색채와 단순화된 형태를 통해 본인 자신을 위한 확실성을 창조해 부여하였다. 
작가 노트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이야기가 있다. 예술은 이야기의 기술이다. 비록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만, 그 이야기가 개인에 함몰되지 않고 공감을 얻고 보편성을 얻을 때 그 이야기는 예술이 된다. 여기서 이야기를 매개하는 것이 언어다. 언어가 없으면 이야기를 할 수가 없고, 언어를 모르면 이야기를 전달할 수도 알아들을 수도 없다. 예술 역시 언어다. 선도 언어고 면도 언어다. 색감도 언어고 질감도 언어다. 손짓, 발짓, 몸짓, 눈빛 모두 언어 아닌 것이 없다. 의미의 대상이 되는 것, 하다못해 흘러가는 구름 한 점마저도, 그러므로 세상 모두 언어 아닌 것이 없다. 하이데거는 이처럼 언어로 구조화된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를 세계 내 존재라고 불렀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도 했다. 그러므로 존재는, 시인은, 그리고 예술가는 언어를 도구로 세계의 의미를 캐내고 발굴하는 사람이다. 


작가 안현정은 보통 유학파 작가들이 그렇듯 언어의 문제에 봉착했고, 소통을 할 수가 없었고,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 보기에 따라서 이 문제는 굳이 이방인 속에서가 아니더라도,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사람이 겪는 존재론적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그러므로 어쩌면 우리 모두 서로 이방인들일지도 모른다) 공감을 얻고 보편성을 얻는다. 그렇게 소통 가능한 자기만의 언어를 개발하도록 스스로 종용하는 환경에 내몰리면서 마침내 작가는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날의 기분을 선으로 환원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면으로 환치하고, 되불러 온 기억을 색깔로 옮겨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환원되고 표현된 그림을 보면, 절제된 색채감정과 최소한의 면 구성이 색면화파를 떠올리게 하고 미니멀리즘을 연상하게 된다. 그렇게 한눈에도 추상화에 가까운 것이다. 추상화에 가까운? 추상화는 크게 두 노선이 알려져 있다. 추상화는 형식논리의 산물이다. 점, 선, 면, 색채, 양감, 질감과 같은 형식요소만으로 이미 충분히 회화라고 보는 모더니즘 패러다임으로, 회화의 평면적 환원을 주장한 클레멘테 그린버그에 의해, 그리고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그러므로 캔버스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이라는 프랭크 스텔라의 동어반복적인 언술로 지지 되는 입장이다. 반면, 추상화는 의미론적 대상이다. 그 자체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추상회화는 없으며, 만약 있다고 해도 무의미하다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에 의해 뒷받침되는 노선이다. 

여기서 어느 입장은 맞고, 또 다른 노선은 틀린다는, 선택과 판단을 내릴 필요는 없다. 예술(사)은 사실들의 역사가 아니라, 입장과 태도들의 역사다. 그렇다면 예술에는 객관적 사실을 위한 자리는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다시 하이데거를 인용하자면 예술적 진리는 과학적 진리와는 다르다(심지어 더 깊기조차 하다)고 했고, 질 들뢰즈는 그 다름과 차이 그러므로 예술의 특수성을 감각철학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작가는 어쩌면 추상화에 대한 이 두 노선과 입장을 자기 속에 하나로 융합해 들이고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형식요소를 취하면서도(예컨대 평면이나 색면 같은), 다른 한편으로 다만 형식논리에 머물지 않고 의미론적 대상으로 확장하고 심화한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추상회화의 형식요소(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형식논리)를 빌려 기분과 감정, 인간관계, 그리고 소환된 기억이 불러온 그리움과 같은 사사로운 이야기를 색으로, 면으로, 색과 면의 어울림으로 형상화해놓고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여성성이 매개된다. 작가의 그림은 여성적이다. 그림에 남성성이며 여성성이 따로 있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차이 나는 감수성이며 다른 감각과 같은, 정조와 분위기는 분명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성주의와 관련해 추상미술은 흔히 성적 정체성 논의로부터 자유로운 무성적인 형식이라고도 하지만(추상미술을 아예 남성 주체의 세계관이며 가치관에 부합하는 형식이라고 보는 예도 있다), 어쩌면 작가는 그 무성적인 형식에 여성성을 매개해 자신만의 형식으로 치환해놓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실제로도 색면화파와 미니멀리즘 사이에서 자기만의 형식을 찾은 아그네스 마틴에게서 그 예를 볼 수 있고, 작가에게서도 그 상호 영향 관계가 확인된다). 여러 형식으로 추상화를 그리는 여성 작가들이 많은 만큼 그 경우가 다 그렇다고는 할 수가 없고, 다만, 작가의 경우에서처럼 감각과 감수성, 정조와 분위기라는 디테일한 측면에서 적용 가능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그러므로 작가의 작가적 아이덴티티와 밀접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떤 부분이 그렇고, 어떻게 그런가. 단순하다기보다는 단아한 형태가 그렇다. 기하학적이기보다는 유기적인 형태가 그렇다. 작가의 그림은 얼핏 기하학적 패턴의 변주처럼도 보이지만, 처음부터 기하학적 형태를 의식했다기보다는 유기적인 형태를 만들고 구축하는 과정에서 기하학적인 구조와 선이 부수되는 경우로 보아야 한다. 여기에 유기적인 구조와 기하학적인 구조가 서로 충돌하기보다는 하나로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데, 아마도 곡선이 직선을 상쇄하고 있는 것에 기인할 것이다. 

그리고 때로 화면에 그려 넣은 선에서 감지되는 희박한 존재감을 주목해볼 일이다. 면 구성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탓에 선뜻 자기를 잘 드러내 보이지는 않는 선이 희미한 기억을 재생한 듯,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그것(혹은 그 일)이 한때 존재했었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흐릿하고, 희박하고, 애매하다. 말로 옮기기 어려운 섬세한 떨림이, 내밀한 파장이 감지된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색채감정이 그렇다. 흑과 백이 대비되는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 않지만, 화면에 나타난 작가의 지배적인 색채감정은 마치 살 색처럼 부드럽고 온건하다. 우호적이고 따뜻하다. 때로 원색마저도 채도를 다운시켜 중성화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희박한 다른 밝은 색면들과도 호흡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마도 응축된 감정, 내밀한 감정, 숙성된 감정에 해당하는 색채를 찾아내기 위한, 색채가 감정이 되는 순간을 찾아내기 위한 시행착오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박음질을 빼놓을 수 없다. 외관상 색면구성의 변주에 바탕을 둔 작가의 그림은 사실은 박음질에 의한 것이다. 조각 천을 재봉틀로 이어붙여 만든, 그래서 일종의 조각 회화 혹은 패치 페인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그 조각 천을 캔버스에 걸어 고정하는데, 그 과정에서 장력이 작용하면서 이음새 부분에 선이 생긴다. 장력이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닌 만큼 똑바른 선도 생기고 살짝 휜 선도 생기는데, 작가는 그렇게 장력이 만든 선, 우연한 선을 또 다른 조형 언어로 인정하는 편이다. 

그렇게 하나의 화면 속에 장력이 만든 선, 이음매가 만든 선이 색면의 가장자리를 형성하기도 하고 화면을 구획하기도 하면서 작가가 직접 그려 넣은 선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그렇게 만든 화면 자체를 직접 제안하기도 하고, 화면과 화면을 하나로 모은 모자이크 방식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것을 빼고 저것을 넣는 가변적인 구성이 가능하다는 얘긴데, 화면 하나하나가 저마다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그때그때 맞춰 다른 이야기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굳이 팬데믹이 아니더라도,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시간 속에서 자신을 위한 확실성을 창조해 부여한다는 작가의 말에 주목하고 싶다. 어쩌면 존재 자체가 이미 불확실하고 혼란스럽다고도 생각하는 편이지만, 여하튼 작가는 이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을, 시대를, 시절을 돌파하기 위해선 뭔가 확실한 것, 때로 그것이 비록 허구라고 해도, 부여잡고 갈 수 있는 무엇, 내적 질서 같은 어떤 것이 절실하다. 다만 작가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단아한 형태와 살 색처럼 부드러운 색채감정, 그리고 섬세한 떨림이 감지되는, 그 존재감이 희박한 선이 어우러져 만든 작가의 색면구성은 그러므로 어쩌면 이런 확실성의, 내적 질서의 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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