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양대원/ 죠셉 초이, 분화하고 분기되는 정체성

고충환


양대원/ 죠셉 초이, 분화하고 분기되는 정체성 


나는 왕이다, 라고 작가 양대원은 말한다. 홍사용의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 에서 빌려온 이 말은 비록 별 볼 일 없는 비루한 삶이지만, 사실은 삶치고 별 볼 일 없는 삶도 비루한 삶도 따로 없다는 자존감의 선언이다. 모든 존재가 저만의 삶이라는 왕국을 지배하는 왕임을 선언한 것이다. 그 왕국에는 박물관도 있고 도서관도 있다. 시간의 집이 있고 기억의 집이 있다. 여기에 방이 천 개나 되는 집도 있는데, 그중에는 자신도 모르는 방도 있다(질 들뢰즈). 거실에는 나도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거울이 있다(보르헤스). 나도 모르는 사람들? 타자다. 자기_타자다. 랭보는 자기가 타자라고 했다. 신이면서 동시에 악마라고도 했다. 그렇게 주체 속엔 때로 나조차도 모르는 타자들이 산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_타자를 그린다. 사람들은 그를 동글인이라고 부른다. 생김새가 동글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인 그는 동시에 작가 자신의 아바타이면서 분신이기도 하다. 그리고 예술이란 주관적 경험을 객관적 경험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우리 타자들의 동료이기도 하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_타자를 빌려, 타자들의 동료를 빌려 삶의 아픔을, 사랑을, 욕망을, 슬픔을, 그리고 죽음을 이야기한다. 

동글인은 이처럼 삶의 상황 속에서 존재를 대신할 뿐만 아니라, 때로 어항으로, 계단으로, 커튼으로, 식물로, 눈물방울과 같은 사물로, 그리고 여기에 문자와 같은 개념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과 사물과 개념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는 그러므로 어쩌면 작가의 회화적 모나드, 단자, 최소 단위원소라고 해도 좋다. 삶의 극장 속에서 이데올로기를 연기하고, 불신과 의심을 연기하고, 삶과 죽음을 연기하는, 텅 빈 자기와 함께 끊임없이 다른 삶을 연기하는, 때로 사물 극과 개념 극을 연기하는 배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텅 빈 자기? 여기서 자기란 다만 사람이, 사물이, 개념이 잠시 몸(아니면 얼굴?)을 빌리는 가면 가게와도 같다. 실제로 동글인은 아슬하게 줄을 탄다거나 추락하는 것과 같은 유추 가능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 자체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가면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가면은 어쩌면 텅 빈 자기를 보존하기 위한, 그 속으로 아니면 그 사이로 사람이, 사물이, 개념이, 서사와 이데올로기가 머물다 지나가도록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장치로 착상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뒤에 숨기 위한 것에서 최초 시작했을 수도 있겠다. 분명한 것은 텅 빈 주체, 지나가는 주체, 숨어 있는 주체를 가면이 증언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텅 빈 주체의 빈 몸 사이로 삶의 아픔이, 사랑이, 욕망이, 슬픔이, 죽음이, 그리고 비루한 삶에도 비루한 삶은 없다고 말하는 역설의 왕이 지나간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은 그 이면에서 정체성 문제를 건드린다(어쩌면 작가의 작업에 가면이 등장할 때부터 이미 예견된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주제에 왕이 등장하고 있고, 그 왕이 정체성 문제에 연루되는 것이 리어왕의 절규를 떠올리게 만든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는.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도 알고 보면 무지(無智)를 지(智)하라는, 그러므로 무지의 역설을 주지한 말이다. 여기에 정체성 문제에 주목한 또 다른 사람이 있다. 죠셉 초이 작가다. 작가 자신도 인용하고 있지만, 프로이트는 자아가 자신의 집의 주인이 아니라고 했다. 여기에 자크 라캉은 나는 내가 하는 말속에 들어있지 않다고도 했다. 하이데거는 언어(그러므로 말)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는데, 내가 하는 말이 자신이 아니라고(최소한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어서 혼란스럽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누구이고, 또한 어디에 있는가. 여기에 나라는 실체는 무엇인가. 정신인가. 몸인가. 의식인가. 무의식인가. 욕망인가. 마음인가. 아니면 이 모두의 총체인가. 의미가 사물 고유의 성질이라고 보는 본질론에서 볼 때 그렇고, 상황론에서는 이와 또 다르다. 모든 존재 자체는 의미론적으로 텅 비어있고, 다만 존재가 이런저런 상황 속에 놓일 때 의미는 비로소 발생한다. 그러므로 상황이 달라지면 의미 또한 달라진다. 다시, 그러므로 상황이 없으면 의미도 없다. 그렇게 존재는, 존재의 의미는 상황에 연동된다. 그러므로 모든 의미는 임의적이고, 지엽적이고, 가변적이고, 가역적이다. 

후기구조주의는 이렇듯 상황적 주체를 타자라고 부른다. 주체란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며, 다만 막연하게 주체라고 부르는 실체 없는 허명이며, 순전한 언어적 습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나의 의미는, 나의 실체는 상황적이다. 임의적이고, 지엽적이고, 가변적이고, 가역적이다. 텅 빈 주체이며, 타자들이 스쳐 지나가는 주체이며, 숨어 있는 주체다. 질 들뢰즈는 그 주체를 정신분열증적 분석이라고 부르고 기관 없는 신체라고 부른다. 정해진 코드가 없이 임의적인 탈주선을 따라 욕망을 실천(실현)하는 것이며, 기관이 따로 없으므로 자유자재한 의식이다. 

작가의 그림이 그렇다. 작가의 그림은 마치 정신분열증적 분석과 기관 없는 신체로 나타난 들뢰즈의 주체를 그림으로 옮겨놓은 것 같다. 이를테면 샤워긴지 해바라긴지 알 수 없는 형상이 그렇다. 살 색의 사람 같기도 하고 하얀 석고상 같기도 한 형상이 그렇고,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가녀린 눈을 뜬 채로 마법에 홀린 것인지 알 수 없는 몽환적인 표정이 그렇다. 사람이 앉아 있는 것 같은데 어떤 의자에 어떤 자세로 앉아 있는지 그 유기적인 관계를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 논리가 그렇고, 아래위의 공간 구분이 있는 것 같은데 정작 바닥에 있어야 할 격자무늬 타일이 허공에 떠 있는 비현실적인 상황이 그렇다. 아무 곳에도 연결되지 않은 채 갑자기 툭 끊긴 계단이 그렇고, 실낸지 실왼지 알 수 없는 경계가 그렇고, 여기에 어떠한 논리적 개연성도 없이 화면에 개입하고 부유하는 줄무늬 패턴과 색 면이 그리고 비정형의 얼룩이 그렇다. 

작가의 그림은 친근하고 낯설다. 알만한 형상들, 알만한 풍경들, 알만한 정경들이 친근하고, 그 알만한 형상들이 조합되고 배치되는 상식을 벗어난 방식이 낯설다. 그렇게 알만한 형상이 알 수 없는 형상에 접속되고, 알 수 없는 얼룩이 알만한 형상 위로 범람하면서 뭉개고 들어온다. 그렇게 뭉개진 이미지, 범람하는 이미지, 때로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마치 모빌처럼 의식의 편린들이 중첩된 것 같고, 그리고 어쩌면 무의식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조각들이 콜라주 된 것도 같다. 롤랑 바르트의 너덜너덜해진 양피지 이론에 의하면, 주체란 양피지에 아로새겨진 긍정과 부정을 모두 포함하는데, 수도 없이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나머지 너덜너덜해진 양피지 위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어쩌면 주체에 대한 최종적인 정의는 끝내 보류되고 미완인 채로 남겨진, 주체의 흔적을 보는 것도 같다. 

그렇게 그림 속에서 모티브와 모티브는 서로 구분되지 않고, 유기적인 하나의 덩어리를 이룬다. 꿈인가. 실제로 작가는 꿈을 그린다고 했고, 기억을 그린다고도 했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초현실주의는 꿈을 진정한 현실이라고 본다. 현실을 현실원칙으로 억압된 현실이라고 보는 만큼, 꿈은 그렇게 억압되기 이전의 현실 자체를 그러므로 어쩌면 욕망 자체를 보여준다. 그런 만큼 꿈은 현실보다 더 지극한 현실을 예시해준다. 그렇게 그림들이 현실보다 더 지극한 현실을 그린 초현실주의의 몽환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키고, 의식의 매개 없이 무의식을 직접 소환한 자동기술법과 자유연상 기법 그리고 의식의 흐름 기법을 연상시키고, 비현실적 이미지를 현실적 알레고리에 접합한 라이프치히 화파 이후 신형상미술을 떠올리게 만든다. 


앞서 양대원의 동글인은 동시에 사람도 되고, 사물도 되고, 개념도 된다고 했다. 상황 논리에 따라서 정체성을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것인데, 처음부터 모든 형태의 변주에 열려있는 원형의 모나드를 설정한 것이 그렇고, 숨어 있는 탓에 오히려 모든 정체성을 연기할 수 있는 가면의 역설이 그렇다. 그리고 죠셉 초이의 그림이 질 들뢰즈의 정신분열증적 분석과 기관 없는 신체를 예시해준다. 표면만 있는 가면은 역설적으로 모든 종류의 정체성으로 분화할 수 있고, 기관 없는 신체는 기관이 없으므로 어떠한 종류의 정체성으로도 분기할 수가 있다. 

실존주의에서 나는 너를 전제로 해서만 비로소 존재 가능해진다. 그리고 후기구조주의에서 주체란 다만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너다. 주체가 곧 타자다. 그렇다면, 나는? 실존주의의 상호주관성으로, 그리고 후기구조주의의 자기_타자론으로, 그리고 여기에 상황주의의 상황적 주체론으로 충분한가. 양대원과 죠셉 초이 두 작가의 작업은 저마다 서로 다른 방식(그러므로 형식)으로 이처럼 밑도 끝도 없는 물음을 던지게 만든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