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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자, 음악은 어떻게 그림이 되는가

고충환


윤은자, 음악은 어떻게 그림이 되는가 


회화가 직접적인 매체라고 한다면, 판화는 간접적인 매체다. 판화가 가능하기 위해선 판이라는 중간 매개체가 있어야 하고, 이때 어떤 판을 사용하는지에 따라서 동판과 목판 그리고 석판화와 같은 다양한 판화가 가능해진다. 여기서 다른 판화와 비교해볼 때 판 사용에 있어서 비교적 자유로운 경우가 콜라그래피다. 콜라그래피는 다르게는 콜라주 판화라고도 하는데, 다양한 판종을 혼용(콜라주)할 뿐만 아니라, 여기에 일상적인 오브제를 판 대신 사용할 수도 있다. 

나아가 콜라그래피는 판 사용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판화 고유의 에디션 개념으로부터도 자유로운 편이다. 굳이 에디션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에디션보다는 회화와 마찬가지의 일품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만큼 그 자체 정통적인 판화라기보다는 모노타입과 함께 현대판화의 한 경향 혹은 장르로 보면 되겠다. 판화 고유의 인출된 요철효과를 살리면서도 직접성과 일회성으로 나타난 회화적인 표현 욕구를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러므로 회화와 판화의 절충점을 찾아 그사이를 파고든 장르라고 해야 할까. 

작가 윤은자는 근작에서 콜라그래피 판화를 선보인다. 크고 작은 색면 구성이 두드러져 보이고, 색띠와 같은 기하학적인, 그리고 식물 문양과 같은 유기적인 패턴이 어우러진다. 여기에 CD를 연상시키는 크고 작은 원형의 문양이, 그리고 때로 파문을 그리면서 퍼져나가는 원 혹은 반원형의 패턴이 가세하면서 화면에 리드미컬한 활력을 더한다. 중심성이 강한 정적인 부분이 있는가 하면, 가녀린 색띠가 방향성(운동성?)을 암시하는 동적인 화면도 보인다. 아마도 공판법(투공 곧 구멍 뚫린 종이나 아크릴판과 같은 오브제를 대고 찍은)에 의한 것일 듯 알 수 없는 기호와 문자가 보이고, 트럼펫이나 바이올린과 같은 악기의 부분 이미지도 보이고, 마치 오선지 위에서 춤이라도 추듯 음표가 아로새겨져 있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 별들이 보이고, 아마도 우연한 질감을 위한 것일 듯 비정형의 얼룩이 여기저기에 포치 하면서 화면에 분위기를 조율하는 편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선 비록 식물이나 별 그리고 악기와 같은 일부 알만한 소재에도 불구하고 추상적으로 보인다. 기하학적인 패턴과 유기적인 형상이 때로 부합하고 더러 충돌하면서 화면에 긴장감을 조성하고 활력을 더한다. 서로 무관해 보이는 혹은 상호 이질적으로 보이는 문양과 패턴이, 소재와 소재가 어우러지면서 화면을 활성으로 이끄는데, 소재로 보나 분위기로 보아 아마도 음악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실제 제목도 음악에서 온 것임이 분명해 보이는 경우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음악 곧 소리를 형상으로 표현한 것이란 점에서, 청각 정보를 시각적 이미지로 환원한 것이란 점에서 공감각(감각과 감각은 서로 통한다는 그러므로 서로 호환이 가능하다는)에 대한 공감이 느껴지고, 실제로도 공감각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추상미술을 연 칸딘스키에 대한 상호영향 관계(아니면 오마주?)가 느껴진다(참고로 칸딘스키는 음악에 상당한 이해가 있었고, 이런 이해가 바탕이 되었기에 공감각도 공감각에 착상된 추상미술도 가능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추상미술과 음악이 서로 부합하고 호환이 되는가. 예로부터 음악은 수학으로 여겼다. 그리고 수학은 추상적 관념을 표현한 학문으로 여겨졌고, 세계에 대한 감각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다른 학문과는 구분되는 것이었다. 추상적 관념을 수식 그러므로 질서로 환원한 것이다. 신성 비례와 황금비율 같은 것이 모두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다시, 그러므로 음악은 수학의 추상적 관념을 감각으로 표현한 것이다. 수학적 질서 그러므로 세계질서를 감각으로 환원한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 추상적 관념을, 그 수학적 질서 그러므로 세계질서를 참고할 만한 감각적 모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직관이다. 그래서 추상이다. 

그렇게 음악은 가장 추상적인 예술, 오직 직관으로서만 가능한 예술이 될 수가 있었다. 물론 감각적인 음악도 있고 서사적인 음악도 있지만, 원래 음악은 직관이었고 추상이었다. 창작이 그렇고 수용 그러므로 향수가 그렇다. 추상미술이 그렇듯 이성의 매개 없이 직접 감동을 주고, 의미의 간섭 없이 저절로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음악은 세계질서를 표상하는 것이고, 사실은 그 질서에 우리가 감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어쩌면 음악을 매개로 사실은 내적 질서 그러므로 내적으로 평정 상태를 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감동을 나누고 싶은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콜라그래피 자체를 보면, 작가는 콜라그래피 판화를 위해 이런저런 오브제를 도입하는데, 아무래도 자신의 주변 일상으로부터 가져다 쓰기 쉽고, 그런 만큼 반쯤은 저절로 자신의 일상을 표현하게 된다. 아직은 암시적이고 잠정적인 정도에 머물러 있지만, 만약 그럴 마음이 있다면 차후의 작업에서 더 의식적이고 적극적으로 일상을 반영하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세계의 질감을 떠내고 세계와의 접촉면을 떠낼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질감을 작업 그러므로 자기 속에 불러들여 재구성할 수 있고, 세계에 대한 자신의 경험치를 작업으로 표현할 수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그렇게 하고 있고, 근작에서 그 실제를 확인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한편으로 작가는 이런 일련의 콜라그래피 판화와 함께, 콜라그래피와 먹 작업을 하나의 화면에 병치시킨다. 앞서 말했듯 판화는 간접적이고, 먹그림은 직접적이다. 기계적인 공정도 그렇거니와 이런 간접성으로 판화는 정적이고 안정돼 보인다. 최초 회화적 표현 그대로를 표현하게 해주는 일부 석판화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개 판화는 이처럼 기계적으로 숙련된 과정이 요구되는 탓에 어느 정도 정적이고 안정적인 인상을 피할 수가 없다. 그 자체 판화의 장르적 특수성이며 미덕이라고 해야 할까. 

반면 먹그림은 우연성과 즉흥성, 직접성과 일회성으로 동적으로 보이고 분방해 보이고 거침이 없어 보인다. 전작에서 작가는,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판화와 회화를 병행하고 있는데, 작가의 작업에서 판화와 회화는 사뭇 혹은 많이 다르다. 어쩌면 전혀 다른 두 인격을,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드로잉을 연상시키는 회화작업도 그렇지만 감각적인 그림이고 몸적인 그림이다. 감각이 부르는 대로 그린 그림이고, 몸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림이다. 그렇게 작가는 어쩌면 콜라그래피와 먹그림이 병치 되는 화면을 통해 이렇듯 두 경향을, 그러므로 두 인격을 비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니체는 예술가의 인격 속에 서로 상충 되는 두 충동이 동거한다고 했다. 아폴론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이 그것이다. 자기 내면에 질서 의식으로 축조된 성소를 건축하려는 경향성이 아폴론적 충동이라면, 디오니소스적 충동은 억압된 욕망과 건강한 생명력의 무분별한 분출이 자기표현을 얻는 운동성에 해당한다. 혹자는 카오스(디오니소스적 충동)와 코스모스(아폴론적 충동)가 경계 너머로 상호 간섭하고 매개되는 카오스모스를 말하기도 하지만, 유독 예술가의 인격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니체의 이 구분이 의미가 있다면, 이렇듯 이중인격 혹은 다중인격으로 나타난 존재론적 조건을 예술을 빌려 감각적인 형상으로 재확인시켜준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삶이란 이처럼 본원적으로 자기 분열적인 존재를 극복하는 과정일 수 있고, 예술은 바로 그 과정을 표현한 것일 수 있다. 작가의 콜라보 작업이 부지불식간 그 과정을 표현하고 증언해주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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