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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원/ 빛과 물의 현상학, 내가 그리는 산수, 풍경, 어쩌면 이상향

고충환



김용원/ 빛과 물의 현상학, 내가 그리는 산수, 풍경, 어쩌면 이상향 


처음엔 먹그림이려니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영락없는 먹그림처럼 보이는데, 의외로 먹그림이 아니었다. 섬세하고 촘촘한 망 구조를 가진 실크 천을 배경 화면 삼아, 그 위에 좀 더 큰 망 구조를 가진 크고 작은 천 조각을 콜라주 해 놓은 것이었다. 짙고 엷은 색의 천 조각이 중첩되면서 먹그림의 농담을 대신하고 있었고, 하늘거리는 레이스의 끝자락과 천의 표면에 수놓아진 패턴이 어우러지면서 수목을 대신하고 있었고, 배경 화면 그대로의 실크 천이 하늘과 수면을, 골짜기 사이로 흐르는 안개와 여백을 대신하고 있었다. 

때로 화면 아래쪽에 있는 물에 비친 반영 상을 표현하기도 하는데, 더 실감 나는 반영을 위해서 겹 구조가 도입된다. 투명 아크릴판과 판 사이에 화면을 고정해 만든 패널을 이중 삼중의 겹 구조로 마감한 것이다. 그러면 화면 속에 투명한 깊이가 생기는데, 마치 렌티큘러의 아날로그 버전을 보는 것 같고, 평면이면서 입체 같은, 평면 속에 입체가 담겨 있는 것 같은 착시 효과를 준다. 그렇게 작가는 크고 작은, 촘촘하고 성근 망 구조의 천 조각을 재구성하고 중첩 시키는 방법으로 먹그림에서의 농담을 실현하고 있었고, 나아가 먹물이 종이 위로 스며들면서 번지는 선염법을 흉내 내고 있었다. 

투명한 깊이라고 했다. 투명한 것은 빛에 반응하고, 투명한 깊이를 얻기 위해선 빛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화면 뒤쪽에 LED가 창작된 라이트 박스를 설치했다. 그렇게 마치 화면 뒤쪽에서, 화면 안쪽으로부터 빛이 새어 나오는 것 같은 효과를 연출했다. 원하는 분위기에 따라서 노란색 주조의, 빨간색 주조의, 청색 주조의 빛이 적용되지만, 어느 경우든 대개 부드럽고 은근한, 따뜻하고 온건한 빛의 질감이 느껴진다. 영락없는 먹그림 같은 실감 나는 화면과 함께 부드럽고 은근한 빛의 질감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분위기가 결정적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이러한 사실과 관련해 작가가 유일하게 안료를 도입하고 적용한 경우가 있어서 주목된다. 때로 배경 화면으로 도입된 실크 천에 엷은 색으로 물들이는 것이 그렇다. 있는 듯 없는 듯 엷은 색이 투명한 빛을 투과시키면서 감각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작가는 물에 비친 반영 상을 표현한다고 했다. 때로 반영 상은 천 조각으로 콜라주 한 화면에 흐르는 물의 이미지를 입힌 영상으로 대체되기도 하는데, 오브제와 영상이 이중으로 콜라주 된 작업으로, 각 정지된 위쪽 화면과 흐르는 아래쪽 화면이 서로 대비되면서 어우러지는 작업으로 볼 수가 있겠고, 실제 풍경과 견주어 봐도 그런, 영락없는 실경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도 작가는 그렇게 만든 다중화면으로 벽을 대신한 삼면의 방을 설치하고, 그 방 안에 관객을 들어 앉혔다. 그렇게 뒤쪽은 열려 있으므로 사실상 사방이 자연인 일종의 인공풍경 혹은 유사 풍경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 된다. 여기서 작가는 관객의 실루엣이 그대로 화면 아래쪽에 맺히게 해서 관객을 화면의 그러므로 자연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킨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작가는 어떤 경험을 유도하는데, 자연에 대한 유사 체험으로 안내한다. 수동적인 관람자의 입장에서 스스로 자연의 일부임을 자각하는 능동적인 참여 주체로 전이시키는 것인데, 자신이 풍경의 한 부분으로 동참하고 있다는 현장감과 함께, 마치 주체와 자연이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극적 효과를 준다. 스스로 침묵하는 자연,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자연의 증인이 되고 있다는 자의식과 함께, 자기가 유래한 원천(우주의 자궁?)으로서의 자연과 스스로 동일시하는 존재론적 경험을 추체험하게 만든다. 

이 모든 일은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말할 것도 없이 자연(유사 자연?)을 대면한 주체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관념적이고, 관조적이고, 명상적이고, 내면적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에게 자연은 풍문으로나 떠돌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연을 상실했다. 이런 상실의 시대에 소환된 자연이기에 그 울림이 더 크다. 주지하다시피 전통적인 산수화에서 화가들은 자연과 더불어 소요하는 삶을 꿈꿨다. 말 그대로 꿈을 꾼 것인데, 자연을 들여올 수는 없으니, 대신 자연을 그림 속에 들어 앉힌 것이다(참고로 자연의 원형 그대로를 축소한 일본식 정원도 어느 정도 이런 대리 자연의 욕망과 관련이 깊고, 작가의 작업 역시 그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산수화는 어쩌면, 때로 실경에서마저도 사실은 저마다의 꿈을 그리고, 이상을 그리고, 욕망을 그린 것이다. 

그렇게 실경산수(실경을 소재로 한)와 관념산수(자연에 대한 욕망을 반영한)는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혼용된다. 진경산수도 마찬가지. 실재하는 풍경(산수)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마다 내면에 그리는 진정한 풍경(산수)을 뜻하기도 한다. 진정한 풍경? 이상향이고 유토피아다. 유토피아는 알다시피 실재하지 않는 장소, 없는 장소, 부재 하는 장소를 뜻한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머릿속에 그 이미지를 그릴 수밖에. 그렇게 저마다 내면에 그리는 진정한 풍경 그러므로 유토피아는 지금도 유효하고, 더욱이 자연을 상실한 시대에 더 절실하다. 상실의 시대에 계속 꿈을 꾸게 한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자연을, 자연의 진정한 의미를, 어쩌면 존재가 유래한 우주의 자궁을, 존재론적 원형을 꿈꾸게 만든다.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산수는 이런 반복 상징이고 존재론적 원형일 수 있다. 존재론적 원형? 바로 도돌이표처럼 매번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자기 회귀적 본능이고, 자기반성적 본성이다. 무슨 말인가. 작가는 결국 산수에 자기를 투사해보는 것이고, 산수를 통해 자기를 보는 그러므로 찾는 것이다. 산수 중에서도 산보다는 수 그러므로 물이 더 그렇다. 물은 알다시피 내면을 상징하고, 심연을 상징하고, 무의식을 상징하고, 자기를 비춰 보여주는 자기반성적인 거울을 상징한다. 

작가는 평면에서 모아레 효과를 통해, 그리고 영상에서 느리게 흐르는 물을 통해 이처럼 내면을 상징하는, 자기반성적인 거울에 해당하는 수면을 표현했다. 비단 같은 얇은 천이 겹쳐 있을 때 나타나는 물결무늬를 뜻하는 모아레 효과는 바탕화면으로 도입된 실크 천의 망 구조가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마치 그 자체 옵아트를 연상시키는,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 같은, 수면이 일렁이는 것도 같은 섬세하고 감각적인 느낌을 준다. 그렇게 흐르는 물을 보고 있으면 물과 함께 흐르는 자신이 보인다. 수면에 일렁이는 물결을 보고 있으면 저마다의 내가 보인다. 당신에게도 보이는가. 그 움직임이 너무 미미해서 잘 안 보이지만 잘 보면 보인다. 외면이 아닌 내면에서.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효과를 넘어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파동과 공명을 통해서. 이로써 분명한 것은 적어도 이 일련의 작업에서 작가는 물을 매개로 저마다 자기 내면과 만나지는 자기반성적인 계기로 이끌고 있다고해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도 작가는 아예 물을 매개로 한 자기반성적인 거울을, 내면적인 거울을 주제화한 공간설치작업을 선보이기도 하는데, 어둑한 방바닥에 수조를 설치하고 그 속에 물을 채웠다(무의식은 어둡고 내면은 고요하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징검돌을 놓고 그 돌을 디디고 서서 마치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물속을 들여다보게 했다. 그리고 달처럼 둥근 화면을 수면에 던져놓았는데, 천 조각을 콜라주 한 화면에 일렁이는 물 영상을 덧입힌 것이다. 그렇게 어쩌면 물에 비친 달이라고 해도 좋을 그 영상에 저마다의 내면이 투사된다(월인천강 곧 천 개의 강에 달이 비치고 내가 비친다). 그렇게 저마다의 나는 내면에서 부는 바람의 소리를 듣고 공기의 질감을 감촉한다. 가만히 요람을 흔들어주던 자연의 손길을 기억하고, 존재가 유래한 원형적 자연과 만난다. 

그리고 공간설치작업은 내면(자기만의 방)을 상징하는 실내에서 외부 공간으로 확장되기도 하는데, 자연과 유사 자연(작가가 작품으로 조형한 자연)이 대비되면서 어우러지는 형태로 나타난다. 각 밤의 질감과 낮의 공기가 다른데, 주지하다시피 작가의 작업은 은근한 빛의 질감을 내장하고 있어서 낮보다는 밤에 더 집중도가 높은 편이다. 그 자체 어둠을 밝히는 등의 역할과 함께, 마치 어둠 속에 부유하는 섬 같다. 

그렇게 유사 자연에서 비롯한 작가의 작업은 무의식을 상징하는 흐르는 물로, 저마다의 내면을 상징하는 어두운 방으로, 자기반성적인 거울을 대신한 달로, 그리고 칠흑 같은 바다 위에 둥둥 떠다니는 섬으로,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의 메타포로 확장되고 변주된다. 자연을 소재로 한 작가의 작업이 정작 자연 자체보다는 자연을 통해 나를 보고 나를 통해 자연을 보는 유비적 상관성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방증하는 대목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런 유비적 상관성은 평면보다는 설치작업에서 더 그런데, 아마도 자연을 통해 자기를 보고 싶은, 자연에 투사된 자신(자기_타자)과 대면하고 싶은 욕망이 평면에서 설치작업으로 확장하도록 추동했을 것이다. 

자연을 보는 것은 그저 보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내가 긴밀하게 만나지는 극적인 사건이다. 내 쪽에서 자연으로 건너가는 것과 자연에서 나에게로 건너오는 것이 충돌하면서 교감이 생기고 감동이 생긴다. 그 자체로는 형태도 색깔도 없는 이 교감, 이 감동에 작가는 실체를 부여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자기 내면을 건드리는 빛의, 바람의, 물의, 공기의 질감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보통 한국화의 경우 대개 먹그림에서 시작하기 마련이다. 먹그림에서 시작해 점차 오브제로, 영상으로, 그리고 공간 자체를 유사 자연으로 꾸민, 때로 장소 특정성이 강한 공간설치작업(장소가 결정적인, 장소와 운명을 같이 하는, 그러므로 장소가 없으면 작업도 없는)으로 확장해가기 마련인데,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작가는 처음부터 오브제 작업에서 시작했다(물론 먹그림을 그린 습작기에 해당하는 시기는 있었을 것이다). 촘촘하고 성근 구조의, 짙고 엷은 색의, 크고 작은 천 조각을 자르고 붙여 영락없는 먹그림 그대로를 재현했다. 실경 그대로를 빼닮았지만, 그림은 태생적으로 편집적이고 재구성적이었다. 천 조각 하나하나를 먹그림에서의 필이나 준이나 획에다 비유할 수가 있겠고, 그렇게 천 조각 하나하나를 모나드(단위원소) 삼아 나무를 이루고 산을 이루고 풍경을 이루고 그림을 이루었다. 그렇게 편집된 풍경을 이루고 재구성된 풍경을 일궈냈다. 

주지하다시피 지금은 디지털 시대다. 디지털 이미지의 최소 단위원소에 해당하는 픽셀은 유동적이다. 이처럼 유동화된 픽셀을 조작하고 조합하는 방법으로 실재하는 풍경은 물론이거니와 가상적인 풍경마저 눈앞의 현실로 불러올 수 있다. 그렇게 감각적 현실과 가상현실이 그 경계를 허물고 넘나드는 시절에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편집된 풍경, 재구성된 풍경은 뭔가 변화된 시대 감정에 부합하는 면이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더욱이 작가의 작업은 이런 시대 감정을 하이테크놀로지가 아닌 로우테크놀로지로 구현한 것,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실현한 것, 그러므로 물성과 질료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어서 오히려 그 울림이 더 크고 감각적 쾌감도 더하는 편이다. 디지털적인 시대 감정을 아날로그적인 감각으로 풀어낸다는 역발상이 자기표현을 얻고, 또 다른 형식적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수묵 산수화는 문인 사대부 계급의 전유물로 알려져 있다. 가부장적인 시대 감정은 차치하고라도 남성 화가의 문기와 문향, 여기와 풍류의 소산이고 산물이었다. 여기에 작가는 어쩌면 여성적인 소재의 옷자락을 자르고 붙여 먹그림을 대신했다. 여기에 작가의 작업은 시각적임을 넘어 촉각적이기조차 하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에는 어쩌면 여성적인 그리고 여성주의적인 성적 정체성과 감수성이 반영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까. 공교롭게도 자크 데리다 역시 전통적인 회화를 시각 중심주의, 이성 중심주의, 로고스중심주의로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서 촉각적인 언어를 제안한 적이 있다. 그리고 다시, 현대미술에서 온통 이런 시각적이면서 촉각적인 언어표현이 다반사가 아닌가. 

작가의 작업을 여성주의로 한정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적어도 그런 일면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게 어쩌면 작가의 작업은 전통적인 산수화를 여성적인 감수성으로 재해석하고 자기화해놓고 있다고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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