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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언/ 미드 세대의 시대 감정, 사랑과 좌절

고충환



김제언/ 미드 세대의 시대 감정, 사랑과 좌절 


우리의 삶은 남들만큼 특별하고, 남들의 삶은 우리만큼 불안하다. (허지웅의 살고 싶다는 농담 중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은 특별한 날이 아닌 사소한 하루다...함께 비를 맞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비가 기다려지게 된다. (작가 노트) 

당신의 꿈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겠습니다. 턱시도를 갖춰 입은 존이 상기된 얼굴로 손에 반지를 쥐고 말한다. 비록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손은 떨고 있을 것이다. 당신의 희망이 되어 드릴께요. 수줍은 듯 에이미가 답한다. 서로를 향한 상기된 그리고 수줍은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배경 화면은 붉게 타오르고, 선남선녀의 신성한 약혼식을 축복이라도 하듯 별빛이 반짝인다. 아니면, 온통 붉게 물든 대기가 폭죽이라도 터진 것 같다. 그리고 존의 어깨에 올라앉은 고양이 미미가 그 역사적인 현장의 증인이 되어준다. 

그리고 블론디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데니스의 손 위에서 말한다. 나는 네가 우주만큼 넓고 별처럼 반짝이는 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데니스가 사랑스러운 눈길을 그녀에게 보낸다. 실제로 데니스는 가슴 속에 우주를 품고 있기도 하다. 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꿈속에서 데니스는 곧잘 달을 조각배 삼아 우주의 바다를 항해하기도 하고, 꿈을 꾸지 않을 때는 물이 담긴 수조에 달을 빠트리면서 논다. 

그런가 하면, 초원 위 오두막집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린다를 생각하면 케빈의 가슴은 떨린다. 집에서 멀어질 때면 아쉬운 마음에, 집에 다가갈 때면 반가운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손을 흔든다. 그림에는 비록 초원 위 오두막집만 보이지만, 아마도 그 집안에서 린다 역시 손을 흔들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앨버트는 눈물인지 안광(빛)인지 알 수는 없지만, 눈에서 이야기를, 말을, 언어를, 텍스트를, 속말을, 그러므로 자기표현을 발설한다. 눈으로 말한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에릭은 오롯이 저만의 공간인 욕실에서 좌절한다. 


헐리우드 키드. 안정효의 소설과 정지영 감독의 영화로 유명해진 것이지만, 구세대 문화 풍속도의 단면을 함축하는 말이다. 당시 이렇다 할 놀거리가 별로 없었던 사람들은 영화관에서 시간을 죽이곤 했다. 당시 극장들은 대개 이본 동시상영 하는 데가 많았고, 극장 매점에서 싼 불량식품으로 끼니를 대신하고, 잠도 자고, 때로 생판 초면인 남녀가 눈을 맞추곤 했다. 

정작 자신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영화에서 시가를 입에 물고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씹어 돌리는 장면을 흉내 내기도 했고, 지금 생각하면 초보 수준의 녹음기능이 장착된 케이스형 턴테이블을 틀어놓고 영화에 나오는 음악과 대사를 녹음하기도 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장고>와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 그리고 이소룡의 영화 <정무문>과 <용쟁호투>는 하도 봐서 웬만한 장면은 통째 외울 정도였지만, 학교에서 단체 관람한 <성웅 이순신>을 보면서는 영화 내내 잠잔 기억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돌이켜보면 비처럼 흘러내리는 지직대는 화면과 함께 청춘을 흘려보낸 시절이었고, 좌절과 부랑이 위로받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세태가 바뀌었다. 영화의 시대가 가고 인터넷의 시대가 왔다. 그 와중에서도 영화는 여전히 강센데, 다만 영화관에서 안방극장으로 그 무대가 바뀐 것이 달라진 점이다. 이제 사람들은 넷플릭스와 미드에 열광한다. 노랑머리 존과 파란 눈의 에이미는 예전에 영화 속에서나 살았지만, 이제 그들은 영화 밖 일상을 사는, 이웃만큼이나 친근한 존재들이 되었다. 창작환경도 덩달아 변화를 맞고 있는데, 문학으로 치자면 인터넷 소설과 웹소설이 그렇다. 인터넷 소설과 웹소설 자체는 문학이라는 상품이 소비되는 채널을 중심으로 본 개념이지만, 동시에 변화된 창작환경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중 순수하게 인터넷을 통해 수집된 정보만을 가공해 소설을 창작하는 경우가 있어서 주목된다. 구글 지도를 이용하면 세계 어디든 그곳의 거리며, 상점이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고, 그렇게 채집된 정보를 가공해 소설을 창작한 것이다. 거리명도 영어고, 상호도 영어고, 등장하는 사람들도 영어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저자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제하면 영락없는 영어문화권 소설이다. 내가 사는 현실 그러므로 나의 현실이 아니므로 현실이라고도 할 수가 없고, 비록 채집된 것이지만 엄연한 현실을 가공한 것이므로 비현실이라고도 할 수가 없는, 그 자체 경계의 문학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인터넷을 매개로 한 현대인은 직접경험과 간접경험, 가상현실과 감각적 현실이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혼용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림 역시 마찬가지. 저마다 손안에 세계를, 그리고 세계를 가공할 수 있는 도구를 휴대하고 있는 디지털 전사인 동시대 작가들에게 만화, 애니메이션, 일러스트, 포토샵, 웹툰, 카툰, 유튜브, 엡, SNS, 그리고 최근에는 메타버스와 NFT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대미술의 규범이며 기준이 되어준다. 미술사적으로 보자면(사실 이마저도 지금 보면 고전적으로 보이지만), 그 콘텐츠를 제공한 것이 팝아트와 네오팝, 정크아트와 컴바인아트, 그래피티와 어반아트, 거리의 예술과 정치예술이며, 이로부터 유수의 작가들이 창작과 일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현대미술의 아트씬을 바꿔놓고 있다. 더욱이 여기에 인터넷이 이미지의 창작 환경과 소비행태를 바꿔놓으면서 오리지널리티보다는 차용된, 편집된, 재구성된 이미지를 보편화시켰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제 누구도 출처를 따지지 않고 정체성을 묻지 않는 시대의 미술이라고 해야 할까. 혼성의 시대인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혼성의 혼성, 그러므로 후기의 후기 시대의 미술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어쩌면 내가 존이고 동시에 에이미이기도 한, 네가 블론디이면서 동시에 데니스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대의 예술이라고 해야 할까. 작가 김제언의 창작에 대한 태도가 그렇고, 그림이 그렇다. 현실에 관한 한 그에게 감각적 현실과 가상현실은 그 가치가 다르지 않고, 그의 정체성을 형성시켜준 원천으로 치자면 간접경험은 직접경험만큼이나 의미가 있다. 그렇게 작가는 스스로 탈경계와 혼성의 시대를 사는 주체를 공유하고 공감하는 선남선녀들의, 그러므로 동시대인의 꿈과 희망을, 욕망과 좌절을 그렸다. 


옛날에 시인들은 노트를 가지고 다녔다. 부유하는 단상이며, 날아다니는 시어를 붙잡아두기 위해서다. 지금은 핸드폰이 노트를 대신한다. 마찬가지로 화가들 역시 스케치북을 가지고 다녔는데, 지금은 핸드폰과 태블릿 피시가 스케치북을 대신한다. 지금은 누구든 핸드폰과 태블릿 피시로 그림을 그릴 수 있고, 판화에서처럼 에디션 개념을 적용해 그 자체 한정된 최종 출력물의 형태로 작품을 제작할 수도 있다. 아직은 보편화된 경우는 아니며, 대개 이보다는 예전에 스케치북에서처럼 먼저 밑그림을 그려 보는 용도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작가 역시 그런데, 대개 피시로 먼저 그림을 그려 본 연후에, 그 이미지 그대로 캔버스에다 옮겨 그리는 편이다. 주지하다시피 피시에 그린 그림은 피시에 내장된 자기 발광성 소재의 기판으로부터 발해지는 은근한 빛으로 인해 실제보다 더 밝은 색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꼭 그렇지는 않지만, 대개 섬세한 그림보다는 대략적인 그림에 어울린다. 색상이 밝고 원색적이며, 여기에 소재의 형태적인 특징을 포착해 그린 작가의 그림이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인지 말해주는 대목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향후 그림에 대한 작가의 입장이 어떻게 바뀔지 여하에 달린 것이지만, 앞으로 세부가 살아 있는 섬세한 표현을 기대해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현란한 색채와 거침없는 붓질이 두드러져 보이는, 최소한의 심플한 화면 구성에 혼성적인 정체성을 표현한(어쩌면 혼성적인 정체성으로 때로 아파하고 더러 즐길지도 모를), 이미지와 텍스트가 경계를 허물면서 하나의 화면에 혼용된, 그렇게 서사를 확장하는 그림을 그렸다. 미디어와 디지털 시대환경의 세례를 받은, 핸드폰과 태블릿 피시 세대의 꿈과 희망과 좌절을 그렸다. 헐리우드 키드로부터 미드 마니아로 이어지는 세대 감정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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