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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필용/ 폭포의 곧은 소리, 역사의 현장에서 그리고 심연의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소리

고충환



송필용/ 
폭포의 곧은 소리, 역사의 현장에서 그리고 심연의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소리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나태, 행동이나 성격 따위가 느리고 게으른)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 김수영의 시 「폭포」

폭포는 규정할 수 없는 것을 규정한다. 혹은, 규정하게 만든다. 플라톤은 모방론에서 상기가 예술의 핵심이라고 했다. 규정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규정할 수 없는 것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이런 상기가 없다면 예술도 없다. 다시 말해, 규정할 수 있는 폭포, 감각적인 폭포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규정할 수 없는 폭포 그러므로 폭포의 궁극, 폭포의 본질, 폭포의 관념, 폭포의 이데아, 폭포의 폭포다움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그게 뭔가. 한결같은(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는) 고매한 정신이다. 

작가 송필용이 그려놓고 있는 <심연의 폭포>가, 그리고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연작이 그 고매한 정신과 통한다. 작가는 말하자면 감각적인 폭포 자체가 아닌, 그것이 상기시키는 그러므로 미처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는 고매한 정신을 그린 것이다.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는? 숭고다. 인간이 자신의 감정 용량을 초과한 자연을 대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감각적인 자연의 궁극, 본질, 관념, 이데아, (고매한) 정신 그러므로 어쩌면 초자연적인 존재를 상기시키거나 대면할 때 느껴지는 감정이다. 마크 로스코와 바넷 뉴먼 같은 색면화파가 미니멀리즘을 통해 추구했던 지경이기도 하고, 공교롭게도 작가의 그림이 가 닿은 지점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이 흥미롭다. 

그 폭포가 곧은 소리를 낸다.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사실 폭포는 낮에도 곧은 소리를 낸다. 밤낮없이 곧은 소리를 낸다(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그러나 폭포가 떨어지면서 내는 곧은 소리는 낮에는 잘 들리지 않는다. 어수선할 때, 잡다할 때, 감각적일 때 폭포가 내는 곧은 소리는 어수선하고 잡다한 감각 그러므로 시각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도 밤이 되면 폭포가 내는 곧은 소리는 어김없이 돌아온다. 시각이 닫히고 청각이 열리는 것인데, 그러나 이때(밤)의 소리는 그때(낮)의 소리와 같으면서 다르다. 밤의 소리가 낮의 소리를 부르고(상기시키고), 감각 그러므로 청각적인 소리가 심연의 소리를 부른다. 곧은 소리가 곧은 소리를 부르는 것이다. 

그렇게 곧은 소리를 부르는 곧은 소리는 밤에만 들을 수 있고, 심연이 열렸을 때(그러므로 심연에 귀 기울일 때)만 들을 수 있다. 그 소리를 듣기 위해 밤에 오롯이 저 홀로 폭포와 독대하고 싶어진다. 폭포가 떨어지면서 만드는 형태(꼴)를 (곧은) 소리에 빗댄 형태적 유사성에 착안한 것이나, 시각과 청각이 서로 통하는, 그리고 여기에 때로 심연마저 열리게 만드는 공감각이 실현되고 있는 점도 주목해볼 일이다. 

다시, 그 폭포가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한결같다는 말이다. 절대적이라는 말이다. 한결같은 것 그리고 절대적인 것은 높이도 없고 폭도 없다. 사실은 높이도 있고 폭도 있을 것이지만, 그 높이며 폭을 측량할 수가 없다. 측량은 어디서 어떻게 유래하는가. 선입견과 편견, 롤랑 바르트로 치자면 독사(doxa 부르주아의 계급의식을 반영한 언술행위 그러므로 상식)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한결같은(그리고 절대적인) 폭포, 높이도 없고 폭도 없는 폭포는 이런 선입견과 편견 그러므로 어쩌면 나태와 안정이 측량하고 규정해준 폭포(그리고 같은 말이지만 폭포의 개념)를 뒤집어 놓는다. 

그리고 측량(그리고 어쩌면 규정마저도)은 비교와 차이로부터도 온다. 하나의 사물 대상은 다른 사물 대상과의 비교와 차이를 통해 비로소 측량도 되고 규정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비교할 사물도 차이 나는 대상도 없다면? 폭포라는 사물 대상이 속해져 있는 배경 화면이 없다면? 그렇게 폭포 자체가 오롯이 전면적으로 육박해온다면?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심연의 폭포>가 그렇고,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가 그렇다. 작가가 감각적인 폭포를 통해 규정할 수 없는 폭포 그러므로 폭포의 궁극, 폭포의 본질, 폭포의 관념, 폭포의 이데아, 폭포의 폭포다움을 상기시키는 지점이고, 폭포가 숨겨놓고 있는 고매한(그리고 숭고한) 정신과 대면하게 만드는 지점이며, 측량도 없고 규정할 수도 없는 한결같은 폭포, 절대적인 폭포가 열어놓는 지경이다. 

물론 처음부터 작가가 이런 한결같은 폭포, 절대적인 폭포 그러므로 어쩌면 폭포 자체를 그린 것은 아니다. 그전에 폭포는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풍경의 일부에, 부분으로 속해져 있었다. 그리고 점차 폭포 자체에 주목하게 되면서 폭포를 관념화하고(폭포의 관념을 외화하고) 추상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렇게 폭포 자체를 부각하는, 오롯이 폭포 자체와 대면하게 만드는, 폭포 자체를 대상화한 일종의 사물 초상화로 부를 만한 그림을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작가의 폭포 그림은 김수영의 시 <폭포>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래서 그런지 작가의 폭포 그림은 꼭 김수영의 시 <폭포>를 그림으로 옮겨 그린 것도 같다. 물론 그 과정에서 김수영이 속해져 있던 시대 감정이 작가의 개인사적인 경험(작가는 1980년, 5.18의 현장에 있었고, 이후 땅의 역사 시리즈를 비롯한 작가가 그린 모든 그림의 원천이 된다)을 일깨운 부분도 있다. 이를테면 곧은 소리는 칠흑 같은 밤(암울한 정치적 현실)에 더 잘 들리고, 심연의 소리를 부르고(억압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만들고), 지금 여기의 소리를 부른다(그때의 소리가 지금 여기의 소리로 확대 재생산된다). 

그렇게 작가는 <심연의 폭포>와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연작을 통해 폭포의 곧은 소리로 표상되는 역사의 소리, 민중의 소리, 심연(혹은 내면 혹은 본연)의 소리 그러므로 존재의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소리를 그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굽이져 흐르는 물길을 소재로 한, 도도한 역사의 에너지를 보여주고 있는 <역사의 흐름> 시리즈와 함께. 


모든 풍경에는 상처가 있다. 스치는 바람에도 상처가 있고, 으스름 달그림자에도 상처가 있고, 발끝에 차이는 바싹 마른 낙엽에도 상처가 있고, 턱 턱 갈라진 바위에도 상처가 있고, 무심하게 흐르는 강물에도 상처가 있고, 생각 없이 올려다본 산에도 상처가 있다. 켜켜이 내려앉은 시간의 더께 위에, 그 속에 상처를 상흔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인데, 그 상흔은 작가가 그린 그림 중 <땅의 역사> 연작에 더 잘 반영되고 더 잘 드러나 보인다. 땅의 역사가 곧 땅이 겪었을 사연(사건)이고, 땅이 기억하고 있는 상처고, 땅에 아로새겨진 상흔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물은 어떤가. 물을 소재로 한 일련의 다른 그림들, 이를테면 <심연의 폭포>,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역사의 흐름>, 그리고 5.18 분수 광장을 소재로 그린 <역사의 샘> 시리즈에서 상흔은 또 다른 형태와 경우로 아로새겨진다. 땅에 상흔이 말 그대로 아로새겨진다면, 물에서 상흔은 흐르면서 아로새겨진다. 흐르면서 지운다. 상흔을 만들면서 지운다. 상흔을 만들면서 치유한다. 이처럼 상처를 되새김질하면서 동시에 치유하기도 하는 흐르는 물의 이중성, 양가성을 물 자체의 항상적인 운동성과 하나로 표현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작가가 불러낸 것이 분방한 선묘고 자유 드로잉이다. 그 형식실험을 작가는 작가의 고향인 전남 고흥의 분청사기 기법에서, 조화기법에서 착안한 것인데, 형사(형태를 닮게 그리는)보다는 사의(형태에 숨은 뜻을 그리는)를 중시하는 것이나, 전통에서 현대를 발견하는 것(오래된 미래?)이 회화에 접근하는 작가의 특유한 입장과 태도를 말해준다. 재료와 매체는 서양화이면서도 정작 그 정신(회화 정신)은 자기가 유래한 원천으로부터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동과 서의 융합이, 신과 구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야 할까. 

여기서 조화기법은 태토(기면)에 백토를 칠하고 조각도로 문양을 새겨 넣은, 그래서 기면과 문양 부분의 색채가 서로 대비돼 보이는 것이란 점에서 상감기법의 한 경우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여기에 작가는 층층이 쌓아 올린 색층에 대나무 칼이나 나이프로 상흔을 아로새겨 밑 색(상처의 속살?)이 드러나 보이게 만드는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은 순차적이고 기계적이라기보다는 우연적이고 무계획적이고 유기적이다. 분방한 선묘와 함께 더러 문자나 숫자 그리고 알 수 없는 기호를 새겨 넣기도 하는데, 아마도 역사의 상흔을 되 불러온 것들이며, 반쯤은 무의식적이고 자동기술적인 것들이며, 몸이 부르는 대로 감각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래서 일종의 몸 그림으로 부를 만한 것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특이한 것으로 폭포를 소재로 그린 그림의 가장자리에 비정형의 테를 두른 점이다. 마치 창을 통해 보는 것 같은, 무대를 올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실제로 폭포 그림 밑에 올망졸망한 실루엣 형상이 보이는데, 바위를 의미하겠지만, 동시에 무대를 향한 사람들의 실루엣처럼도 보인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폭포의 곧은 소리로 표상되는 역사의 창을 보는 것 같고, 역사의 현장에 동참하고 있다는 현장감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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