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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화 이후, 무묵수묵, 수묵은 도처에 있다_2021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를 계기로 본 (下)

고충환



수묵화 이후, 무묵수묵, 수묵은 도처에 있다

_2021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를 계기로 본 (下) 



(上) : http://www.daljin.com/column/20083


한상진, 풍경의 상처. 자연이 열어놓는 풍경에 내가 참여하기 위해선, 그렇게 자연을 향유 하기 위해선 내 쪽에서 자연으로 건너가는 무엇, 나를 향해 자연을 열어놓을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중개 혹은 중재를 말하는 것인데, 감정적인 도구며 개념적인 도구가 그것이다. 그게 뭔가. 작가의 경우에는 무경계, 스침, 소요, 그리고 흐르는 풍경이 그것이다. 작가가 자연을 볼 때, 자연을 보면서 자연을 풍경으로 변질시킬 때, 그렇게 자연이 열어놓는 풍경에 동참할 때 작가가 사용하는 도구다. 그 자체 작가의 그림을 뒷받침하는 주제이기도 하고, 평소 자연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를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이기도 하다. 여기서 다시,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소요, 그리고 흐르는 풍경이라고 부른다. 소요란 무엇인가. 목적도 없이 의식도 없이 자기를 투기하는 것을 말한다. 어디에 무엇을 투기하는가. 텅 빈 자기, 열린 자기를 풍경 속에 던지는 것이다. 그렇게 열린 풍경과 열린 자기가 소통하면서 스스로 풍경의 몸이 되고, 풍경이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메를로 퐁티는 주체와 객체 사이엔 우주적 살로 채워져 있어서, 원래는 주체와 객체로 구분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렇게 내가 이미 풍경이다. 우주적 살이고 몸이다. 그러므로 풍경을 그리는 것은 곧 내가 연장된 몸을 그리는 것이고, 나를 그리는 것이다. 작가는 산 그러므로 풍경을 상처와 파편이라고 본다. 혹은 풍경에서 상처와 파편을 본다. 상처와 파편이 뭔가. 작가는 지시성이 강할수록 언어는 이데올로기가 된다고 했다.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것들, 의미화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것들, 의미화했을 때 오히려 그 의미가 왜곡되고 훼손되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아마도 상처와 파편은 이처럼 의미화의 과정에서 왜곡되고 훼손된 것들을 의미할 것이다. 작가는 흐르는 풍경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의미화의 과정으로 왜곡되고 훼손되지 않은 풍경, 그러므로 의미화 이전의 풍경 자체를 의미할 것이다. 풍경은 흐른다. 흐르는 것을, 항상적으로 이행 중인 것을 어떻게 의미로 결정화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의미화에 실패한 작가의 그림이 청회색 조의 희뿌연 기운이 감도는 모노톤으로 그려진다. 어둠이 내려앉기 직전의 어스름할 즈음에, 그리고 새벽녘에 본 풍경이라고 했다. 작가는 풍경 그러므로 몸의 피부를 그린다고 했는데, 대기와 접촉되는 몸의 최전선을 표현하기에 어울리는 경우라고 생각된다. 그 구조(붓질의 결)를 보면 헐렁한데, 말 뒷다리 털로 만든 붓이며 양털로 만든 붓으로 그린 것이라고 했다. 비결정적인 것들, 의미화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것들, 의미의 부스러기로 겨우 얼버무릴 수 있는 것들, 숭숭 뚫린 구멍 사이로 의미가 새 나가는 것들을 포섭하기에 적절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산에 기대어, 상처와 파편으로 나타난, 사실은 자신의 징후와 증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풍경에 의지해, 의미화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것들, 흐르는 것들, 이행하는 것들을 포섭하고 있었다. 



유승호, 문자 산수. 유승호의 작업은 일종의 문자로 된 그림, 문자 드로잉, 캘리그래피의 한 형식으로 범주화된다. 캘리그래피의 범주를 수용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그것을 벗어나는 양가적인 태도와 과정으로 읽혀진다. 문자와 그림, 의미와 이미지 사이의 경계 위에 있는 그 과정은 현재진행형의 비결정적이고 불안정한 인상을 준다. 이는 그림이 발생시키는 의미를 공고히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의미를 흔들어 의미의 토대를 해체 시키는 전략적인 장치를 형용한다. 그리고 그 장치는 어떤 거대 담론에 힘입은 것이기보다는 의미 세계 곧 의미로 축조된 세계를 자기의 안쪽으로 불러들여 이를 해체 시키고 재편집하는 놀이와 유희의 유기적 본성과 관련이 깊다. 말하자면 작가는 문자의 두 성분인 의미론적인 속성과 시각적 쾌감(그림)과의 사이에서 (심지어는 여기에 슈 같은 소리마저 합세하는) 노는 것이다. 이로써 작가는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촉발된 의미가, 그리고 이미지와 의미와의 관계가 전적으로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것임을 말해준다. 


유승호의 트레이드마크인 문자 산수는 얼핏 전통적인 산수화를 패러디한 것 같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보면 산은 온데간데없고 야호란 글자들만이 빼곡하다. 그림 속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야호 하는 소리에 산이 미동하면서 조금씩 허물어져 내려 마침내는 형태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전통적인 산수화를 산수의 이미지(그 자체 선입견으로 굳어진 것을 재확인시켜주는 과정과 관련된 것이란 점에서 기호로도 바꿔 부를 수 있을)와 야호 라는 글자(와 의미), 그리고 그 글자가 떠올려주는 잠재적인 소리가 상호 작용하는, 이상한 그림(?)으로 바꿔놓고 있는 것이다. 



권부문. 산수와 낙산, 와유와 무한. 설악의 속살을 드러낸다거나, 가장 흔한 돌에서 사물 초상화의 개념을 감지해낸다거나, 비행기 시점과 같은 시점을 그 극한까지 끌어올려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지운다. 말하자면 하늘 바다라고 하는, 어쩌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종류의 풍경을, 비전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산수와 낙산. 산수는 장르 개념이고 낙산은 지명이다. 편의상 구분해본 것이지만, 사실은 산수 역시 실제 하는 어떤 지점을 찍은 것이란 점에서 지명과 통한다. 산수와 낙산이란 지명은 이번 전시의 두 축인 셈인데, 산수를 통해서 특유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지명을 통해서 그때 그곳에 내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 미학적인 경험과 함께 존재의 증명이 수행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존재의 증명은 사진의 또 다른 본질이다). 


주지하다시피 산수는 수묵화의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장르다. 산수 시리즈를 통해서 작가는 마치 수묵화와도 같은 깊고 심원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겨울에 더 잘 드러난다. 겨울에 자연은 더 산수답다. 겨울에 산은 헐벗는다. 산도 헐벗고 나무도 헐벗고 색깔도 헐벗는다. 그래서 무채색 일색인 겨울산은 성글고 그 골기가 더 잘 드러나 보인다. 여기에 눈이라도 내릴 때면 검은 나무와 흰 눈과의 대비가 뚜렷해지고, 골짜기 사이에 흐르는 희뿌연 눈발이 그 대비를 더 두드러지게 하면서 원근을 만든다. 이렇게 겨울 산은 첩첩이 중첩돼 쌓이면서 수직적인 구조를 강조하고, 화면 안쪽으로 열린 것 같은 깊숙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작가의 시점은 낙산 시리즈에서 산에서 바다로, 올려다보던 것에서 멀리 내다보는 것으로 옮아온다. 산수 시리즈에서 수직적인 구도와 함께 적막감이 강조되고 있다면, 낙산 시리즈에서는 옆으로 무한정 연장된 것 같은 수평적인 구도와 함께 막막함을 떠올리게 한다. 막막함이 적막감을 집어삼키고, 가없음이 숭고한 골기를 끌어안는다. 가없다는 것, 끝없다는 것, 무한정 연속돼 있다는 것, 그것의 성질은 삼킴이며, 끌어안음이며, 포용력 속에 사라지게 함이다. 여기서 작가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내다보는가. 그것도 멀리 내다보이는 그것(그곳)은 밤이며, 어둠이며, 심연이며, 죽음이며, 무한이다. 무한한 어떤 지경 위에 내가 서 있다는 것, 그것은 세계가 지워지고 재편되는 경험이다. 그 지경 안쪽으로부터 마치 시간의 전령인 양, 무한한 세계의 화신인 양 눈발들이 표표히 건너오고 있다. 


산수와 낙산. 산수의 전통적인 미덕은 와유다. 내가 그림 속에 들어가서 노니는 것. 실제로 노닌다기보다는 그 경지를 암시한 것. 그리고 낙산은 무한한 세계에 직면해 있다는 존재의 증명이 암시된다. 작가의 풍경 사진은 큰 편이다. 마냥 큰 것이 아니라, 산수의 와유와 낙산의 무한을 담아낼 만큼 크다. 그래서 그 큰 사진(풍경) 앞에서 우리는 사실은 사진(풍경) 속에 들어가 있다고 느낀다. 



배종헌, 얼룩 회화 혹은 흔적 회화. 작가의 그림은 얼룩 회화 혹은 흔적 회화라고 부를 만한, 자기만의 가능한 회화 지평을 열어놓고 있다. 이를테면 여기에 미장이가 회칠한 회벽 혹은 시멘트를 칠한 벽면이 있다. 보기에 따라서 그 벽면은 미니멀리즘 타블로 작업을 연상시키고, 모노톤 회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여기서 미니멀리즘은 예술이 가능해지는 조건을 상황 논리에서 찾는다. 말하자면 그 벽면은 일상이라는 맥락 속에서 벽면이지만, 제도권 미술 속에 들어오는 순간 작품이 된다는 논리다. 여기에 미장이는 벽면을 바를 때 자신의 땀도 바르고, 한숨도 바르고, 걱정도 바르고, 눈물도 바른다. 논리적 비약이나 상상력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고, 실제로도 그렇다. 물론 그걸 벽면에서 캐내고 읽어내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그렇게 작가는 벽면으로부터 벽면 회화를, 검댕으로 새까만 터널에서 터널 회화를 캐냈다. 얼룩과 검댕 속에 숨어 있을 누군가의 땀을, 한숨을, 걱정을, 눈물을 풍경으로 되불러냈다. 



김도희, 손톱 산수 그러므로 몸 산수. 이 작업에서 작가는 전통적인 산수화 중 겸재 정선의 <만폭동도>를 재현한다. 그런데, 그 재현하는 방법이 예사롭지 않다. 샌드페이퍼를 연이어 붙여 대형 화면을 만든 다음, 그 위에 자신의 손톱으로 드로잉 하는 방법과 과정을 통해 그림을 그린 것이다. 


지두화를 너무 맹렬하게 그린 나머지 일시적으로 지문이 다 지워져 없어졌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는 경우와 그 정도로 치자면, 작가의 이 작업은 지두화와 비교가 안 된다. 흔히 그림을 작가의 분신이나 혼에 비유한다. 그러나 작가에게서 이 말은 더이상 비유법이 아닌, 말 그대로의 몸이 그린 그림 곧 몸 그림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액션페인팅 곧 몸 그림은 작가의 경우에 적용되어져야 한다. 


실제로 해보면 알겠지만, 사포에 손톱으로 그림을 그리면 얼마 그리지 못하고 손톱이 다 닳아 없어진다. 그리고는 그림을 계속 그리기 위해 손톱이 다시 자라기를 기다려야 하고, 마침내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그렇게 손톱이 닳아 없어지고 재차 자라기를 몇 번이고 거듭해야 한다. 이런 연유로 작가의 이 작업은 완성하기까지 수 달(2004년 6월에서 9월까지)이 걸렸으며, 이 기간은 그대로 그동안 자란(사실은 닳아 없어진) 손톱의 생장 기간에 해당한다. 이 작업은 말하자면 손톱의 생장 기간을 기록한 것이며, 손톱의 생육을, 몸의 생육을 그린 것이다. 



먹의 변용과 확장 


이재삼, 달빛과 검은 여백 

김유정, 프레스코 

신선주. 부드럽고 아득한, 깊고 어두운 심연과도 같은 음영 

이길우. 향불, 의미를 파생시키는 구멍들 

안정민, 실리콘 캐스팅 



이재삼, 달빛과 검은 여백. 작가는 목탄으로 그림을 그린다. 여기서 목탄은 먹이 확장된 경우로 볼 수 있다. 목탄은 부드러운 질감과 조직이 크고 성근 그림에는 제격이지만, 그림 위에 덧그리기 어렵고 상대적으로 세밀한 묘사에도 까다로운,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종적으로 그림을 정착시키기 쉽지 않은 단점이 있다. 그래서 목탄은 흔히 스케치나 드로잉 같은, 본격적인 그림을 위한 밑그림으로 많이 그린다. 작가는 지난한 형식실험 끝에 목탄이 갖는 이런 난점을 해결했고, 세밀한 묘사와 단단한 표면, 그리고 여기에 목탄 특유의 부드러운 질감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목탄화를 그리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렇게 무엇이든 그릴 수 있게 되었고, 특히 소나무와 숲과 폭포와 같은 자연을 특유의 정서를 담아 그린다.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을 달빛으로 명명한다. 정작 그림 속에 달이 등장하는 그림들이 많지 않은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에서 달빛은 무슨 의미인가. 우선 달빛은 달빛을 받아 반사하는 사물 대상의 은근한 표면 질감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달빛은 달빛으로 형용 되는 숲의 기운이며 정령이며 비의를 의미할 것이다. 말하자면 밤에 숲은 달빛의 기운을 받아 마치 어둠 속에서 부각 되듯 부드럽게 자기를 드러낸다. 사물과 사물 사이에 어둠이 드리워져 있어서 부분과 부분이 강조되기보다는 부분과 부분이 유기적인 덩어리로 다가온다. 그렇듯 어둠은 부분과 부분을 구별하기보다는 하나로 연속시키고 연장시킨다. 그렇게 연속되고 연장되는 사물과 사물 사이 곧 어둠 자체로부터 미처 그려지지 않은 것들이며 그림으로 환원되지 않은 것들이 수런거리면서 나무를 흔들고 숲을 일렁이게 한다. 달빛은 말하자면 어둠 자체와 사물 자체 사이에 존재하는 것들을 가시화한다. 그리고 그렇게 숲의 기운이며 정령이며 비의를 열어 보인다. 



김유정, 프레스코. 원래 프레스코는 회칠 된 벽 위에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김유정의 프레스코는 좀 특별하다. 회칠한 벽면 전체를 검게 칠한 연후에, 니들처럼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해 스크래치를 만들면서 그린다. 스크래치로 덧칠된 어둔 화면을 벗겨내 바탕화면의 회칠이 드러나게 한 것이다. 스크래치가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인데, 여기서 스크래치는 상처를 상징한다. 그리고 검게 칠해진 어둔 화면은 무의식(그리고 심연)을 상징한다. 결국 스크래치를 매개로 한 작가의 그림 그리기는 무의식에 억압된 상처를 드러내고 상처와 대면하는 과정을 통해서 종래에는 상처를 치유한다는 상징적이고 주술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런 만큼 작가의 작업은 상처와 그리고 상처의 치유와 관련이 깊다. 


작가는 식물을 소재로 한 자신의 그림을 <세력 도감, 식물에도 세력이 있다>로 명명한다. 한마디로 정리를 하자면 식물 세력이 될 것이다. 식물로 대변되는 미미한 것들에 잠재된 세력 가능성, 가능태로서의 세력 가능성에 주목한 것이란 점에 의미가 있다. 그리고 작가는 변방에서 잠재된 세력의 또 다른 한 가능성을 본다. 그런 점에서 식물 세력은 어느 정도 변방 세력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종에 대한 관심(식물세력)에서 시작해 자본주의 물신에 대한 관심(특히 이케아 매장을 소재로 한 작업)으로, 그리고 재차 지역의 문화관습에 대한 관심(변방세력)으로 주제 의식을 확장 심화시킨다. 



신선주, 부드럽고 아득한, 깊고 어두운 심연과도 같은 음영. 풍부한 중간계조와 흑과 백이 대비되는, 그러면서도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인 묘사를 보여주고 있는 작가의 그림은 흑백사진을 닮았고 메조틴트 판화를 닮았다. 특히 중간계조 혹은 검정 색조의 방식으로 알려진 메조틴트 판화는 사진이 발명되기 전에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 특히 초상화 제작을 위해 널리 쓰였던 판화 제작방식이다. 작가의 그림 역시 재료가 다르고 찍어내는 대신 그린 것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메조틴트 판화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 작가의 그림은 크게 흰 여백 부분과 회색 톤의 중간계조를 보여주고 있는 영역 그리고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화면이 구분된다. 빛과 어둠을 대비시켜 극적 긴장감을 더하는 한편, 실재로부터 취해온 소재임에도 기하학적 패턴이나 구도를 보는 것 같은 추상적 형식논리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의 그림에서 인상적인 부분이 바로 중간계조로 나타난 영역으로서, 오일 파스텔(크레용)을 칠한 후 동판화에서처럼 끝이 뾰족한 도구인 니들로 칠해진 부분을 미세하게 긁어나가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사물 형상이 드러나게 한다. 이로써 그림은 그 속에 사실적인 묘사 부분을 포함하고 있는, 빛과 어둠이, 여백과 그림자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흑백사진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 검은색 또한 인상적인데, 실제로 그림자는 그림자 속에 일정 정도 중간계조의 빛의 기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작가는 이를 무시하고 칠흑 같은 균일한 단면으로 그림자를 처리했다. 이 단색조의 검은색 화면으로 인해 작가의 그림은 빛과 어둠의 대비가 뚜렷해 보이고, 기하학적 구도가 두드러져 보이고, 실제보다 더 단순해 보인다. 현실로부터 소재를 취한 것임에도 그리고 적어도 외관상 현실 그대로 재현한 것임에도 추상적으로 보인다. 검은색 오일 파스텔을 수도 없이 덧칠하고, 여기에 일일이 손가락으로 눌러 펴는 과정을 통해서 캔버스의 올을 완전히 채워 편평하게 만든다. 이로써 수묵화의 먹빛보다도 더 검은, 아마도 카본보다도 더 깊은 색조의 검은색이 만들어진다. 더욱이 그 검은색은 조금의 빛도 반사하지 않는 탓에 실제보다 더 깊고 더 검어 보인다. 마치 외부의 빛이란 빛은 모조리 자기 내부로 흡수해 들이는 블랙홀 같다고나 할까. 외부 환경을 자기 내부로 낱낱이 빨아들여 점점 더 새까매지는 마치 칠흑과도 같은 어둠, 연옥과도 같은 어둠, 원형적인 어둠, 어둠 자체인 어둠에 직면케 한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서 검은색은 부드러운 벨벳의 질감이며 촉감을 떠올리게 하고, 그 깊이가 심연에 닿는다. 



이길우. 향불, 의미를 파생시키는 구멍들. 작가의 모든 그림에는 구멍이 있다. 지금은 전기인두를 사용해 화면에 구멍을 뚫지만, 원래 이 구멍들은 일일이 향불로 뚫은 것이다. 전기인두로 뚫은 구멍이 상대적으로 균일한 느낌을 준다면, 향불로 뚫은 구멍은 이보다는 더 비정형적이고 유기적이고 우연성에 더 많이 노출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향불을 종이에 대고 누르는 힘의 강도와 미세한 시간상의 차이에 의해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똑같은 것이 하나 없는 구멍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구멍들에는 어김없이 불에 탄 자국이 가장자리 선으로 남겨진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형태도 틀리고 크기도 다 틀린 구멍들이 흡사 좀 벌레가 갉아먹은 종이나 무명천을 보는 것 같고, 시간에 풍화된 흔적을 보는 것 같은 고답적이고 낡은 느낌을 준다. 비록 도구가 향불에서 전기인두로 달라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의미마저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단순한 도구적 차원을 넘어서는 그 의미란 무엇인가. 주지하다시피 한국화의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카테고리로 치자면 지필묵을 들 수 있다. 한국화와 관련한 모든 문제의식과 형식실험은 그 범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작가의 그림에서 그 범주 즉 종이에 먹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특정성은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만다.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한국화와 관련한 재료적 한계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이나 방식, 형식이나 표정마저도 다른, 판이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면서도 한국화 고유의 아우라를 잃지 않는데, 한 땀 한 땀 수놓듯 종이 위에 새겨 넣은 자국에 반영된 작가의 호흡이, 일종의 수행적인 과정이 그렇다. 말하자면 화면 가득히 빼곡한 구멍을 심는 과정에 긴장과 이완이 교차 되고, 이는 그대로 들숨과 날숨의 표상처럼 보인다. 그림에 일종의 숨구멍을 내는 행위를 통해 종이의 생리와 작가의 생리가 상호작용하는 것. 그렇게 향불 자국에 중첩된 이미지가 마치 색 바랜 흑백사진을 보는 것 같고, 시간의 켜를 헤집어 과거의 한 시점을 현재로 호출한 것 같은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고, 부재 하는 것들을 그리워하는 아득하고 서정적인 정감을 자아낸다. 현재와 과거 사이, 은폐와 비은폐 사이, 존재와 부재 사이에 어정쩡하게 위치한 그림들이 그대로 기억의 속성을 상기시킨다. 기억은 언제나 부재 하는 것들을 떠올리는 법이고, 이로부터 그리움과 향수가 딸려온다. 그리고 그 이미지가 흐릿할 때 더 기억답다. 작가의 그림은 바로 이처럼 기억이 그리움과 향수의 정서로 전환되는 지점을 건드리고 있다. 



안정민, 실리콘 캐스팅.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지는 폭포와 같은 일련의 풍경을 소재로 한 작업에서 작가는 먼저 원하는 이미지를 목판에 새긴다. 그리고 그 형태 그대로 실리콘으로 떠내는 것인데, 실제로는 실리콘을 겹겹이 발라 일정한 두께를 갖는 반투명한 패드를 얻는 식이다. 실리콘으로 떠낸 것인 만큼 세부가 살아있고 섬세하다. 마치 반투명한 살갗(혹은 피부)의 이면에서 은근하게 내비치는 것 같은 은회색의 부드러운 색감과 함께 촉각적인 성질마저 감지되는 편이다. 그리고 그렇게 섬세하고 부드럽고 은근한 미감을 자아낸다. 



물의 변용과 확장 그러므로 투명한   


송창애, 물로 물을 그리다 

김택상, 숨 빛 

김윤수, 투명 비닐 패드와 울트라마린블루 그러므로 바다 저편에서 온 블루 

장연순, 시간의 집을 짓다 



송창애, 물로 물을 그리다. 송창애는 물을 그린다. 그런데 그냥 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물로 물을 그린다. 물과 내가 동화되는 것으로 치자면, 그 동화가 더 잘 일어나는 경우로 볼 수 있겠다. 그냥 물을 그리는 것이 물과 나 사이에 일정한 거리두기가 유지되는 경우이며 주와 객이 분리된 경우라고 한다면, 물로써 물을 그리는 것은 그 거리가 삭제된 것이며 소거된 경우이기 쉽다. 아마도 작가가 굳이 물로써 물을 그리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물을 그리면서 물 자체(아마도 칸트의 물 자체와 그 의미가 다르면서 통할)를 그리고 싶었고, 물에 동화되고 싶었고, 그렇게 물을 그리면서 사실은 나를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곧 물이고 물이 곧 나라고 말하고 싶었고, 내가, 존재가, 세계가, 우주가 다름 아닌 물이라고(아니면 물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지며 차원을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실제로 작가의 그림 중 사진을 합성해 그린 그림이 물과 작가가 하나로 동화되는 과정을 예시해준다). 



김택상, 숨 빛. 작가는 숨 빛을 그린다. 숨 빛? 호흡과 숨결 같은 생기를 머금은 빛이다. 호흡과 숨결은 들고 날 수 있는 통로(숨길)가 있어야 한다. 작가의 그림에서 그 통로는 투과하는 성질과 함께 투명한 화면 위로 열린다. 작가는 거의 드러나 보이지 않을 만큼 섬세한 얼룩과 함께 물빛을 머금은 색감 위로 생기를 머금은 빛이 지나가도록 길을 내어준다. 여기서 얼룩이 반(半)가시적인 것은 시간이 비가시적인 것과 같다. 말하자면 중첩된 얼룩은 켜켜이 내려앉은 시간의 표상인 것. 그렇게 작가는 오로지 물빛만으로, 색감만으로 투명하고 섬세한 빛의 질감을 그려내고 있었다. 



김윤수, 투명 비닐 패드와 울트라마린블루 그러므로 바다 저편에서 온 블루. 김윤수 작가의 작업을 견인하는 경우로 치자면 투명 비닐 패드를 소재로 한 입체 조형 작업과 울트라마린블루를 들 수 있다. 울트라마린블루가 개념을 이끈다면, 입체 조형 작업은 그 개념을 조형으로 옮긴 경우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개념 축으로부터 다른 차이 나는 작업들이 파생되고 변주된다고 해도 좋다. 


해변이나 사막에 아로새겨진 발자국 같고,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면서 남긴 모래톱 같고,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그러므로 바람이 자신의 일부를 남기고 간 움푹 파인 자국 같고(패드가 만든 형태 자체는 양각이지만, 투명한 탓에 음각으로도 보이는), 패드와 패드가 겹쳐지는 지점에 라인이 생기면서 층 구조를 만드는 것이 등고선 같고, 산 같고, 절벽 같고, 회오리 같고,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는, 변화무상한, 그래서 덧없는 구름 같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발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발이 오만대로 가면서 유사 풍경을, 의식(아니면 무의식)의 풍경을, 내면 풍경을 만든다. 


비록 발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발이 오만대로 가면서, 의식을 따라 흐르면서 오만가지 형태로 변태 되는 형태가 의식의 흐름 기법(마르셀 프루스트)을 연상시키고,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다는 점에서는 무정형(조르주 바타이유)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 이런 의식의 흐름 기법이나 무정형은 입체 조형에서보다는 구름 드로잉, 하늘 드로잉, 별빛 드로잉, 달빛 드로잉, 파도 드로잉과 같은 일련의 드로잉이나 이를 묶어낸 책 작업에서 더 흐릿하게, 더 희박하게, 더 애매하게, 더 섬세하게, 더 깊게, 더 시적으로 전개되고 확장되고 심화된다. 



장연순, 시간의 집을 짓다. 작가는 섬유를 소재로 추상적인 구조와 형태를 구현한다. 마의 일종인 아바카 섬유를 소재로 만든 사각형을 모듈 삼아 이를 무수하게 중첩 시킨 겹 구조를 보여주고 있는 작가의 작업에서는 빛과 공간 그리고 공기의 흐름이 중요한 요소로서 작용 된다.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의 기하학적 형태를 기본형으로 이를 반복적으로 쌓거나 덧붙여나가는 방법으로 구조적인 다변화를 꾀하는데, 이 모든 과정이 풀 먹임과 바느질이라는 지난한 수작업을 통해서 수행된다. 수행은 작가의 작업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즉 작가는 단순히 구조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 자신의 존재를 투사한다. 이러한 사실은 자신의 몸을 최대한 단순화한 육면체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 상자 속에 자신의 마음을 담는다는 작가의 고백에서도 확인된다. 쪽빛으로 염색한 섬유에 풀 먹임과 재봉만으로 조형적이고 건축적인 형태를 만들어내는가 하면, 겹 구조를 통해 드러나 보이는 쪽빛 염색의 은근하고 맑고 깊은 색감이 동양적인 관조의 세계로 이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과 밖이 서로 닫혀있으면서 열린, 막혀있으면서 통하는 역설적인 구조를 실현한다. 구별하면서 통하는 구조, 이는 어쩌면 섬유의 가장 일반적인 특징이며 본질적인 국면이랄 수 있는데, 작가는 그 성질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극대화한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중첩된 망 구조의 조형물을 <늘어난 시간>이라고 부른다. 시간이 늘어나는 것은 주관적인 경험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도 주관적인 시간개념도 알고 보면 모두 주체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신축성 있는 섬유 구조물이 주관적인 시간을 추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이로써 무궁한 시간의 망 속에서 존재와 존재가 끊임없이 연기(緣起)하여 만나는 존재론적 사실을 주지시킨다. 



그 외 다른 변용과 확장의 가능성에 대하여 


황창배, 형식파괴와 자유구상 

이종상. 오래된 미래, 장판의 재발견 

임동식, 자연 되기 

유근택, 어쩔 수 없는 난제들 

양유연, 내면적인 너무나 내면적인 

김명진. 심연보다 깊은, 검은 어둠 속에서 섬광처럼 가물거리는 

배남경, 기억을 소환하다 

이진주, 의식의 흐름 

김승영, 구름 

김승영, 쓸다 

김승영, 당신은 당신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 

이수경. 번역된 도자기, 문화충돌과 문화번역 



황창배, 형식파괴와 자유구상. 형식파괴와 자유구상으로 특징되는 작가의 그림은 많은 부분 전통적인 민화에 나타난 한국적인 이미지를 재해석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를 실현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일종의 자유연상 기법에 근거한 일련의 그림들에서 한국의 집단적인 무의식의 원형을 추출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읽힌다. 작가의 그림은 한국화와 관련한 형식실험의 첨단이었다. 그리고 그 첨단은 지금 봐도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다. 먹그림과 아크릴이 어우러지는가 하면, 그림 속으로 문자가 거침없이 들어오고, 그렇게 문자는 조형의 한 요소가 된다. 설화와 현실이 하나의 화면 속에서 몸을 섞는가 하면, 사사로운 이야기가 서사의 핵심적인 역할을 도맡는다. 경계에 대한 의심과 실천 논리가 한국화의 장르적 특수성을 무색하게 한다고나 할까. 그렇게 현재 한국화단에서의 성과 중 상당 부분이 그의 회화에 빚지고 있다. 



이종상. 오래된 미래, 장판의 재발견. 수묵의 본성을 추구한 수묵화 운동, 고구려 고분벽화 기법을 현대적으로 되살린 벽화 운동, 한국식 산수의 원형을 추적한 원형상 시리즈, 그리고 동판 위에 금박을 붙이고 유약을 발라 고열로 접착시킨 동유화 등 한국화의 형식실험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시도며 제안들이 작가에게서 유래했다. 그의 화력은 가히 한국화를 매개로 한국화를 넘어서는 형식실험으로 점철된 것으로 봐도 되겠다. 그 형식실험의 연장선에는 수묵 추상을 특징짓는, 사물 대상의 골격에 대한 사의적 표현을 보여주는 진경 시리즈도 있다. 예컨대 작가가 그린 독도 진경을 보면 독도의 감각적 표면 현상(살)을 발라내고 그 이면의 본질(골격)을 그려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상이 결코 건조하거나 앙상하지는 않은데, 이는 수묵의 발묵 효과가 고유의 아우라를 더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진경을 단순한 실경을 넘어서는 어떤 경지며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가 하면 작가 스스로 장판화로 명명한, 꽤 오랫동안 숙성시켜온 일련의 그림들도 있다. 알다시피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종이 장판을 방바닥 재료로 사용해왔다. 아마도 방바닥으로 종이를 깔고 산 경우로 치자면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한국인 고유의 생활감정이며 철학이 긷든 예로 봐도 되겠다. 아마도 작가가 종이 장판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여기에 종이 장판은 사이즈가 한정돼 있어서 마치 조각보에서처럼 면과 면을 이어 붙여야 한다. 이런 연유로 종이 장판 작업에는 면과 면이 어우러진 면 구성이 있고 화면 운영이 있다. 여기에 치자 물을 들여 은근한 색채 감정을 자아내기도 한다. 처음엔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이후 아예 원형 그대로를 제안하기도 한다. 이로써 작가의 형식실험은 생활 오브제를 직접 도입하는 것으로 확장되고, 삶의 현장 속에서 예술의 계기를 발견하는 경우로 심화된다. 



임동식. 자연 되기. 임동식의 그림은 좀 특이하다. 유형무형의 대상을 재현하는 것을 회화의 일반적인 경우로 볼 때, 적어도 외관상 작가의 그림은 이 경우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런데 재현한 대상이 예사롭지가 않다. 작가가 그린 주요한 그림들 상당수가 자신이 실제로 퍼포먼스를 벌인 장면을 바탕으로 이를 회화로 옮긴 것이란 점에서 일종의 기록물 즉 도쿠멘타의 성격을 갖는 것이면서, 이와 동시에 그 자체가 독자적인 회화적 가치를 지닌 것들이다.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작가는 거북이로 그리고 때로는 토끼로 분장한다. 엄밀하게는 분장한다기보다는 흉내를 내거나 연기한다. 이를테면 그림에서 작가는 발가벗은 채 거북이를 등에 업고 거북이처럼 땅을 기는 자세로 고목과 마주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거북이와 자신을 동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거북이처럼 느린 삶의 방식이나 태도가 갖는 의미를 곱씹게 하며, 무엇보다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재고하게 한다. 빠른 것이 미덕인 문명화된 시대에 이처럼 거북이의 느린 삶의 방식을 제안하고 있는 작가의 태도는 일견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그런 만큼이나 오히려 그 메시지(느림의 미학)는 더 강력하게 그리고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이와 함께 다른 그림에서 작가는 양쪽 귀에다 나뭇잎을 갖다 댄 자세로 명상에 잠겨 있는데, 그 나뭇잎이 흡사 크고 넙적한 토끼의 귀를 흉내 낸 것 같다. 이처럼 작가는 동물(자연)을 흉내 내고 연기하는 행위(질 들뢰즈의 논법을 빌리자면 거북이 혹은 토끼 되기)를 통해 자연에의 동화현상과 그 의지를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을 흉내 내는 행위는 다른 그림들에서 자연과 교감을 시도하고 꾀하는 보다 적극적인 형태로 현상한다. 이를테면 헐벗은 산에 아마도 식수를 위해 심겨졌을 아기 소나무와 가부좌 자세로 마주 앉은 작가를 묘사하고 있는 그림 <아기 소나무와 마주한 생각>에서 소나무의 여린 솔잎과 작가의 수염이 끈으로 묶여 서로 연결돼 있다. 그리고 <풀잎과 마주한 생각>이란 또 다른 그림 역시 이와 유사한 상황이 재현돼 있다.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제목이 암시하는 대로 작가의 수염과 연결된 끈을 통해 실제로 소나무나 풀잎의 생각이 그대로 작가에게 전달될지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 여부가 문제의 핵심은 아닐 것이다. 작가의 이 제스처는 말하자면 자연과 하나 되는 어떤 경지를 이념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을 흉내 내고 자연과 교감하는 행위를 통해 궁극적으론 자연에의 동화현상을 꾀하는 작가는 마침내 자연과 인사하기에 이른다. 즉 자신을 향해 꽃봉오리를 숙여 보이는 꽃들에게 자신도 인사하는 그림 <꽃과 마주한 인사>가 자연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엿보게 한다. 적어도 작가가 보기에 자연은 영적 존재인 것이다. 이로부터 이를테면 샤머니즘과 토테미즘, 범신론과 물활론과 같은 영적 존재로서의 자연관이 고스란히 간직돼 있고,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자연을 향한 경외감이 오롯이 묻어난다. 


이 일련의 그림들, 그러니까 자신의 퍼포먼스 장면을 회화로 옮겨 그린 그림들은 그 속에 실제로 작가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이면에 작가 자신의 이념이나 가치관 그리고 삶의 태도(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나 자연에 동화되는 삶 즉 생태를 실천하는 삶으로 나타난)가 반영돼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자화상의 한 형식으로 볼 수 있다. 일종의 검은 그림으로 범주화할 만한 이 그림들은 대개 칠흑같이 어두운 숲 속에서 발가벗은 채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자연과 교감하고 있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최소한의 달빛이 국부조명처럼 작가의 행위를 비추고 있어서 일종의 신체극을 보는 것 같은 이 그림들과 더불어 작가는 자연에 동화되고 어둠과 일체화된다. 나아가 어둠이 암시하는 존재의 심연 속으로 사라질 것 같은 아득하고 어렴풋한, 희미하고 절실한(희미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강력한) 느낌을 자아낸다. 어둑한 숲속에서 자연과 교감하고 있는 작가의 행위를 재현한 이 그림들은 일종의 흑경 효과로 부를 만한 한 현상을 불러일으킨다(거울이 그저 사물의 가시적 형태를 반영할 뿐이라면, 흑경은 사물의 가시적 형태와 함께 비가시적인 측면마저 반영하고 암시한다). 흑경에 반영된 상처럼 작가의 행위와 함께 어둠 속에 묻힌 존재의 심연을 암시하는 화면이 문명인의 태를 벗고 자기 내부의 자연인과 대면하려는, 자연성과 본성을 회복하려는 심각한 자기반성적 행위와 과정을 일깨워준다. 



유근택, 어쩔 수 없는 난제들. 유근택은 아파트의 거실 정경이나 도회적 삶의 단면을 그림 속에 끌어들여 전통 회화가 안고 있던 소재적 난점을 해소한 것으로 사료되며, 이는 대략 사회적 풍경과 일상적 풍경에 의해 지지된다. 

하나의 풍경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표현한 <어떤 국가주의적 풍경>. 집이 떠내려가고, 소파가 떠내려가고, 맥도날드가 떠내려가고, 스타벅스가 떠내려가고, 삶이 떠내려가고, 시대가 떠내려가고, 이데올로기가 떠내려가는 <풍덩>. 작가는 사회적 풍경이란 프리즘을 통해 제도와 개인과의 관계를 본다. 그리고 그 관계의 장인 일상으로부터 일상이라는 의미의 더께를 걷어내고, 미처 의미화 되기 이전의 일상의 맨살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렇게 드러난 일상은 친근하고 낯설다. 그림 속에 아파트와 공원이 등장하면서 유근택은 전기를 맞는다. 아파트의 실내 정경을 그린 <어쩔 수 없는 난제들>. 꼬마의 장난감으로 어질러진 실내 정경은 그대로 어수선한 세계의 축소판이다. 그 난장판의 바다 위로 장난감 배가 떠가고, 플라스틱 모형 비행기가 전등갓을 스칠 듯 날아오른다. 세상살이는 이처럼 어쩔 수 없는 난제들로서 육박해오지만 그 와중에서도 꽃은 피고 꿈나무는 자란다. 



양유연, 내면적인 너무나 내면적인. 양유연은 박약한 의지와 정신적인 공황 상태와 같은 개인적인 층위에서의 상처 의식과 존재론적 불안의식을 초현실적 기법으로 풀어낸다. 절단된 풍경, 황량한 풍경, 아마도 무의식의 지층으로부터 곧장 소환된 것 같은 알 수 없는 이미지의 편린들이 뿌리 없이 부유하거나 무한 증식되는 무의식적 풍경을 전개해 보인다. 특히 마술 놀이와 분절된 신체의 개념이 흥미롭다. 이를테면 여자 모델을 가구 속에 감금한 후 그 가구를 통째로 절단하는 마술에서 일종의 트릭으로 인해 절단에도 불구하고 정작 모델 자신은 아무런 신체적 손상도 입지 않기 마련인데, 작가는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가구와 함께 절단된 여자 모델의 신체를 보여준다. 작가는 이처럼 보통 상상에 머물기 마련인 가상적 이미지를 현실적 이미지로 끌어낸다. 이렇게 상처를 입은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고, 그 구멍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분다. 



김명진. 심연보다 깊은, 검은 어둠 속에서 섬광처럼 가물거리는. 김명진은 한지를 나무껍질에 대고 탁본을 떠낸다. 그리고 그렇게 떠내진 한지를 세로로 길게 자른 조각을 화면에 연이어 붙여나가는 방법과 과정을 통해서 이런저런 형상을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형상으로 치자면 사람 형상도 있고, 관념적인 형상도 있고, 숲과 같은, 그리고 식물에 혈류가 흐르는 것과 같은 중의적이고(중의적인? 사실을 말하자면 작가의 모든 그림이 중의적이다) 암시적인 형상도 있고, 그저 우연하고 무분별해 보이는 얼핏 알 수 없는 형상도 있다. 작가는 이 일련의 형상들을 풍경이라고 부른다. 풍경? 바로 작가가 세계를 보는 자신의 관점을 반영하고 그린 그림들이다. 이를테면 관념적인 풍경 같은, 내면적인 풍경 같은, 존재론적인 풍경 같은, 그리고 활경 곧 움직이는 풍경 같은. 보기에 따라서 그 그림들이며 풍경에 동원된 기법이 전통적인 자개의 끊음질 기법을 연상시킨다. 


그렇게 작가의 화면은 활성의 이미지며 형상을 향한다. 구축적인 것에서 해체적인 것으로, 결정적인 것에서 비결정적인 것으로, 필연적인 것에서 우연적인 것으로, 지시적인 것에서 암시적인 것으로 진화한다. 그리고 그렇게 진화하면서 근작에 이르는데, 근작에선 전작과는 사뭇 다른 의미 있는 변화가 발견된다. 두드러진 경우로 치자면 여백이 많아지고, 그 여백 속에 마치 무의식의 심연과도 같은 검은 어둠이 들어앉는다. 그리고 동시에 작가는 그 어둠 속에 개인적인 서사를 들어 앉힌다. 그 서사 자체는 작가에 연유한 개인적인 것이지만, 어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서사처럼 보인다. 검은 어둠은 존재론적 어둠이고, 그런 만큼 작가의 그림은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배남경, 기억을 소환하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목판평판법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목판화에서 필수과정인 판각 곧 새김질하는 과정이 없이 석판화처럼 평판으로 찍어낸다고 해서일 것이다. 여기에 먹과 한국화 물감을 사용해 한지의 배면에 충분히 스며들게 한 것도 주목해 볼 부분이다. 한국화 물감을 수차례 반복 중첩 시킨 그의 판화에서는 마치 수묵화를 보는 것과 같은 먹의 색감이며 질감이 느껴진다. 색 바랜 흑백사진을 연상시키는 시간의 결이 느껴지고, 그림의 표면 위로 부각 된 나뭇결에 그 시간의 결이며 존재의 결이 고스란히 중첩돼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희미한 기억을 소환한 것 같은, 사라져가는 시간을 되 불러온 것 같은, 아득하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진주, 의식의 흐름.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도 알려진 것이지만, 의식의 흐름은 물과 같다. 거침이 없고 막힘이 없다.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이다. 상식과 편견과 선입견이 그어놓은 금을 아무렇지 않게 넘나든다. 그렇게 나는 다른 빨래들과 함께 빨랫줄에 널리고, 열린 것 같기도 닫힌 것 같기도 한 투명 상자 속에 담겨 양육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무의식이 그리고 어쩌면 존재론적 상처가 어떻게 자기식의 집을 짓는지, 어떻게 자기만의 서사를 만드는지 보여준다. 



김승영, 구름. 화면 한가운데 구름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점진적인 과정을 포착해 보여주는 작품 <구름>에서 작가는 실제로 구름이 지나갈 때 나는 소리를 이미지와 함께 들려준다. 당연히 보통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이 소리(일종의 채집 음이나 자연 음에 해당하는)를 들을 수 있게 한 과학의 힘이 놀랍고 신비롭기만 하다. 



김승영, 쓸다. 아마도 새벽녘에 스님이 마당을 쓴다. 자기 키만 한 빗자루로 마당을 쓴다. 마당에는 굳이 쓸만한 것도 없어 보인다. 쓸기 전과 쓴 후의 마당이 달라 보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스님은 매일 새벽마다 마당을 쓸 것이다. 무슨 일인가. 수행이다. 비로 마당을 쓸 때 마당에는 빗자루가 지나간 자국이 남는다. 꼭 마당이란 종이에 쓴 속말 같다. 아마도 자기를 비워내는 말일 것이다. 그렇게 스님은 매일 새벽녘에 스스로 비워내기 위해 마당을 쓴다. 여기서 작가는 스님이 비질하는 영상과 함께, 다른 작업에서 관객들이 저마다의 속말을 써서 버린 종이를 태워 만든 재를 전시한다. 공간을 두 개의 방으로 구획하고, 한 방에는 영상을, 그리고 다른 방에는 영상 없이 비질하는 소리와 함께 재를 전시했다. 그렇게 스님이 스스로 비워낸 말이, 관객들의 속말이 재가 되었다. 무념무상, 마음 그러므로 번민도 없고 생각 그러므로 번뇌도 없다. 그렇게 치유가 되었다. 



김승영, 당신은 당신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 창령사 터 오백나한을 소재로 박물관에 설치한 작업. 작가는 전시장 바닥에 벽돌을 깔고 그 위에 좌대에 놓인 오백나한을 모셨는데, 그렇게 마치 전돌 바닥으로 조성된, 드문드문 이끼가 자라는 옛길을 걸어 오백나한을 만나는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다. 흥미롭게도 벽돌 한 장 한 장에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토닥토닥, 아버지, 당신은 당신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와 같은 문자가 텍스트로 아로새겨져 있다. 서로 격려하고 응대하는 말도 있고, 상대방을 위로하는 흉내말(의태어)도 있고, 저마다 속으로 다짐하는 말도 있다. 길을 걸으면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생각해보라는 주문 같기도 하고, 때로 오백나한이 넌지시 건네는 위로 같기도 하다(벽돌에 어떤 문구가 실리는가에 따라서 작업의 성격과 의미가 달라진다). 


그리고 작가는 당신은 당신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 라고 묻는다. 벽돌에 새긴 문구가 작업의 성격을 결정하듯 또 다른 상황이 또 다른 의미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자유를 물어오는 작가의 텍스트는 역설적으로 자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자신에게 구속된 저마다의 자기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수경. 번역된 도자기, 문화충돌과 문화번역. 작가는 접착제를 이용해 도자기 파편들을 붙여나가는 과정과 방법을 통해서 하나의 온전한(?) 형태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작가의 작업은 전통적인 도자기 복원기술에 따른 것인가. 얼핏 그렇게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무슨 말인가. 하나의 형태로 조합된 도자기 파편들은 알고 보면 그 출처가 각양각색이다. 적어도 논리로만 치자면 그것들을 한데 모아놓을 근거는 없다. 작가는 그렇게 억지 조합된 형태를 번역된 도자기라고 부른다. 문명사적으로 도자기는 최초 발원 지역으로부터 다른 지역으로 흘러 들어가 영향을 준다. 그렇게 다른 도자기가 만들어진다. 같은 도자기지만, 저마다 자기식대로 해석하고 번역한 도자기가 만들어진다. 작가의 작업은 바로 그 상호영향사를 주제화한 것이다. 문화충돌과 문화번역을 주제화한 것이다. 이로써 존재치고 저 홀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어쩜 나는 너고 너는 나라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순혈주의와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의심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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