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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안/ 빛의 세례 속으로, 영적인, 감각적인, 황홀한

고충환



이채안/ 빛의 세례 속으로, 영적인, 감각적인, 황홀한 


나의 작업은 한 점 한 점 반복적인 붓 자국으로 만들어진다. 점 하나하나가 숨이고, 인생의 이야기이고, 에너지이고, 기도다...나의 그림은 수행과 호흡 그리고 시간이 일구어낸 작업이다.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현현이다. 그렇게 비가시적인 세계의 들숨과 날숨의 반복으로 나타난 빛을 점화로 새긴다...사람들에게 빛의 이미지를 전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내면의 정화, 상처의 치유,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연결, 낮은 심령으로 나아가기 위한 견딤, 빛의 기다림, 회복과 평안의 기도, 이런 내용들이 영원에 대한 염원이 되어 작품으로 남았다.
작가 노트


빛인가. 빛이다. 헤아릴 수 없는 빛의 입자들이 모이고 흩어지고 쏟아지고 흐른다. 투명한 깊이를 머금은 허공에서, 때로 칠흑 같은 암흑에서 발원한 빛의 입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빛의 길을 내면서 일시에 터지는 폭죽처럼 황홀한 느낌이다. 사위가 온통 빛의 광휘로 가득했을 태초의 하늘을 보는 것도 같고, 우주가 막 태어나면서 용트림하는 빅뱅의 극적인 순간을 보는 것도 같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흐르는 은하수를 보는 것도 같고, 자잘한 빛의 입자들이 서로 희롱하면서 아롱거리는 윤슬을 보는 것도 같다. 

감각적인 느낌이다. 영적인 느낌이다. 이처럼 감각적인, 영적인, 황홀한 느낌은 다 무엇인가. 그 느낌은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인가. 작가는 이 그림들을 왜 그렸을까. 혹 그 속에 숨은 뜻이 있는지도 모른다. 빛이 막 태어나고 우주가 막 태어나던 극적인 순간을 그린 것일까. 그러므로 존재가 유래한 원천을 그린 것일까. 존재가 유래한 원천? 혹 원형 그러므로 존재론적 원형을 그린 것일지도 모른다. 

칼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혹 작가는 자기도 모르는 상태 그러므로 반쯤 무의식 상태에서의 환영을 통해 이런 반복 상징 그러므로 존재론적 원형의 비전을 열어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존재는 암흑이 잉태한, 그리고 마침내 암흑을 밀어낸, 최초의 희미한 빛의 입자(빛의 모나드, 빛의 원소, 빛의 이데아 그러므로 일자?)로부터 유래했다는 진리(아니면 각성)에 도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는 점을 찍는다. 엄밀하게는 붓 자국을 하나하나 찍어나가면서 쌓아 올린다. 촘촘하게 쌓아 올린 부분에서 빛의 입자들은 흰색에 흰색이 묻혀 크고 작은 빛의 흐름을 만든다. 반면 성근 부분에서 빛의 입자 하나하나는 빛이 발원한 허공 혹은 암흑 혹은 우주에 해당할 어두운색의 바탕화면과 대비되면서 더 잘 드러나 보인다. 그렇게 빛의 입자들이 모이고 흩어지면서 거대한 그리고 유기적인 빛의 흐름을 만든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헤아릴 수도 없는,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언제 끝날지도 모를 밑도 끝도 없는 점 찍기를 무한 반복한다. 여기에는 무언가 수행적인 면이 있다. 실제 수행에도 보면, 반복 수행이 있다. 무슨 일이든 한 가지 일을 반복하다 보면 잡생각이 사라지고 그 일과 자기가 오롯이 하나가 된다. 마침내 도가 통한 것이다. 수행이 뭔가. 자기를 잃으면서 찾는 일이다. 잃음을 통해 되찾는 일이다. 무슨 말인가. 


점을 찍기 위해선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고 오롯이 점을 찍는 행위 그러므로 자기에 집중해야 한다. 몰아다.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점을 찍어나가다 보면 온통 점밖에 안 보인다. 점을 찍는 자기는 온데간데없고 세상천지가 다 점인, 반 무의식 상태 혹은 감각적으로 황홀한 상태가 온다. 무아다. 오롯이 자기에 집중하는 행위와 과정을 통해서 오히려 마침내 자기가 사라지고 지워진다. 점찍기에 입문했던 자기와 점찍기에서 빠져나온 자기가 다르다. 그리고 그렇게 잃었던 자기, 잊힌 자기, 억압된 자기 그러므로 불교에서의 진아가 되찾아진다. 그러므로 점찍기는 어쩌면 진정한 자기, 처음 자기를 회복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거듭나기 위한 과정인지도 모르고, 그러므로 일종의 통과의례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한갓 점찍기에서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는 일도, 억압된 자기를 회복하고 승화하는 일도 해석보다는 작가의 몫이다. 작업에 대한 작가의 태도와 입장에 유추해 볼 때, 작가는 실제로 점찍기로 나타난 자신의 작업을 자기반성적인 과정과 하나로 보는 것 같다. 그림을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며, 수단이며, 방편으로 본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 과정과 수단과 방편을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고 싶다고 해야 할까. 아마도 작가가 점찍기를 반복 수행하는 이유이며, 그러므로 그림을 그리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점을 그리고 빛을 그린다. 점으로 형용 된 빛을 그리고, 점으로 표상된 빛을 그린다. 그 빛은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빛의 질료이기도 하거니와, 내면의 빛이기도 할 것이다. 왠지 빛은 물질과 비물질, 자연과 관념의 경계가 불투명한 것 같다. 물론 빛은 감각적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관념의 표상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그 자체 빛의 이중성 혹은 양가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자연에는 이런 이중성이며 양가성을 그 본성으로 가지고 있는 대상들이 많다. 자연에 빗댄 그러므로 인간의 내면을 표상하기 위해 자연을 불러들인 시적 표현이 많은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물질과 비물질, 감각적 현실과 관념적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아우르는 양가성으로 인해 빛은 흔히 초현실적인 존재, 초자연적인 존재 그러므로 어쩌면 절대적인 존재를 표상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작가의 그림은 섬세한 모자이크 장식을 보는 것도 같고,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부드럽고 은근한 빛의 세례를 보는 것도 같다. 그렇게 마치 스테인드글라스로 창문을 장식하고 천창을 장식한 중세 성당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성스러운 느낌이다. 현실과 비현실, 현세와 내세, 땅에 속한 나라와 천상의 제국이 갈라지는 관문에 서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주지하다시피 현세를 내세의 상징으로 보는 것, 유한한 것에서 무한을 보는 것에서 낭만주의 고유의 세계관이, 멜랑콜리와 노스텔저의 감성이 유래한다. 이런 감동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원래 스테인드글라스는 신의 집을 꾸미는 장식을 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이를 통해 문맹인 사람들에게 신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여기서 신의 말씀은 그림으로 묘사된 서사적인 내용을 통해서도 전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그리고 어쩌면 이보다는 스스로 빛으로 화한, 그러므로 그 자신 말씀이고 로고스고 빛이기도 한 신의 존재를 대면하는 경험을 통해서도 전달할 수가 있었다. 서사적인 내용을 통한 이해와는 다른 차원에서의 황홀경을 통해 신과 만난다고 해야 할까. 이처럼 빛이 신을 상징하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빛은 편재하는 신의 증명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굳이 종교적인 신이 아니라 해도, 저마다 간직하고 있는 내면의 빛, 내면의 등불, 내면의 소리 아니면 우주에서 공명하는 소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점에 빗대어 빛을 그린 작가의 그림은 근래에 다시금 재소환되고 있는 영성주의와도 통한다. 아마도 물질주의에 지친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의 그림이 사람들이 잃어버린 자기를 회복하고 치유하고 위로하는 한 줄기 빛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저마다 내면에 간직하고 있던 희미한 빛줄기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어줄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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