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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소, 윤희/ 최소한의 그리기, 매개 없이 그리기

고충환



최병소, 윤희/ 최소한의 그리기, 매개 없이 그리기 



아르테 포베라. 가난한 미술 혹은 빈약한 미술이다. 정형화된 그러므로 제도화된 미술의 문법을 따르지 않고, 일상적인 오브제 그대로를 들여와 재구성하고 재배열하는 방식으로 미학과 반미학, 예술과 비예술,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물고 넘나드는 경향을 말한다. 그러므로 가난하다거나 빈약하다는 의미는 제도의 규범을, 범례를, 관습을, 권위를 찾아볼 수 없다는 말이 되겠고, 예술로 보기엔 지나치게 일상적이라는 말이 되겠다. 그렇게 일상적인 너무나 일상적인 오브제와 행위를 매개로 예술을 돌파하는 반미학적 실천이 있고, 반미학을 통해 미학을 갱신하는 역설이 있다. 

이처럼 아르테 포베라에는 가난한 혹은 빈약한 미술이라는 의미가 있다. 최소한의 미술, 겨우 미술이 되는 미술이라는 의미로 이해해도 되겠다. 최병소의 작업(우손갤러리)이 그렇다. 달랑 연필 한 자루와 신문 한 장이면 족하다. 신문이 없으면 영수증 같은 손에 잡히는 아무 종이만 있으면 된다. 종이마저 없었다면, 아마도 말 그대로 아무 데나 연필로 칠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벽이나 바닥 같은. 심지어 그의 작업에는 그림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고, 의식적인 그러므로 의도적인 행위로 볼 만한 행위도 없다. 이처럼 관습적으로 그러므로 제도적인 관성으로 보기에 그의 작업에는 그림도 없고 행위도 없다. 여하튼 종이에 연필로 칠한 그림 비슷한 것과 최소한의 행위가 있지만. 

그렇게 작가는 신문지에 연필로 선을 긋는다. 긋고 또 긋는다. 밑도 끝도 없이 긋는다. 작가가 아니므로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그렇게 선을 그을 때 작가는 아무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뭘 그리겠다는 의식적인 행위로 볼 만한 여지를 찾아볼 수 없는 만큼,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아무 생각도 없다? 작업 밖에 있을 때 작가는 당연히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작가이기 이전에 일상인이기도 하고, 여느 생활인과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도 일단 작업 속에 들어있는 순간만큼은 거짓말처럼 생각이 없어질 것이다. 

무슨 말인가. 여기서 생각을 주체로 봐도 무방하겠다. 작가는 작업에 입문할 때 이런 주체로 충만했을 것이다. 잡다한 생각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몰아다. 그러다가도 작업 속에 있으면, 의식이 지워지고, 생각이 지워지고, 자기가 지워지고, 내가 지워졌을 것이다. 오로지 무한 반복하는 행위만이 있었을 것이다. 반복 속에 차이가 있는, 차이를 생산하는 반복만이 있었을 것이다. 무아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자기를 지움으로써 자기를 얻는, 자기를 상실함으로써 자기를 갱신하는 이율배반적인 과정이었고, 수행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수행에 보면, 반복 수행이 있다. 무슨 일이든 반복하다 보면 도가 트이는데, 눈을 감고도 그 일을 할 수가 있는데, 말하자면 자기를 잃으면서 얻는데, 아마도 이런 반복 수행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전(의식적인) 사후(부지불식간에 일어난 혹은 얻는)는 중요하지 않다. 아마도 사후적으로 보이는데, 그 사후적인 행위와 과정이 작가를 매번 드러나지 않게 갱신했을 것이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와 보면, 신문지에 연필로 선을 긋는 작가의 행위는 가장 원초적인 그리기 그러므로 그리기의 맹아를 보여준다. 아마도 그리기가 막 유래한 순간을, 그로부터 그리기가 유래했을 시작을 보여준다. 미술사에 보면 이런 그림 그리기의 처음 순간에 주목한 경우가 있는데, 바로 모더니즘이 그렇고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그렇다. 그림은 그림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형식요소로 환원되고(추상미술), 최소한의 평면으로 환원되고(절대주의와 색면화파), 최소한의 행위로 환원된다(행위예술과 개념미술).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그림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신문지에 연필로 선을 긋는다는 최소한의 행위를 매개로 모더니즘의 환원주의와도 통한다. 최소한의 그리기와 통하고, 요새 새삼 주목받고 있는 펜슬리즘과도 통한다. 

다시, 그렇게 작가는 신문지에 연필로 선을 긋는다. 선을 긋다 보면 신문지에 인쇄된 내용이 지워진다. 주지하다시피 기사는 선별되고 각색된 것이다. 이처럼 사실의 얼굴을 한, 사실은 조작된 사실을 지워 없애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론을 검열하고 이를 통해 개개인의 의식을 통제 감시하는 제도의 관습에 대한 작가의 무기력한 제스처이며 저항의 몸짓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에 내재 된 사회학적 의미이며 실천 논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인쇄된 기사가 지워져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을 넘어 작가는 계속 선을 긋는다. 그렇게 무작정 선을 긋다 보면 마침내 종이가 까매지고, 찢어지고, 너덜너덜해지고, 석탄 원석처럼 번들번들해지고, 번쩍거린다. 신문지는 온데간데없고 종이가, 광물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의미론적으로 기사가 무의미해지고, 물질적으로 종이가 광물질로 변환(표면적인 변질?)되는 것이다. 이처럼 물질을, 물성을 변환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에는 연금술적인 일면이 있다.  

작가의 작업은 시종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만큼 공교롭게도 그동안 작가의 전시 중 제안된 주제를 통해 작가의 작업을 정리해볼 수가 있는데, 파생(2015)이 그렇고, 지우고 비우다(2017)가 그렇고, 의미와 무의미(2021)가 그렇다.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인 만큼 선후가 바뀌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작가는 신문지에 선을 긋는 최소한의 반무의식적인 반복행위를 통해 세상의 모든 의미 있는 텍스트가 자기의 한 본성으로서 내장하고 있는 무의미함을 밝히고, 일상이 그런 것처럼 반복을 통해 차이를 파생시키고, 의미를 지우면서 동시에 자기도 비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는 최소한의 그리기로 나타난 그림에 대한 자기반성적 사유가 있고, 자기를 지우면서 얻는 존재론적 성찰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최소한의 그리기를 실천하는 또 다른 한 작가가 있다. 윤희(리안갤러리 서울)가 그렇고, 그의 그림이 그렇다. 그림이 그렇다기보다는 그림에 대한 작가의 태도와 입장이 그렇다. 앞서도 봤지만 여기서 최소한의 그리기란 반무의식적인 그리기, 미처 그린다는 의식조차 없는 그리기, 행위만이 오롯한 그리기 그러므로 반무의식적이고 반복적인 행위가 그림의 자리를 대신하는 그리기를 의미한다. 작가의 경우에 최소한의 그리기는 가능한 한 작가의 개입과 매개를 최소한으로 절제하는 그리기, 우연이 그림을 그리도록 유도하는 그리기, 그림 스스로 그림을 그리게 만드는 그리기로 나타난다. 여기서 작가는 그림을 계획하고 통제하는 능동적인 주체로서보다는 그림이 가능한 최소한의 조건을 제안하고 그 조건을 이용해 그림 스스로 그림을 그리고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는 수동적인 주체로서의 자리에 머문다. 

모든 작업에 항상 지속되어온 일관성은 물질을 내 의도대로 굴복시키려 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되어 나오도록 이끌어내는 것이다. 나는 조각을 한다거나 그림을 그린다고 하지 않고 형상이 드러난다고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아마도 작가의 작업에 대한 태도와 입장을 함축할 것인데, 작가의 이 말이 말년에 이른 미켈란젤로의 번민을 떠올리게 만든다. 돌 속에는 이미 그 자체로 완전한 형상(에이도스)이 내재 돼 있어서 조각가는 다만 불필요한 부분을 떨어내 그 형상이 자발적으로, 저절로 드러나 보이도록 돕는 조력자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능동적인 창조주의 창조행위에 참여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미 그 자체로 완전한 형상이 따로 있었다는 번민과 회의가 몰려오면서 허다한 미완성 조각을 남긴 것은 알려진 바와 같다. 

조각가의 번민은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여기서 분명한 것은 작가라는 존재가 이미 그 자체로 완전한 형상이 저절로 드러나 보이도록 돕는 사람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문제는 한갓 돌덩어리를 통해서, 텅 빈 캔버스를 통해서 이미 그 속에 잠재해 있었던 완전한 형상을 어떻게 알아보는가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도대체 그 완전한 형상이란 뭔가일 것이다. 혹 계획과 통제 그러므로 인위가 만든 그림이 아니라, 우연이 그린 그림일 수도 있겠다. 우연이 그린 그림, 우연과 필연이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만나는 접점에서 저절로 생성된 그림 그러므로 어쩌면 내적 필연성이 밀어 올린 그림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캔버스 위에 물감을 흘리고, 튀기고, 캔버스를 뒤집고 돌린다. 그렇게 캔버스는 매번 다른 물감의 양과 점성이, 캔버스에 가해진 힘과 속도가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낸 흔적으로 낭자하다. 그리고 여기에 아마도 바이오리듬에 해당할 작가의 감정 상태가 매개되면서 반쯤은 즉흥성과 우연성이 만들어낸 무분별한 흔적으로, 비정형의 얼룩으로 흥건하다. 뭔가 미완의 상태, 미결의 상태, 유보적인 상태를 암시하는 잠재적인 운동성으로 팽팽하다. 작가의 감정을 기록한 것일까. 작가의 몸이, 행위가 머물다 간 자리를 그림으로 남긴 것일까. 

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스스로, 라고 부른다. 아마도 그림 스스로 그림을 그리도록 돕는다는, 우연 스스로 그림을 그리도록 유도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작가가, 작가의 바이털이, 작가의 감정이 그러므로 작가의 존재가 매개되고 말았다. 너무 깊숙하게 매개된 것은 아닐까. 또다시 번민은 작가의 몫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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