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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 빛의 질감이 열어놓은 신성, 영성, 그러므로 어쩌면 인성

고충환



박현주/ 빛의 질감이 열어놓은 신성, 영성, 그러므로 어쩌면 인성 


고충환 | 미술평론가

'회광반조, 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춘다는 뜻, 그러므로 언어나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마음속 영성을 직시하는 것. '
선종 불교

반 입체 형식의 오브제 작업이 빛과 공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면, 평면 캔버스 작업은 시간의 흔적들이 쌓여가면서 만들어지는 빛이라 할 수 있다...여기서 빛은 절대적인 존재를, 그리고 색은 물질계의 삼라만상을 상징한다...그리고 마침내 화면 속에서 빛을 좇아가는 작업이 결국은 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임을 깨닫게 되었다.
- 작가 노트


태초에 신이 빛을 창조했다. 그러므로 빛이 세상에 가장 먼저 있었다. 그런 만큼 빛은 이후에 올 것들, 이를테면 생명의 씨앗을 상징하고, 존재의 원형을 상징하고, 만물의 근원을 상징한다. 신을 상징하고, 말씀을 상징하고, 로고스를 상징한다. 숨어있으면서 편재하는 신(루시앙 골드만)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처럼 부재하면서 존재하는, 부재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신을 어떻게 아는가. 바로 이처럼 신을 알고 표현하는 방법이 타고난 도상학자이며 상징주의자이며 표상 제조공인, 그러므로 어쩌면 신의 사제들인 화가에게 과제로 주어진다. 그리고 화가들은 빛으로 화한 신을 표현하기 위해 후광(님부스)을 발명했고, 스테인드글라스를 발명했다. 그리고 그렇게 중세 이콘화를 통해서, 그리고 천창으로 비치는 장엄하고 부드러운 빛의 질감을 통해서 사람들은 신의 임재를 실감할 수 있었다. 

신의 시대가 가고 인간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 그러므로 르네상스 이후 빛은 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을 표현하기 위한, 엄밀하게는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온 신, 그러므로 인격의 일부로서의 신성을 표현하고 암시하기 위한 매개체로 주어진다. 특히 바로크미술에서 그런데, 마치 자기 내면으로부터 은근하고 성스러운 빛의 기운이 발하는 것 같은 조르주 드 라투르와 렘브란트, 그리고 빛의 도입으로 극적 긴장감과 함께 마치 파토스의 물화 된 형식을 보는 것 같은 카라바치오의 경우가 그렇다. 그리고 근대 이후 계몽주의와 자연과학의 시대에 빛은 색의 문제로 넘어가는데, 빛과 색의 광학적 상관성에 처음으로 눈뜬 인상파 화가들이 그렇다. 실제로 인상파 화가들은 색을 찾아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간 최초의 화가들 그러므로 외광파 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그 연장선에 있다고 해도 좋을, 그러므로 재현의 시대 이후 추상의 시대에 그 바통을 색면화파 화가들이 이어받는다. 특히 클레멘테 그린버그와 헤롤드 로젠버그에 의해 지지되는 마크 로스코와 바넷 뉴먼이 그렇다. 각 그린버그로부터 평면성(모더니즘 패러다임에서 회화가 시작되는 근원 그러므로 회화의 그라운드로 보는)을 그리고 로젠버그로부터 숭고의 감정(초월적 존재 감정 그러므로 어쩌면 다시 내면으로 들어온 신성?)을 유산으로 물려받아 정식화한 것인데, 그 유산이 최근 물질주의 이후 그 반대급부로 주목받고 있는 영성주의와 통하고, 크게는 박현주의 작업과도 통한다. 

이미 지나쳐온 줄 알았던 신성을 새삼 되불러 온 것이란 점에서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그동안 잊힌 줄 알았던 신성에 다시금 주목하고 각성하는 계기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인간의 한 본성으로서의 신과 신성에 대해서는 인식론적 문제라기보다는 존재론적 문제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고 여기에 재현으로부터 추상으로, 그동안 달라진 문법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추상 자체가 오히려 부재하면서 존재하는, 부재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신을 표상하는 전통적인 기획과 방법에 부합하는 면이 있고, 이로써 추상을 통한 현대미술에서 그동안 잠자던 신이 다시 깨어났다고, 그리고 그렇게 신이, 그리고 신성이 진정한 자기표현을 얻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빛을 그리고 색을 그린다. 그러므로 빛과 색은 작가에게 소재이면서 어느 정도 그 자체 주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빛과 색을 주제로 한 작가의 작업은 크게 입체 조형 작업과 평면 타블로 작업으로 나뉜다. 이처럼 드러나 보이는 형식은 다르지만, 정작 이를 통해 추구하는 의미 내용은 상통한다고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형식적 특성상 입체 조형 작업이 형식논리가 강하다면, 평면작업은 아무래도 그림 자체에 대한 주목도로 인해 상대적으로 의미 내용이 강조되는 점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먼저 입체 작업을 보면, 주지하다시피 작가의 작업은 벽에 걸린다. 벽에 걸리고, 벽 위로 돌출된다. 일반적인 정도를 넘어서는 상당한 두께를 가진 정방형과 장방형의 변형 틀을 만들고, 그 표면에 대개는 단색조의 색채를 올린다. 그리고 모든 측면, 이를테면 화면의 위아래 부분과 좌우 측면에 금박을 입힌다. 여기서 회화의 전통적 문법인 정면성의 법칙이 소환된다. 우리는 거의 저절로 혹은 반자동으로 그림 앞에 선다. 그림을 정면에서 볼 버릇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외관상 작가가 봐줬으면 하는 부분은 색채가 올려진 정면 부분이고, 그러므로 금박 처리한 측면 부분은 그저 우연히 눈에 들어오는 편이다. 혹은 그렇게 보이도록 조심스레 계획된 부분이 있다. 

그렇게 색이 정면으로 보이고, 빛은 우연히(?) 눈에 들어온다. 간접적으로 보인다고 해야 할까. 간접적으로? 바로 이 부분에 빛의 질감에 대한, 빛의 아우라에 대한, 빛의 울림에 대한 작가의 남다른 감각이 숨어있다. 빛의 진원지 그러므로 광원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이고, 빛을 받은 물체가 그 빛을 되비치는 식으로 제시할 때 빛의 울림이, 빛의 아우라가 오히려 증폭된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정작 색도 없고 금박도 없는 벽면에, 조형과 조형 사이의 허공에 빛의 질감이 생긴다(맺힌다?). 그렇게 조형이 만들어준 조형, 조형에서 비롯된 조형, 조형으로 인해 비로소 그리고 겨우 존재하는 조형으로 치자면 그 전형적인 경우가 그림자다. 그렇게 작가의 입체 조형 작업에선 색면이, 빛의 질감이, 그리고 여기에 그림자가 하나로 어우러지면서 상호 간섭하는 형국을 보여준다. 금박과 함께 때로 금분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금박에 비해 더 부드럽고 은근한 빛의 질감을 얻을 수가 있다. 

이 일련의 입체 조형 작업에서 결정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빛의 질감이 연출해 보이는 특유의 분위기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우연히 본 빛의 질감에서, 간접적인 빛의 질감에서, 되비치는 빛의 질감에서 유래한다. 그렇게 간접적인 빛, 되비치는 빛, 그리고 우연한 빛의 질감이 신의 알레고리 같다. 빛으로 화한 신의 알레고리 같고, 그럼에도 직면할 수 없는 신(신을 직면하면 눈이 멀거나 몸이 굳는다)의 알레고리 같고, 숨어있으면서 편재하는 신의 알레고리 같다. 그러므로 인간 내면의 신성을 각성하고 영성을 일깨우는 빛의 성소 같다. 


그리고 여기에 일련의 타블로 작업이 있다. 입체 조형 작업에 비해 더 내면적이고, 입체와는 다르게 내면적이다. 입체도 그렇지만 특히 타블로 작업에서 작가 회화만의 특장점이랄 수 있는 전통적인 템페라 기법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변용되는 것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생 아사 천에 토끼 아교로 초벌을 한 연후에, 그 위에 호분과 티타늄화이트 그리고 중탕 가열한 토끼 아교 용액을 섞어 만든 젯소로 바탕 작업을 하는데,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회화라고 부를 만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만큼 과정에 철저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그 위에 금박을 붙이기도 하고 금분을 칠하기도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색채를 올리는데, 마치 색 밑에서 부드러운 빛의 질감이 배어 나오는 것 같은, 색 자체가 진즉에 자기의 한 본성으로서 머금고 있던 빛의 잠재적인 성질이 비로소 그 표현을 얻고 있는 것 같은, 색 자체가 은근히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은, 그리고 그렇게 빛과 색이 하나인 것 같은 미묘하고 섬세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그리고 그 분위기에 또 다른 분위기가 가세하는데, 가만히 보면 그림 속에 크고 작은 비정형의 얼룩으로 가득하다. 아마도 금분을 칠할 때 더러 흩뿌리기도 했을 것이다. 아니면 때로 채색을 올리는 과정에서 흩뿌리거나. 그리고 그렇게 마치 타시즘에서와도 같은 비정형의 얼룩이 생성되었을 것이고, 그 위에 채색을 올리면서 그 얼룩이 더 두드러져 보이기도 하고, 때로 화면 속으로 침잠하는 것도 같은 은근하고 부드러운 빛의 질감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크고 작은 비정형의 얼룩들로 가득한 화면 앞에 서면, 마치 화면 속으로 빨려들 것만 같다. 부드럽고 은근한 빛의 반투명한 깊이 속으로 빨려들 것도 같고,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막막한 우주 속을 떠도는 것도 같고, 그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도 같고, 마치 신기루와도 같은, 언젠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질감의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같다. 기억마저 아득한 상처들의 풍경을 보는 것도 같고, 언젠가 설핏 본, 형상은 온데간데없고 다만 그 질감과 색감의 분위기만 남은, 고려 불화의 장엄을 보는 것도 같다. 

실제로는 멀리 있는 것인데 마치 눈앞에 있는 것 같은, 실제로는 아득한 것인데 마치 손에 잡힐 것 같은 감정을 발터 벤야민은 아우라라고 불렀다. 그게 뭔가. 그것은 혹 신일지도 모르고, 인간이 자기의 한 본성으로서 간직하고 있는 신성일지도 모르고, 인간 내면의 잊힌 한 풍경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벤야민은 그 아우라가 중세 이콘화 속에 들어있다고 했다. 그렇게 빛의 질감, 빛의 아우라로 형용 되는 작가의 그림은 어쩌면 예술과 종교가, 인성과 신성이 그 경계를 허무는 어떤 지경을 열어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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