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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엽/ 추상의 역설, 추상은 없다

고충환



천광엽/ 추상의 역설, 추상은 없다 



고충환 | 미술평론가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다. 색과 공이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색을 색이라 하고 공을 공이라 하는 것은 다만 마음의 현혹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색에 현혹될 일이 아니다. 

레드와 블루. 천광엽의 그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색이다. 각 빨간색 시리즈와 파란색 시리즈. 제목이 그렇고 그림이 그렇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을 그저 빨간 색면 그림과 파란 색면 그림으로 봐도 될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안 보고도 이미 알고 있는 빨간색과 파란색을 그린 그림으로 간주해도 될까. 안 보고도 이미 알고 있는? 여기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빨간색과 파란색은 사실은 빨간색이라는 관념이고 파란색이라는 관념이다. 그렇게 우리는 관념을 통해서 색을 본다. 사실은 관념을 통해서 색을 안다. 그렇게 우리는 관념이 실재를 대신하고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언어로 이미 구조화된 세계 속으로 던져진다고 했고, 이를 세계 내 존재라고 불렀다. 장 보들리야르는 시뮬라크라(실제로는 없는 것 그러므로 어쩌면 의식) 그러므로 가상이 실재를 대신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관념을 통해서 보는 것, 가상 그러므로 이미지를 통해서 아는 것, 그래서 정작 실재로부터 멀어지고 아득해지는 것은 어쩌면 의미론적 동물의 숙명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을 다시 보면 거기에 빨간색도 없고 파란색도 없다. 색에 대한 선입견을 재확인시켜주는 그러므로 관념이 본, 관념으로 알고 있는 어떤 색도 없다. 그렇게 정색을 하고 말하자면, 색 자체를 보는 일이 당혹스럽다. 아마도 세계 자체와 대면하는 일이 꼭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색 자체를 본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세계 자체와 대면하는 일에 맞먹는 사건이다. 그렇게 색깔은, 회화는 매번 일회적인 사건이다(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색채라기보다는 일정한 파장을, 스펙트럼을 포함하고 있는 색조라고 해야 할까. 투명하다고 해야 할까. 투명한 두께라고 해야 할까. 투명한 피부가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가닿을 수 없는 깊이를, 심연을, 우주를 내장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균질한 살갗이 머뭇거리는, 기다리는, 들떠있는, 주저하는, 결단하는, 내지르는, 내달리는, 멈칫하는, 웅얼거리는, 입속에서 맴도는 몸의, 행위의, 말의, 의미의 흔적을 뒤덮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색채는 볼 때마다 다르고,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르다. 표시 안 나게, 들키지 않으면서, 저 홀로, 몰래, 움직이기라도 하는 것일까. 다시,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색채는 감각적이고 유혹적이다. 유혹하는 것, 그것은 색의 본성이다. 작가는 말하자면 관념이 아는 색, 관념으로 환원되는 색이 아닌, 팔색조처럼 변신하는 색, 현혹하는 색 그러므로 어쩌면 붙잡을 수 없는 색, 특정할 수 없는 색, 다시, 그러므로 색 자체를 그리고 색의 본성을 그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투명한 깊이를 내장하고 있는, 피부며 살갗을 그린 것 같은 색층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또 다른 먹물을 올려 쌓는 적묵법에서처럼 유화물감을 물처럼 묽게 희석해 일정한 두께가 나올 때까지 덧발랐다고 했다. 때로 붓 대신 나이프로 물감을 엷게 펴 발랐다고 했다. 그리고 물감이 마르면 사포질을 했다고 했다. 기계적인 공정 같지만, 사실은 그 과정에서 의심스러운, 변덕스러운, 까탈스러운 감각의 개입과 간섭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관념으로 환원할 수 없는 빨간색이, 어쩌면 오롯이 작가 자신만의 파란색이 가능했을 것이다. 기계적인 공정(자기를 다잡는)과 감각의 매개(자기를 던지는)가 만들어낸 색이다. 

그렇게 오묘한, 알 수 없는 아우라를 발산하는 색층 밑으로 촘촘한 점으로 구조화된 패턴이 보인다. 패턴은 반복이 문법이다. 반복이 있는 모든 곳에 패턴도 있다. 그렇게 정형화된 패턴이 있는가 하면, 반복을 깨는 비정형의 패턴도 있다. 얼핏 정형화된 패턴으로 뒤덮은 것 같지만, 그 사이사이로, 그 이면으로 설핏 비정형의 패턴이 보인다.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지만, 대개 비정형의 패턴이, 그리고 그 위에 정형의 패턴이 포개진 것으로 보인다. 때로 그 순서가 뒤바뀐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그렇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을 공정으로만 치자면 각 비정형의 패턴이, 그리고 정형의 패턴이, 그리고 그 위에 색층이 중층화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작업이 일상이라고 했다. 일상을 그린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를 그린 것이라고도 했다. 일상이 꼭 그렇지 않은가. 일상은 패턴처럼 반복되지만, 단 한 순간조차 같은 날도 없고, 같은 곳도 없고, 같은 사건도 없다. 들뢰즈식으로 말하자면 자기의 한 본성으로서 차이를 내장하고 있는 반복, 차이를 생성시키는 반복이 다름 아닌 일상 속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었고, 작가의 작업을 통해 그 표현을 얻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일상과 작가의 작업과의 관계는 유비적이다. 반복 패턴과 반복을 깨는 패턴을 일상에 빗댄 것이 그렇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얼핏 회화의 당위성을 형식논리에서 찾은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따른, 모더니즘의 환원주의에 충실한 추상같지만, 사실은 서사적이고, 유비적이고, 일상적이고, 자기적이다. 

그러므로 다시, 작가의 그림은 일상을 그린 것이고, 다름 아닌 자기를 그린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존재를 그리고 존재의 본성을 그린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이 길항하고 우연과 필연이 부침하는, 이성과 감성이, 에토스와 파토스가, 전진과 변덕이, 의미와 무의미가, 결단과 포기가, 환희와 후회가, 절정과 나락이, 다잡기와 던지기가 몸을 섞는 자기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자기를 그린 것이고 존재를 그린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또렷해지고 존재가 선명해졌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고, 그럴 일도 없다. 자기는, 존재는 다만 음울한 무의식처럼 패턴과 패턴, 패턴과 색층, 색층과 색층 사이에 숨어있고, 알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면서 겨우 암시될 뿐.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는, 존재는 인식론의 대상이 아닌, 감각의 대상일 수 있다. 종잡을 수 없는 몸이, 의심스러운 마음이 일상을 살고 사건을 겪는 와중에서 순간적으로 또렷해졌다가도 희미해지는, 손에 잡힐 것 같다가도 멀어지는 자기를, 존재를,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는 흔히 후기 미니멀리즘과 후기 단색화로 분류되고 범주화된다. 미니멀리즘은 원래 최소한의 미술, 겨우 미술이 되는 미술, 그러므로 어쩌면 상황 미술에서 유래했다(마이클 프리드의 연극성 개념이 예시하고 있는 것과 같은). 미술이 되고 안 되고는 상황에 연동된다. 어떤 상황 속에 들어가는가에 따라서 미술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상황이 달라지면 미술 또한 달라진다. 그리고 그 상황은 미술에 대한 시대적이고 당대적인 정의에 따라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다. 결국 미니멀리즘은 제도가 미술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유래했다. 같은 문제를 개념 그러므로 의미론으로 풀면 개념미술이 되고, 상황논리로 풀면 미니멀리즘이 된다. 그런 점에서 미니멀리즘은 어쩌면 마르셀 뒤샹에게서 유래했다고, 최소한 예시되었다고도 할 수가 있다. 

작가를 미니멀리즘으로 분류하는 것은 미니멀리즘의 이러한 상황논리로서보다는 형식논리(이를테면 단순한 색깔과 최소한의 구조와 같은) 그러므로 어쩌면 모더니즘의 연장선에서 본 것일 터이다. 그 자체 작가가 유전자로 물려받은, 작가의 몸에 밴 모더니즘의 잔재로 봐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물려받은 자산을 매개로 미니멀리즘을 후기 미니멀리즘화한다. 서정적이고, 우호적이고, 함축적이고, 시적인, 때로 부드럽고 더러 우울한, 때로 표면적이고 더러 깊은, 때로 감각적이고 더러 존재론적인, 투명한 피부 속에 불분명한 심연을 숨겨 놓고 있는 미니멀리즘이 그렇다. 

그리고 여기에 오브제가 있다. 작가가 건조한 색층을 사포질할 때 나온 가루를 응고시킨 침전물이다. 작가는 왜 이 가루를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을까. 그리고 왜 응고시켜 침전물 덩어리를 만들고 보존했을까. 그 침전물은 색에서 나온 것이므로 색의 침전물일 것이다. 그 침전물 덩어리가 퇴적층처럼 보인다. 시간의 퇴적층처럼 보이고, 작가가 작업하면서 흘렸을 땀의 증명처럼 보이고, 그림 앞에서 고민하고 분투했을 번민의 흔적처럼 보인다. 

작가는 색을 그린다. 그리고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라고 했다. 색과 공이 다르지 않다고도 했다. 비록 색을 그리지만, 그 색을 공으로 되돌려놓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 색이 무위로 되돌아가는 일만큼은 막고 싶었을 것이다. 그림이 다름 아닌 자신임을 증명하고 싶었고, 그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색이 공이고 공이 색임을 증명하는 방법을 마침내 찾아냈을 것이다. 여기서 색은 감각이다. 몸이다. 유혹이다. 그렇게 몸으로 사유하고 감각에 현혹되는 작가가 마침내 찾아낸 역설을 통한, 역설로 나타난, 존재 증명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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