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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선주/ 요릭과 오필리어, 삶을 정화하는 죽음

고충환


한선주/ 요릭과 오필리어, 삶을 정화하는 죽음 


고충환 | 미술평론가

죽음에 대한 사색은 삶에 대한 시각과 태도로 귀결되므로 결국 죽음_유한성에 관한 이야기는 삶_영원성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바탕에서 벌어지는 내면의 시간과 판타지의 세계를 문학적 장치와 회화작업으로 연출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 스스로 현실의 조건으로 인한 허무와 무력함을 극복할 수 있는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죽음(요릭)과의 서신을 통해 밝혀지는 현실 속의 구원이 주제다. 
- 작가 노트


미슈테카의 노래. 고도를 기다리며. 친애하는 요릭에게. 먼지로 쓴 시. 작가가 제안하는 이야기 4부작이다. 죽음에 대한 알레고리다. 삶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해도 좋다.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해도 좋다. 죽음이 열어 놓은 삶, 그러므로 죽음으로 거듭난 삶의 알레고리라고 해도 좋다.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일 것이므로.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을 것이므로. 매 순간 삶을 살면서 죽음을 생각하는, 시시각각 삶 속에 죽음을 맞아들이는, 그렇게 삶과 죽음이 하나로 직조된 것이 삶일 것이므로. 

범신론과 물활론, 샤머니즘과 토테미즘과 더불어 살았던 신화적 현실 속에서 삶과 죽음은 하나로 연속돼 있었다(연속성). 그리고 점차 자본주의가 첨예화되면서 경제성이 없는 것들,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들이 타자로 지목되고 변방으로 밀려났다. 그렇게 추방된 타자 중 지극한 타자가 죽음이다. 그렇게 죽음은 금기가 되고 잉여로 남았다. 그렇게 삶과 죽음은 단절되었다(불연속성). 여기서 조르주 바타이유는 자본주의의 비인간화에 대해서, 처음 상태의 회복에 대해서, 무정형을 통한(아르토라면 잔혹을 통한, 이라고 했을) 전인적인 인격의 회복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삶을 정화하는 죽음에 대해서, 에로스를 정화하는 타나토스에 대해서 말한다. 여기서 타나토스 곧 죽음충동은 이중적이다. 개별주체가 진정 자리를 실현한 것이지만, 동시에 억압적인 삶이 투명해지고 적나라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삶을 정화하는 죽음에 대해서는 프로이트 이전에 낭만주의가 먼저다. 특히 밤을 찬미하고 죽음을 예찬한 노발리스가 원천이다. 처음으로 여성 저승사자가 등장하는, 죽음이 저토록 감미롭다면 기꺼이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은,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내세에 기약하는, 묘지와 폐허에 매료된, 유한에서 무한을 본 낭만주의에서 삶은 다만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한 상징으로서만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낭만주의의 누이인 상징주의와 라파엘전파(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어의 죽음)에서 죽음을 향한 낭만주의의 연모가 그 진정한 실현을 얻는다. 하나같이 문학적인, 문학적인 서사가 강한, 문학과 미술이 자매라고 해도 좋을 시기며 형식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삶보다 예술이 먼저인, 예술이 삶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예술을 모방하는 예술지상주의와 그 추종자인 댄디즘(오스카 와일드와 보들레르)이 가세하면서 죽음이 그 미학적 의미를 덧입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최초 작가가 제안한 주제로 돌아가 보자. 작가는 상실을 슬퍼한다(미슈테카의 노래). 그리고 누군가가 상실에 빠진 자기를 건져주기를, 혹은 상실이 가만히 떠나가 주기를 기다리지만, 상실은 그대로 있다(고도를 기다리며). 그리고 마침내 상실과 화해하고, 상실을 자신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친애하는 요릭에게). 그리고 종래에는 주검의 재를 바람에 실려 보내듯 상실을 시로 승화시켜 떠나보낸다(먼지로 쓴 시). 어느 날 상실이 자기를 찾아왔고, 머물다가, 가버린 이야기, 그러므로 상실의 연대긴가. 상실을 아파하고, 상실과 친해지고, 마침내 상실을 떠나보낸 이야기, 그러므로 통과의례 혹은 성장 서사(모든 이야기가 유래한 이야기, 이야기들의 이야기, 그러므로 원형적 이야기)인가. 옴니버스, 그러므로 상실을 주제로 한, 서로 별개이면서 하나로 연결된 4개의 단편인가. 여기서 상실은 무슨 의미인가. 작가는 무엇을 상실했고, 왜 슬퍼하는가.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상실은 현대인의 질병이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질수록 꼭 그만큼의 빈자리, 그러므로 상실을 정신적인 공황 상태가 채운다. 이렇듯 물질과 정신의 차이를 뒤르켐은 아노미 현상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현대인은 신을 상실했고, 중심을 상실했고, 존재를 상실했고, 자기를 상실했고, 고향을 상실했고, 원형을 상실했다. 존재하는 이유를 상실했고, 삶의 의미를 상실했다. 이처럼 도저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하는 징후며 증상이 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칼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는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현대인은 이처럼 아득한 기억, 그러므로 원형적 기억, 다시, 그러므로 자기가 유래한 원천을 상실했다. 그리고 고향은 어떤가. 여기서 현대인이 상실한 고향은 지정학적 장소와는 상관없는, 존재론적 상실을 의미한다. 그렇게 현대인은 존재론적 뿌리도 없이, 정처도 없이, 부유하는 삶을 산다. 그러므로 게오르그 짐멜이 보기에 고향의 상실감은 지극한 현대적 현상이다. 

그리고 상실 중 지극한 상실로 치자면 죽음이다. 프로이트는 상실(감)과 관련해 애도와 멜랑콜리 그러므로 우울을 대비시킨다. 여기서 상실을 인정하는 태도가 애도에, 그리고 상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상실된 대상에 들러 붙어있는 경우가 멜랑콜리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상실을 자신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애도도 가능해진다. 여기서 작가는 죽음을 말하기 위해 죽음을 상징하는 요릭을 소환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 나오는 광대로, 죽은 요릭의 해골을 보고 하는 햄릿의 방백으로 유명해진 극 중 캐릭터다. 

그렇게 작가는 극 중 햄릿처럼 요릭, 그러므로 죽음이 가져다준 상실을 슬퍼한다. 상실을 슬퍼하는 것도 같고, 외관상 보기에 상실에서 빠져나온 연후에도 슬픔이 여전한 것도 같다. 상실로 우울해하는 것도 같고, 상실을 시로 승화시킨(그러므로 떠나보낸) 연후에도 여전히 상실을 애도하는 것도 같다. 우울도 슬픔이고, 애도도 슬픔이다. 슬픔도 슬픔이고, 시로 승화된 슬픔, 그러므로 떠나보낸 슬픔도 슬픔이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슬픔이 주는 정화, 비극을 통한 정화)와도, 그리고 밀란 쿤데라의 비극(현대인의 삶이 비극적인 것은 현대인이 비극을 상실했다는 것에 있다)과도 무관하지 않은 지경이고 감정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슬픔에서 빠져나온 연후에도 여전히 슬픔(작가의 표현대로라면 맑은 슬픔) 속에 있었다. 


문학적인 서사가 강한 작업인 만큼 작가의 그림에는 이런저런 상징들이 등장한다. 그중 전형적인 그리고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종이로 만든 집(먼지로 쓴 시), 그리고 해골과 욕조(친애하는 요릭에게)가 주목된다. 종이로 만든 집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등장하는 빈집을 차용하고 각색한 것이다. 세상 끝으로 유배 온 선비의 강골을 표상하기라도 하듯 쓸쓸하고 검박한 집을 차용해, 절대적인 고요라고 해도 좋을 정적만이 흐르는 텅 빈 화면이 오히려 충만해 보이는, 그러므로 명상적인 분위기의 집으로 각색했다. 

그렇게 고요한 화면 위에, 파문이 오히려 더 적요해 보이는 물 위에 종이집이 떠 있다. 종이집은 곧 물에 젖을 것이고, 머잖아 물속에 가라앉을 것이다. 집은 흔히 정체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사물주어 혹은 사물 인격체로 나타난 작가의 분신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물은 반영하는 성질로 인해 거울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물 위에 떠 있는 집은 자기반성적인 계기를 상징한다. 물 위에 떠 있는 것도, 물에 젖는 것도, 물속에 가라앉는 것도 자기다. 여기에 물 자체도 자기다(무의식? 심연?). 최초로 자기반성을 예시한 나르시스가 그런 것처럼 자기가 자기에게 젖고 빠지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타자들이 산다고 했다. 자기_타자다. 그러므로 자기반성적인 계기를 통해 억압된 자기, 무의식적 자기, 자기_타자와 대면하는 사건(혹은 명상)을 그린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자기_타자와 만나는 자기반성적인 계기 혹은 사건을 통해 자기의 무엇을 반성하는가. 자기반성적인 거울은 무엇을 작가에게 되비춰 보여주는가.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어는 상실과 죽음 그리고 자기 구원이다. 죽음이 준 상실, 그리고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상실감으로부터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주제다. 

그렇게 작가는 죽음을 호출하는데, 요릭을 호출하고 오필리어를 호출한다. 두 죽음의 상징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실제 그림에서 요릭은 해골로, 그리고 오필리어는 욕조로 대체된다. 여기서 욕조는 종이집처럼 또 다른 자기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죽은 자기? 죽음을 쳐다보는 자기? 그런데, 왜 욕조인가. 주지하다시피 욕조는 가장 사적인 공간이며 장소고 사물이다. 그리고 욕조는, 더욱이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물 위에 떠가는 욕조는 마치 요람을 흔드는 바람처럼 유년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 또 다른 사물주어 혹은 사물 인격체로 나타난 욕조, 그러므로 자기 분신이 강을 건너는 일련의 풍경화를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삶이라는 강일 것이다. 그리고 건너편에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죽음이라는 강일 것이다. 그렇게 나룻배와 함께 이미 강물에 몸을 실은 한 사람이 뭍에 서 있는 다른 한 사람에게 안녕 인사를 고한다. 내가 나에게 인사를 고한다. 삶이 죽음에게, 죽음이 삶에게 인사를 건넨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이야기의 기술일 수 있다. 삶을 이야기하고, 죽음을 이야기하고, 재생을 이야기하고, 환생을 이야기하는 기술이다. 그 이야기들의 와중에서 통과의례가 나오고, 정화의식이 유래하며, 거듭나기가 파생된다. 그 경우와 세목은 다 다르지만, 결국 존재에 대한 이야기, 그러므로 존재론적 서사라는 원천으로 모인다. 존재론적 서사? 이데올로기와 함께 전형적인 거대 담론이다. 

혹자는 거대 담론의 시대는 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시대착오적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 삶이, 죽음을 사유하지 않는 삶이, 재생과 환생이 없는 삶이, 원형과 자기를 모르는 삶이 가능한가. 최소한 유의미한가. 그런 것 없이도 가능하고 유의미한 삶도 있겠지만, 그런 것으로 인해 삶은 비로소 가능하고 유의미해진다는 점도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게 상실과 죽음, 그리고 자기 구원을 주제로 한 작가의 그림은, 그러므로 기획은 사사로운, 너무나 사사로운 미시 서사의 시대에 오히려 그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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