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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우, 인간과 대지 사이에 풀이 있었다

고충환




박인우, 인간과 대지 사이에 풀이 있었다 



처음엔 합판에 그린 것인가, 했다. 알다시피 합판은 실처럼 가녀린 나무와 나무를 날실과 씨실로 직조한 구조를 하고 있다. 그래서 그 위에 그림을 그리면 그림 밑으로 나뭇결이 드러나 보인다. 캔버스가 귀한 시절에 화가들은 곧잘 합판에 그림을 그리곤 했지만, 지금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법과 형식실험을 위해서 그린다. 작가가 그런 경우인가,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뭇결인가, 싶었던 세선은 알고 보니 캔버스 위에 그린, 붓을 세워 하나하나 그린, 빳빳하게 서 있는 풀을 그린 것이었다. 보통 풀을 그렇게 하나하나 그리지는 않는다. 작가의 전작이나 다른 그림에서도 그렇지만, 대개 붓을 눕혀서 터치로 그리거나 붓질을 중첩 시키면서 풀을 암시하는 식이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풀을 암시하던 것에서 빳빳하게 서 있는 풀 하나하나를 그리기 사이에 무슨 의미심장한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정작 작가는 어느 날 불현듯 풀이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불현듯 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작가는 진즉에 오랫동안 풀을 그렸었다. 그럼에도 불현듯 이라고 하는 것은 그동안 풀을 보는 작가의 시각이 달라졌고, 풀을 그리는 방식에 눈에 띄는 변화가 있어서이다. 지금까지 다른 조형 요소의 한 부분으로서 풀이 그려졌었다면, 근작에서 풀은 그림을 주도하는, 말 그대로 주인공이고, 주제(그리고 주체)라고 해도 좋다. 빳빳하게 서 있는 풀 하나하나를 그리는 식이 작가가 처음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적어도 풀에 남다른 의미가 부여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작가는 한갓 풀에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인가. 보통 풀처럼 흔한 것, 진부한 것, 일상적인 것, 상식적인 것은 잘 보이지도 잘 들리지도 않는다. 사실을 알고 보면 다름 아닌 그것들이야말로 세상을 떠받치는 기초고,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인데도 말이다. 의식의 역설이고, 지각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제안한 것이 낯설게 하기며, 소격효과다. 사람들은 일상을 보고도 보지 못하고, 알고도 알지 못한다. 역설적으로 일상이 너무나 일상적이어서이다. 그래서 일상을 낯설게 하면, 어, 이게 뭐지, 하고 비로소 일상을 보고 듣고 알게 된다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빳빳하게 서 있는 풀 하나하나를 그린 작가의 풀 그림은 사람들이 새삼 풀을 다시 보게 만들고, 다시 듣게 만들고, 다시 알게 만든다. 풀이야말로 다름 아닌 세계의, 우주의, 자연의, 생명의 최소 단위원소임을 새삼 인식하고 자각하게 만든다. 세상은 풀처럼 흔한 것, 진부한 것, 일상적인 것, 상식적인 것으로 지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인정하게 만든다. 오랜 작업과 사유의 과정을 통해서 작가에 체화된 전략(낯설게 하기)이라고 해도 좋다. 사람들이 잃어버린 자연을, 생명을, 일상을 되돌려주기 위해 작가가 찾아낸 생활철학의 제안이라고 해도 좋다. 


그 풀 속에, 풀이 웃자란 숲속에 빈터가 있고, 금이 그어져 있고, 알 수 없는 숫자가 매겨져 있고, 사람 두상이 덩그렇다.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조차 치열했을 삶의 흔적을 증언하는 기호들이다. 자연 상태에서 동물들은 각자 자기구역이 정해져 있다. 심지어 전깃줄에 앉은 참새들도 자리다툼이 치열하다. 여기까지는 생리적 현상이라고, 자연의 섭리라고 봐줄 만한 것이지만, 유독 자기 자리에, 나아가 남의 자리에마저 욕심을 내는 것으로 치자면 인간이 유일하다는 점에서 예외적이다. 

경제 제일주의 원칙과 효율성 극대화의 법칙으로 견인되는 자본주의의 욕망은 경제성이 떨어지는 것들, 효율성이 없는 것들을 변방으로 내모는데, 잉여 인간(조르주 바타이유)이 그렇고, 법으로부터 마저 보호받지 못하는 벌거벗은 인간(조르조 아감벤)이 그렇다. 무분별한 재개발과 강제 철거로 졸지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오갈 데 없는 원주민이 그렇다. 그러므로 숲속의 빈터는 혹 그렇게 내몰린 원주민이 살았던 삶의 터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리송한 숫자는 철거될 집들을 스프레이로 거칠게 표시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표정한 사람의 두상은 원주민일지도 모르고, 원주민을 생각하는, 그러므로 시대를 지켜보고 증언하는 작가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숲속에 그어진 금은 자본가가 자기 땅을 표시해놓은 것인지도,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욕망을 표상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무분별한 재개발 현장 위로, 자본주의의 욕망 위로, 원주민의 눈물 위로 풀이 웃자라 덮어서 가린다. 한때 이곳에도 사람이 살았었음을, 한때 이곳에서도 치열한 삶이 있었음을, 때로 지옥과도 같은 아귀다툼이 있었음을 침묵으로서 증언하고 있지만, 어찌 알랴. 풀의 복원력이란, 생명력이란 얼마나 치열하고 끈질긴 것인가. 그렇게 풀은 삶을 덮고, 상처를 가리고, 눈물을 삼키고, 역사를 삼킨다. 그 속에 존재를 숨겨놓고 있는 것이다. 부재를 통해서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풀밭은 숲속에 숨겨진 작은 광장이라 할만하고, 역사의 장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불현듯 풀이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풀이 새삼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렇게 작가는 다시 풀 앞에 섰다. 그동안 우회로를 참 멀리도 돌아온 끝에 이제 다시금 자연(그러므로 어쩌면 집)에 귀의하고 싶은 것일까. 자연 그러므로 자기 본연을 되찾고 싶은 것일까. 이제 그만 내려놓고 자연과 더불어 살자고 권면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자연이 숨겨 놓고 있는, 풀이 기억하고 있는 삶의 흔적은, 상처로 남은 자국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작가는 옆을 보는(프로필) 얼굴 형태의 변형 캔버스에 그린 일련의 선택 시리즈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다름 아닌 너를 선택하기 위해 때로 냉정했고 더러 눈물을 삼키기도 했던, 긴박했던 선택의 순간들을 그렸다. 선택을 위해 번민하는 과정을 그렸다. 먼 길을 돌아 자기의 본연인 자연에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 그렇게 풀 위에 다시 선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결단이 아니었음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겠다. 
경쟁으로 내몰린 삶을 사는 현대인은 순간순간 선택과 판단의 귀로에 서 있다. 혹자는 때로 자기 능력 이상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기를 요구하는 사회를 피로사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치열한 삶 속에서 어떤 이는 순간판단불능증을 호소하기도 한다. 순간적으로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그리고 여기에 아마도 자기가 누구인지) 판단정지 상태에 처한 것이다. 순간적으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다고 해야 할까. 그저 가속페달을 밟을 뿐인 초고속과 초능력을 요구하는 현대사회가 낳은 징후이고 증상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고유한 질병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선택을 주제로 한 작가의 이 일련의 그림들은 자신의 본연인 자연으로 돌아가기까지 작가가 번민했을 선택의 긴박한 순간들을 표현한 것이면서, 동시에 순간순간 선택과 판단의 귀로에 서는 현대인의 삶의 질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어도 무방하겠다. 


그리고 작가는 언젠가부터 평면작업과 함께 돌조각을 병행해왔고(그 전에 이미 목 조각으로 시동을 걸었지만), 이번 전시에서 그 성과의 일부를 전시한다. 특이하지 않아서 특이한 경우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그저 길이나 숲이나 강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막돌을 소재로 한 것이 그렇다. 막돌은 가공하지 않은 돌 그대로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서 그 꼴이 각양각색이다. 각양각색이지만 가만히 돌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돌 속에서 저마다 다른 생김새가 떠오른다. 그러면 작가가 그렇게 숨어 있는 꼴이며 잠재된 생김새가 자기를 실현할 수 있도록 밖으로 끄집어내 주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말년에 미켈란젤로는 형상 문제로 번민했다. 돌 속엔 에이도스 그러므로 이미 그 자체로 완전한 형상이 숨어 있어서 작가의 창조가 매개될 여지가 별로 없다. 그래서 조각하다 만 조각이 즐비한데, 지금 보면 어떤 현대조각보다도 더 현대적으로 보인다. 작가 역시 아마도 체질적으로 그러므로 몸적으로 이런 에이도스의 존재를 체득하거나 체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풀만큼이나 흔한 사람들, 진부한 사람들, 일상을 사는 사람들, 상식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 못생겨도 좋고 잘 생기면 더 좋은 사람들, 그러므로 어쩌면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의 초상을 돌 속에서 캐낼 수가 있었을 것이다. 자연에 귀의하면서 풀과 함께 작가가 찾아낸, 자연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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